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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Dec 04. 2020

위로와 응원의 말을 들어도 더 이상 힘이 나지 않았다

상대의 위로와 확신 사이에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있었다

  임용을 준비한 후 해가 거듭될수록 ‘요즘 뭐해?’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임용 시험을 준비한다는 나의 말에 상대는 ‘잘될 거야’, ‘이번에는 붙을 거야’라고 응원과 위로의 말을 해주지만 이미 내 마음은 썩어버릴 대로 썩어버려 ‘아이고, 아직도...’, ‘언제까지 하려고?’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아 마냥 좋게만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갈수록 만나는 사람이 더 없어졌고, 생활반경의 폭을 더욱더 줄여갔다. 진심을 담아 해주는 위로와 응원이 삐딱하게 들리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대화들이 버거워졌고 어느새 피하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어떤 분이 내가 임용 시험공부 한다는 말에 한숨 섞인 표정과 말로 정말 제대로 된 위로를 해주셨다. 본인의 조카분이 역사 임용 시험을 5년째 보고 있다고 나 또한 그렇게 될 거라고 오래 걸릴 거라고 말이다. 분명 위로와 걱정과 응원을 담아 해주셨던 말이겠지만 그 말은 내가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떠오르는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애써 지우고 지워도 나를 응원해주는 그 어떤 위로보다 이런 저주가 가슴에 콕 박혀있는 듯했다. 이를 지우는데도 4년이 걸렸다. 


  이렇게 친척을 만나는 것도, 적당히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잘될 거야’ 라는 말들이 부담스러워지면서 모든 만남들을 회피했다. 이러한 응원과 위로는 매해 1차 합격이 발표되는 1월이 더 고역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에 ‘떨어졌어요’라는 팩트만을 전달하기보다 이제는 어두가 길어졌다. 2점 차로, 0.2점 차로, 사립 2차에서. 떨어진 건 매한가진데 앞에 그런 어두를 붙이면, 아깝다, 아쉽다라고 포장할 수 있었고, 듣는 상대의 위로가 진심으로 해주는 위로로 다가왔었다. 그건 나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친척과 지인들이 내 결과를 물을 때마다 ‘이번엔 사립 1차에는 붙었었는데... 그건 뭐 공립 1차 된 거나 마찬가지지...’ 이런 안타까움을 잔뜩 담은 말을 하게 하는 내가 죄송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간 가족의 희망과 남들의 위로를 먹고 버티며 살았다.      


  나 역시 여러 번의 시험으로 이미 마음은 지쳤고 희망을 품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언제부터인가 ‘이번엔 되겠지’, ‘될 거야’라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이 말들은 ‘It might be’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확신의 표현이랄까. 이렇게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지쳐갔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공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만 마지막 시험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아마도 4개월간의 짧은 기간제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로부터, 주변 선생님들로부터 얻는 에너지와 자신감이 한몫했을 것이다. 왠지 느낌도 좋았다. 이때부터 어느샌가 ‘되겠지’, ‘될 거야’가 아닌 ‘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2019년. 된다 된다 하다 보니 상대의 그저 그런 위로와 응원이 확신으로 돌아왔다. ‘되겠죠 뭐.’라는 말에 상대는 위로밖에 해줄 수 없었지만, ‘15명 중 한 명은 나야’라는 확신 섞인 말에 ‘니가 안 되면 누가 되겠노.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아 붙을 것 같아’라는 또 다른 확신으로 돌아왔다.      


  다 끝난 마당에 하는 소리일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져주지 않으면 누가 나에게 확신을 가질 것이며, 남이 가져주는 확신조차 허상뿐인 위로라고 치부하며 불편하게 여기는데 그 마음으로 어떻게 붙기를 바라는가 싶었다. 사실 나를 진정 생각해주는 이들의 말은 내가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나 5년이 지났을 때나 변함없이 똑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실패로 마음이 무뎌지고 자존감은 떨어지고 내가 나로서 바로 서 있질 못해서 허울뿐인 위로로 한숨 섞인 걱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나는 될 거다!’ 라고 마음먹었던 순간 모든 것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올인으로 준비하는 마지막 시험이 되었을 2019년 시험을 망치고도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도, 2020년 1차 합격 이후 수업 실연에서의 꽤나 큰 실수로 불안감에 떨고 있을 때에도 주변 사람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이었다.


  생각해보면 상대의 위로와 확신 사이에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있었다. 상대의 위로와 걱정을 확신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나의 확신이 없으면 그저 흩어져버릴 공기 중에 떠다닐 가벼운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걱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비수를 꽂는 아픈 말들도 내 확신이 있었다면 더 빨리 지웠을지도 모른다. 5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뭐해? 어떻게 됐어?’를 들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대답을 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위로와 응원을 들었을 것인가. 그 기도와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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