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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May 31. 2021

왜 육아와 가사는 경력란에 쓸 수 없는 걸까

사랑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부당하다

  나른하게 늘어진 밤, 카톡 알림이 자정의 고요를 흔들었다. ‘사랑하는 딸아.’로 비장하게 시작하는 장문의 메시지에 가슴이 철렁한다. 글의 전개는 불 보듯 뻔하다. 오늘 낮에 다녀가신 친정엄마가 아이에게 버럭 화를 내던 C 씨를 향해 쏟아 낼 잔소리가 많으실 게다. 전업주부 10년 차인 C 씨는 평생을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해 오신 엄마 밑에 자랐다. 엄마는 C 씨가 공부한 것을 다 써먹지 못해 안타깝다 하시면서도 아이들 돌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셨다. 자신이 자식에게 못 다준 사랑을 손주들이 제 엄마로부터 받는 것이 뿌듯하다고 하셨다. 그만큼 딸의 육아에 기대가 크다고 했다.      


 엄마의 문자 내용인 즉, 사랑하는 딸아. 예전에 먹고 사는 문제에 바빠서 어린 너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 네게 주었던 상처가 다시 아이들에게 대물림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너는 좋은 아빠이자 다정한 남편인 가장이 있고 시댁의 사랑을 받는 며느리다. 또한 너는 많이 배운 사람이다. 무엇보다 네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일은 없지 않느냐. 뭐가 문제기에 아이들에게 그렇게 날카롭게 구는 거니. 네가 아이들을 누구보다 정성으로 키우는 것 잘 알고 있다. 평소에 잘하면 뭐 하겠니. 네가 화를 내면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제발 부탁이니 그러지 말아라.


 두서없이 내달린 문장들 속에서 어지러운 엄마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C 씨도 가슴이 갑갑하게 죄어와 심호흡을 몰아쉬어야 했다.      


“이 마음이 뭘까요? 단지 엄마에게 죄스럽거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만으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그것들은 아주 일부에 불과했어요. 무언가 부당하고 불편한 덩어리가 명치끝에 걸린 느낌이랄까. 덕분에 그날 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C 씨의 존재를 온통 헤집어 놓은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친정엄마의 말속에서 ‘바깥일’을 하지 않는 C 씨는 육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문제 삼을 것 없는 일상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사랑과 헌신을 쏟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도 함께한다. C 씨의 억울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육아 중의 사랑과 돌봄에 대한 고됨은 한 치도 고려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 직장생활을 하지 않으면 노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관념. ‘많이 배워서’ 이론으로 무장하면 완전하게 실현되리라는 이상. 사랑과 헌신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의무라는 인식. 사랑과 돌봄에 대한 평가는 비단 C 씨 어머니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C 씨는 전업주부로 살다가 최근에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는 친구의 사례를 들었다. 친구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왜 육아와 가사는 경력란에 쓸 수 없는 거지? 몇 년간 놀고 있었던 게 아닌데. 이 공란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들은 씁쓸하게 웃고 말았지만 실은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되는 뼈아픈 현실을 마주한다. C 씨는 이 고귀한 무형의 노동이 노동으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낀다고 했다. 엄마와의 일화에서 전업주부와 돌봄에 대해 내면화된 개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면, 친구의 이야기는 사회구조적으로도 가사와 돌봄이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노동이란 뭘까. 가시화할 수 있는 생산의 결과에만 노동이라는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까. 사랑과 돌봄은 노동이 아닌가. 급여가 발생하지 않으니 노동이 될 수 없는가. 육아는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적인 의무에 지나지 않는가. 그 의무는 치우친 성별의 몫인가. 돌봄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가.       


 “전업주부의 방대한 업무 가운데서도 사랑과 돌봄은 아주 특별하지 않나요? 아이를 기관이나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애틋하게 여기는 만큼 행위를 복제해 낼 수 없으니까요.”    

 

돌봄을 양도하거나 시장을 통해 거래 할 수 있다. 그러나 C 씨의 말대로 돌봄을 보완할 수 있지만 전적으로 담당하게 할 수는 없다. 돌봄은 관계 형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보호자는 돌봄에 있어서 끊임없는 공부와 선택의 순간에 놓여있다.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행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에는 필연적으로 포기와 실패에 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책임도 따른다. 사랑을 쏟고 기다려주고 반응하며 기쁨과 충만함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좌절과 실망을 경험하는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더불어 도덕적인 헌신을 요하고 죄책감을 겪기도 한다. 사랑과 돌봄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식별할 수 있고, 결과를 의도하고, 복잡한 능력을 사용하고,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고, 도전과 스트레스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영역’에 있는 다른 노동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노동과 돌봄노동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부당하다. 이 부당하고 해묵은 관념과 그것을 반영하는 현실은 당사자들을 불행하게 한다. 그것은 나아가 돌봄 수혜자와 사회 전반에 불평등을 야기한다. 전업주부인 C 씨는 가만히 선언한다.      


“돌봄과 사랑이 노동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업주부로서의 경력이 자랑스러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시간이 이력서의 경력란과 자기소개서를 당당히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험이 사회의 적재적소에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다면적인 유능을 발휘하는 직업이 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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