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천장의 흐릿한 얼굴이 보였다. 비가 샌 자국인가 보다. 그런데 문득 그 얼룩이 미치도록 정겨웠다. 지저분한 얼룩마저도 정답고 아름다운 이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세상을 결국 이렇게 떠나야 하는구나.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 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나는 완강하게 버텼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장영희>
십 수년 전 읽었던 책이다. 어떤 책의 어떤 문장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조각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 빛이 바래지긴 해도 여전히 기억되기도 한다. 이 문장이 그렇다. 삶이 곧 끝나가고 있는 사람은 빗물 때문에 생긴 찬장의 지저분한 얼룩마저 아름답고 정겨운 세상의 풍경이 될 수 있었다. 머리를 치고 가는 문장 때문에 나는 한동안 멈춰있었을 거다. 그리고 병실에 누워 얼룩진 천장을 바라볼 필자를 떠올렸다. 그토록 사소한 풍경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필자. 아름답고 정다운 세상과 곧 이별해야 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 그 애틋하고 아련한 마음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째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시간과 닮았다고 여겼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왜 필자의 이 문장을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데리고 왔다. 이유는 <문학의 이해> 과목의 중간과제물 때문이었지만, 나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사람처럼 책을 뒤적거렸다. 영원히 잊지 못할 문장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동에 겨워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떠올리곤 했었지. 누구에게든 읽었던 내용을 진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전해주곤 했었지. 잊지 못할 명장면을 본 것처럼. 삶의 비밀을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열심히 이 문장을 계속 곱씹었다. 내 것인 것처럼. 그리고 언젠가 어느 날 필자와 같은 모습으로 병실에 누워 얼룩진 천장의 무늬를 찾고 있을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더 노력한 것은 다른 것에 있다.
세상을 자세히 보려는 노력. 헛되이 보지 않고 진짜를 보는 노력을 해 봤던 거다. 꽃과 나무와 하늘과 구름 같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길가에 핀 작은 풀들이나 한 두 송이 어렵게 꽃을 피운 들꽃 같은 것들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했다. 어떤 사람의 얼굴에 감춰진 아름다움을 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누구나 예쁜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아름답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러니 세상이 전보다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 마음은 때때로 상처 때문에 아픔 때문에 지겨움과 나태함때문에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문장은 잊히고 오직 버거운 삶만 남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은 되돌이표처럼 다시 돌아온다. 잊혔던 감정을 되살리거나 기억나지 않았던 그리움 같은 걸 데리고 온다. 마치 오래전 즐겨 들었던 음악을 틀어주듯이.
문장을 발견하고 나는 이곳으로 옮겨다 놓았다. 또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본다. 필자가 그리도 머물고 싶었던 세상에 나는 아직 있다. 정겨운 빗물자국뿐만 아니라 식탁 위에 떨어져 있던 김칫국물과 김가루도 여전히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언제든 연락이 가능하며, 어제는 그 사람과 아름다운 수목원을 거닐며 쉴 틈 없이 걷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누군가는 특별한 이유 없이 잘못 없이 이런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다. 그러나 누군가는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오늘을 내일을 허비하고 만다. 나는 어느 쪽에 더 많이 서 있었을까? 같은 문장을 다시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테다. 잊지 말라고,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보라고. 기억하고 기록하며. 아름답고 소중한 일상을 천장의 빗물 자국처럼 여겨보라고.
해서, 오늘 다시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품어 보려고 했다. 내게 주어진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겨보려고 했다.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 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내가 가진 것들과 누리고 있는 것들이 결코 부족하지도 작지도 않았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