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갈 필요가 없어 보였지만, 서울로 가기로 했다
4년을 공부하면서도 이상하게도 한 번도 노량진에 가야겠다고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재정적인 문제가 제일 컸을 테다. 아일랜드에서 1년 남짓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노량진에서의 체류비와 학원비 이 모든 것들을 부모님께 손을 빌리는 것이 싫었다. 공부에 올인하는 동안 돈을 벌 수 없는 만큼 그저 엄마가 해주는 밥과 매일 집에 있는 반찬으로 준비한 도시락, 소액의 커피값 정도면 충분했다. 2019년 4개월간의 기간제 생활로 공부에 올인했던 최근 3년 동안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되면서 인강 정도는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노량진 인강을 들으면서 올해는 시험을 잘 봐서 2차 준비는 노량진에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했다.
스물아홉. 올인해서 준비하는 마지막 시험이었다. 시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더 이상 돈벌이 없이 이 시험만을 될 때까지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긴장했고 더 간절했다. 시험지를 받고 첫 심정은 허탈함, 허무함이었다. 문제는 기년보다 더 난해했고 시험을 치는 중에도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몇 년 동안 읽고 보았던 전공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고 여느 다른 책의 귀퉁이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이 문제로 나왔다. 몇 년을 더 공부한다고 해도, 1년 뒤에 똑같은 이 시험을 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정답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허탈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물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고사실의 수험생들의 한숨 소리가 내 마음과 같았음을, 동병상련이라는 것은 분명할 테다.
더 이상 이 시험을 계속 도전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몇 년간 내가 학습한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면 어려워지지 쉬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응은 학원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채점을 하고 예상 점수에 따라 1차 합격과 불합격을 예상해보고, 2차 준비를 하게 되는데 그것조차도 쉽사리 점쳐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기년보다 1차 합격 예상 컷트라인은 10점 정도가 떨어진 상황이었고 나 역시 2차 시험을 준비해야 할지. 기간제 원서 접수에 공을 기울일지, 공무원을 알아볼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1분 1초가 흐를수록 1차 합격에 대한 확신이 흐려졌다. 노량진에서 2차 준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무슨 당장 2차 준비를 할지 말지부터 고민이었다. 나 역시 가채점 결과 작년 성적보다도 10점가량이 떨어진 상태였고, 주변 수험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더라도 그들에 비해 훨씬 성직이 좋지 않아 보였다.
1차 시험 후 1차 합격 발표까지 한 달이 걸리는데 이때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2차 준비를 하게 된다. 1차 합격이 어렵다 하더라도 언젠가 치를 2차 준비를 하면서 면접과 수업 실연의 스킬을 나름대로 쌓을 수 있다. 반면 2차 준비를 포기하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남들보다 한 달 이르게 1차 공부를 하기도 한다. 나는 이 시간을 그저 보내는 것은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과거를 외면하는 것 같아 합격이 어려워 보여도 늘 2차 준비를 했다. 또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2차를 준비하며 합법적으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기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험을 망쳤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돌아서고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가채점 점수를 보니 2차 준비를 하러 서울에 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서울로 가기로 했다. 이미 점수는 최악이고 시험은 망했지만 서울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마음과 정신을 새로이 가다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로 2차 준비 스터디는 하지 않더라도 명분상 노량진에서 열린 2차 강의를 듣고, 남은 시간에 평소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나고 보고 싶던 연극과 뮤지컬, 문화생활을 즐기며 놀고 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한달살이가 시작되었다. 학원에서 준비해준 2차 준비 면접 강의와 수업 실연 강의만 듣는 것도 생각보다 빡빡했다. 떨어질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지만 그래도 비용을 지불했기에 꾸역꾸역 강의를 들었다. 면접 스터디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학원에서 매칭해 준 수업 실연 스터디만 할 뿐이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수험생들 틈에서 최대한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같이 스터디하는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으며 열심히 하는 척을 했다. 강의 듣는 시간과 월, 수, 금 한 번에 몰아서 하는 수업 실연 스터디를 제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가벼운 척을 하며 서울을 누렸다. 보고 싶던 뮤지컬도 보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만나고, 전시도 보러 다녔다. 가보지 못했던 핫한 동네들을 다녔고, 평소 집에서 잘 하지도 않던 요리를 해서 할아버지와 저녁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불합격을 예상하면서도 이때까지 했던 공부와 시간에 대한 예의로 2차 준비를 대충 하며, 남은 어중간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나름의 생활을 했다. 논 것도 아니었고,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집에서 벗어나서 4주간 타지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로, 온전히 혼자가 되어 이런저런 생활을 누린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합격하지 못하고,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될지 한 치 앞은 알 수 없지만 그저 이렇게 한번 쉬어갈 수 있는 여유에 감사했다. 그리고 후에 이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1차 합격 이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