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사람도 시를 씁니다.
이번 주에 작심하고 읽으려 했던 책은 대문호 톨스토이의 <인생에 대하여>였다. 매일은 언제나 처음이라 어려운 인생. 이 녀석이 뭔지 명확한 답을 내려주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구매했던 책이다. 이 책을 심도 있게 파고들어 톨스토이가 알려주는 지혜로운 인생길을 찾아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참이다. 한 손에 밑줄쫙을 해줄 연필을 들고 주요 부분에 붙여둘 인덱스 테이프를 옆에 둔 체. 처음 물레방아가 생계의 유일한 수단인 한 남자 이야기는 그런대로 이해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 나는 나를 구성하는 세포 전체의 모습, 즉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 나를 의식할 때만 내가 살아 있음을 인정한다"라는 문장들이 시작되고 이후로 이해의 폭은 점점 줄어들었다. 패배자가 되길 기다리던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 '그래 우선 이 책으로 마음을 좀 달래주고 다시 톨스토이에게 돌아오자' 그렇게 읽기 시작한 다정한 책은 기대이상의 깊이로 나를 끌고 갔다.
<마음 사전>, <어금니 깨물기>, <시옷의 세계>로 만났던 김소연 작가의 글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작가의 새로운 책을 펼치기 앞서 내가 느꼈던 설렘은 전작들이 주었던 기쁨과 즐거움 때문이었으리라. 아껴가면서 읽어야지 했는데 웬걸 둘째 아이가 검사받았던 성모병원 로비에서 거의 다 읽어버렸다. 조금씩 먹기엔 너무 맛있는 음식처럼 작가의 글이 좋았다. 사실 특별히 웃긴 내용도 특별히 심도 깊은 문장도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의 글이라 그런지 그냥 모든 글이 좋았다. 시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그녀가 이 책에서 쓴 시들이 좋았다.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이렇게 이유 없이 마냥 좋아지는 게 맞나 보다.
사실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가장 좋았던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의 질감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마치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듯한 뻣뻣한 질감. 첫 독자가 되었다는 약간의 환호가 찾아왔던 거다. '내가 일빠다'라는 기분. 눈 내리는 새벽 아무도 걷지 않은 새하얀 눈길을 걷는 마음.
걷기 사람의 마음은 이토록 닮았는가?
" 걷는 일을 가장 잘할 수밖에 없는 때는 마음이 괴로운 경우다. 마음의 응어리들이, 괴로움들이, 번잡한 걱정들이, 끝없이 불길하게 이어지는 번뇌들이,
먼 데로부터 차곡차곡 도착해 온
울분들이
온몸에 꽉 차 있을 때마다
나는 오래 걸었다."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마음의 울분들이 꽉 차 있을 때 걷는다. 걸으면 특히 오래도록 걸으면 나는 건강해졌다. 마음은 힘을 얻었고 몸은 용감해졌다. 이후로 자연스럽게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걷기를 택했다. 걷기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돈을 만들어주지도 못했지만, 이상하게 나는 치유가 되곤 했다. 두 다리가 튼튼해 오래도록 걸을 수 있다면, 건강만큼은 자신할 수 있으리라.
시를 잘 모르기에 시인의 마음도 잘 모른다.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지지 않는 사람들이 시인인가? 했다가 삶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시인인가?라고 반문해 보는데 김소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 사람으로서 시인은 시를 쓰지 않는다. 사람보다 좀 더 다른 무엇이 되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좀 더 다른 그 무엇은 우리가 끔찍해하는 모습일 수도 있고 우리가 얕잡아보는 형태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가 선망하는 얼굴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얼굴을 시인은 시를 쓰며 계속 계속 좇는다. 그 얼굴을 지나칠 때까지. 지나쳐서 또 다른 얼굴을 만날 때까지."
나는 그렇구나 한다. 그렇겠구나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시를 쓰기 어렵겠구나 한다. 소연작가는 어찌 보면 명랑하고 재밌는 사람 같은데 어려운 시를 썼다. 무거운 문장들도 많았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바로 여기 위 문장에 답이 있었다.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 멋져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무엇이 돼야 한다면 거기엔 반드시 어떤 고통이 따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에겐 시가 늘 어려운 가보다. 고통은 피하고 싶고 삶은 단순해지길 원하니까. 내 속에도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곤 하지만, 나는 겁에 질려 그것을 싹둑 잘라버린다. 그러니 글은 단순해지고 삶은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책을 읽는 중 침대에 누운 채로 실려가는 환자들이 지나갔다. 링거를 꽂은 몸으로 어디로 옮겨가는 건지. 둘째는 겁먹은 얼굴로 환자를 보곤 했다. 아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픈 것을 써낸 작가의 책을 읽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잘 몰랐던 사람에게 당신이 아픈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해주는 듯한 문장들.
탁구, 농구, 배드민턴, 사격, 러닝, 등산등을 시도하고 중단하는 시인의 웃픈 노력을 마주했을 땐, 그 깊은 문장들은 어디서 온 걸까? 란 질문이 이어졌다. 자기와의 끝없는 대화. 자신과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처럼 보이는 소연 작가는 그 대화의 오고 감이 깊어지고 깊어져 마침내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됐나 보다.
나와의 깊은 대화가 간절한 사람이 여기 또 있다. 언제쯤 나는 첫마디를 할 것인가?
우리의 대화는 언제 어떻게 시작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