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권리 / 김연수

다른 내가 된다면, 삶은 달라질까?

by 쓰는 사람 효주

여행이 참 쉬운 사람들을 만난다. 떠나고 싶을 땐 언제든 떠날 수 있거나, 떠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문제없이 실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매번 어려운 내 삶이 정상이 아닌 듯싶다. 나에게 부족한 건 시간일까? 돈일까? 용기일까? 오래전엔 돈이었던 게 분명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 조금 더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면 문제는 시간이었다. 한 달에 한 번도 쉬기 힘들었던 우유대리점 운영과 쌓여 있는 집안일과 엄마가 늘 필요했던 어린 두 아들, 거기에 주말이면 어김없이 들려야 했던 시댁까지. 여행은 언제나 뒷전이었고 가뭄에 콩 나듯 떠나는 짧은 휴가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짐을 싸야 했으니,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온 적은 평생 한 번도 없다.


해서,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여행이란 고작 여행을 주제로 쓴 책을 읽는 게 전부다. 언제쯤 여행에 써도 되는 돈과 시간과 용기가 생길지 의문을 품은 채 독서는 계속되었고 오십이 넘도록 여행은 꿈속에만 머물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마음을 위로하고자 김연수 작가님의 여행기를 골랐는데 웬걸 이 책은 여행서이기보다는 사람냄새가 깊게 나는 인물 탐독 에세이었다. 평소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이라 지루할 틈은 없었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각 챕터마다 등장하는 인물은 소설 속 주인공만큼이나 사연이 깊었다. 2021년엔 설렁설렁 읽었지만 5년 만인 지금은 문장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며 읽었다.


오 년 동안 조금 더 상세하게 그려진 독서지도 덕분에, 책에서 작가님이 소개한 '차학경'과 일본의 서점가인 '진보초'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왔다. 이제 나도 누군가가 '차학경'을 이야기하고, 일본의 '진보초'를 들먹일 때 아는 체할 수 있게 된 거다. 어떤 단어들은 이렇게 여러 권의 책에 쓰이는 행운을 누린다. 덕분에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해지는 단어들이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은 불라디보스또그의 '이춘대'씨다. 갈비를 먹다 이가 뿌리째 빠져도, 스물네 시간 기차를 타야 한데도, 다섯 시간 넘게 달리고 달렸지만 놓쳐버린 버스표에도 " 일 없어요"란 말로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은 안심일 것 같지만, 결국 "일어났어요"로 끝나는 여행일 수 있다는 불안감을 항시 품어야 했다. 부카레스트가 고향인 작가 '세자르'는 독일에서 만났다. 거리에서 젊은 남녀가 사랑한 나누는 자유를 억압하는 한국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며 열을 올렸던 쎄자르. 그에게 자신의 책이 사만 부나 팔렸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작가님은 미안하다는 말을 이 책에 남겨두었다. 좋아했던 여자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천 개의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푸르미와 마리화나나 마약을 취미처럼 즐기는 타이스께와 그의 할머니(마약도 자기 주도권만 놓지 않으면 취향이나 취미가 될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 인물들), 한국의 보이그룹 동방신기를 좋아했던 려화라는 소녀까지, 그들의 이야기와 대화는 한 편의 단편소설 같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작가의 여행기에 잠시 등장한 엑스트라였지만, 그들 모두가 주인공인 자기 인생을 살았을 테고 지금도 그러겠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의 지금이 궁금하다. 아직도 '일 없어요'란 말을 달고 살 이춘대의 씨의 남은 삶을 알고 싶고, 푸르미는 또 어떤 사랑을 했을지 엿보고 싶은 마음은 그리움으로 남는다.


여행은 누군가의 삶의 풍경이 되어주는 일이다. 때때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들은 나를 모를뿐더러 본다한 들 그때의 나는 가려진 나, 보이는 나, 내가 모르는 나일테다. 작가님 역시 여행 중 그런 것들을 깨달았겠지. 이곳에 사적인 내 여행담을 덧붙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더 근사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어느 곳에 머물고 있으니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국경을 넘어 다른 세상 혹은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이상'의 마지막이 궁금했던 작가님은 일본을 찾는다. 이상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간 진보초의 허름한 집을 찾지만 집은 사라지고 '구단 아래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이라 했던 김기림의 문장과 ' 진보초 뒷골목, 햇살이 들지 않은 좁은 이층 방'이라 했던 김소운의 표현만이 남았다. 작가는 이 두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이상'의 마음에 닿고 싶었던 간절함. 그가 끝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때 그의 마음까지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작가의 끈질긴 사유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글과 문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사색이 가득한 추리소설을 읽는 마음으로 글을 따라갔지만, 내가 이상의 마음이나 작가의 깊은 생각에 가 닿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다만 경계를 넘어서는 문학의 길을 꿈꿨던 두 작가의 발자국만을 봤을 뿐이다. 그리고 전에 읽어둔 <아주 오래된 서점>의 진보초 거리에 가득하다는 헌책방 사진을 이곳에서 발견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다른 이가 되는 꿈의 시간이 여행이라면, 역시 태어난 김에 꼭 한 번은 그런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다. 끝내 허락되지 않은 상황이 내 인생을 가둬둔다고 해도 그것을 뿌리칠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 모두가 나에게 달려있을 테다. 시간과 돈과 용기를 가져다줄 수 있는 건 오직 나일뿐. 생각해 보면 어느 시절 어느 순간 그것을 줄 건지 결정할 일만 남아 있는 것 같다.

" 공항은 마치 인생을 바꾸는 공간처럼 느껴진다. <중략> 우리는 질문하고, 그리고 질문의 해답을 찾아 여행할 수 있을 뿐이다. 공항에서 우회는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무례한 타지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덧없이 반복되는 존재일 뿐이다."

인생을 바꾸는 공항을 찾아 무례한 타지사람이 되고 반복되는 어떤 존재가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여행의 전부라 해도 나는 감사하며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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