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는 여성을 만났다. 미국에 살고 있는 시인이자 작가인 캐시 박 홍이 쓴 묵직한 에세이에서다. 한국의 독재 정치로부터 도망쳐 미국으로 떠난 그녀의 가족들. 그 안에서 삶의 여러 가지를 배웠던 그녀는 예술가가 되었다. 첫 번째 책 <딕테>을 쓰고 악마 같은 경비원에게 강간살해 당했다. 그녀의 삶이 처음 시작되었을 무렵 그녀의 어머니는 팔 개월 된 딸을 뱃속에 담고 피난길에 올랐다고 한다. 삶을 위협하는 것들에게 도망쳤던 어머니, 딸을 구하고자 더 안전하고 나은 곳으로 과감히 전진했던 어머니는 마지막에 정착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딸을 잃는다. 아무리 도망쳐도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기어이 반드시 기필코 삶을 꺾어버리는 운명.
전쟁 이후 피폐해진 팔레스타인은 하루에 몇십 명씩 굶어 죽는 극심한 기근에 쳐해 있다고 한다. 식량지원을 끓어버린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 음식이 남아돌아 버러지는 쓰레기통이 매일 수십만 개씩 가득 차는 시대에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는 인간의 악랄함이 끔찍해 고개를 돌리고 싶다가도 화면 앞에 얼굴을 찡그리고 잔인함 앞에 분노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가슴이 쓰리다.
청력이 약해져 보청기를 끼게 된 일이나 아토피가 심해 매일 아침 우수수 떨어진 아들의 각질을 청소기로 밀어내는 일이나 무릎 쪽에 생긴 작은 염증으로 전전긍긍하던 신랑이 이번엔 허리를 삐끗하고 왼쪽 다리가 절여 힘들다는 일이나 자매들의 사소한 신경전과 서운함 같은 일들은 진실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해. 그런 시답지 않은 걸로 스트레스를 받고 죽네 사네 하는 나의 한심함에 깊은숨을 뱉어낸다.
죽음 이후 어머니의 꿈속에 나타나 자신이 죽어갔던 곳의 위치를 알려준 '차'라는 여인. 엄마에게 보여준 건 710이라는 숫자였다고 한다. 늘 영적이었던 딸이었기에 가능했던가? 간간히 예지몽과 비슷한 꿈을 꿨던 어머니의 신기였을까? 때때로 남편과 나는 동시에 같은 노래를 부르곤 한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지 않고 웅얼거리고 있던 문장을 먼저 말해버리는 남편에게 '나도 방금 그 말하려고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고 했었지. 그렇게 너무 깊이 아는 사이는 이상한 전류가 통하는 듯 삶의 순간들이 서로에게 완벽하게 공유되기도 한다. '차'와 어머니는 그렇게 연결된 존재였으리라.
'차'라는 여성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그녀의 죽음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딕테>, 그것을 교과서로 배운 캐시 박 홍.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쓴 <마이너 필링스>, 그녀의 책을 읽고 감탄한 전직 아나운서 김소영 작가의 책 <무뎌진 감정이 말을 걸어올 때>을 읽은 나. 드디어 내 품 안으로 온 <마이너 필링스>, 그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차'라는 여인. 수많은 우연과 필연과 그리고 선택들이 쌓인 삶이 여기까지 이어지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우리의 만남.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오래도록 나는 이 여인을 잊지 못할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책 <딕테>도 읽어볼 테고, 그녀의 이미지를 검색해서 얼굴도 찾아보겠지. 영감이 강했던 그녀는 지금 다른 어느 곳에서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이곳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면서. 그녀의 삶이 어디선가는 계속되고 있길 바라면서. 그 잔인하고 암울했던 삶이 '차'라는 여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삶은 아니길 바라면서. 누군가의 오래된 죽음에 명복을 빌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