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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이 있는 일상 Oct 04. 2024

소설가의 에세이가 주는 설렘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는 중이다. 어떤 글들은 글쓰기를 욕심내게 만든다. ' 아 나도 이렇게 좀 써봤으면, 뭐 이렇게나 구체적으로 잘쓸 필요가 있었던 야'라는 마음의 소리가 요동친다. 습작노트를 꺼내 들고 적기 시작한다. 촌스럽고 못난 문장들이 손끝에서 흘러나와 빈 노트를 채운다. 한 페이지 잔뜩 써 놓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사라져 있다. 다시 읽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인데 마치 영감이 떠오른 작가가 일휘지필 하듯이 멈춤 없이 한 호흡에 써 내려간 글에 혼자만의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어떤 글이 마음에 쌓여있던 걸 글로 토해냈기에 느끼는 작은 희열이 아닐까 싶다.


퇴근길 하늘 무참히도 맑고 명랑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차 한잔을 내리고 식탁 위에 쌓여있는 책 한 권을 들 테다. 그리고 사방이 고요한 집안에 서글피 울리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게 해야지란  소박한 결심을 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엔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벗고 나간 옷이 보였다.(치우고 가라는 천 번의 외침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진다.) 버티컬이 화분 꼭대기 바로 위까지 내려와 빛을 가렸고 창문은 꽁꽁 닫혀 있었다.  곧바로 버티컬 걷어  빛 받아들이고 양쪽 창문을 모두 열 숨통을 연결시켰다. 부엌에 들어서니 정리되지 않은 그릇과 빨랫감이 산더미다. 그렇지만 비실비실해진 초록이들에게 먼저 물을 주기로 했다. 커다란 계량용 컵에 물을 듬뿍 담아 일일이 신경 써서 물을 넣었다. 무관심했던 주인의 손길에 놀란 듯한 초록이들에게 특별히 대화를 건네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 쓱 쓰다듬어줄 뿐, 뒤돌아서 지저분한 옷가지를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밀었다. 이방 저방 틈틈이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과 먼지들이  빙글빙글 도는 통속으로 들어다. 꼼꼼하게 돌고 또 돌아 놓치는 부분 없이 쓸어냈더니 어둡던 마음에 빛이 들어온 것처럼 개운해진다. 그렇지만  선풍기가 문제였다.  창고에 집어넣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호막을 걷어내고 날개 중심의 나사를 풀어 해제한 후 욕실로 가져가 먼지들을 닦아 냈다. 솔이 곳곳의 작은 먼지들까지 제거해 줬다. 뒤편에 뭍은 먼지는 키친타월에 물을 묻혀 닦아냈다. 나름 꼼꼼히 그러나 실제로는 대충. 그리고 다시 조립. 올여름도 수고 많았던 선풍기는 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해치워야 할 일은 설거지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일단 멈추자. 커피물을 올리자.


 말없이 커피를 내렸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2시가 넘었고, 좀 있음 놀러 갔던 둘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30분의 여유. 커피는 쓰고 향 좋았다. 김애란의 천 산문집 <잊기 쉬운 이름>을 펼쳤다. 에세에 있기엔 낯선 문장들. 소설인가 에세이인가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그녀의 몽환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글에 금방 흡수되고 말았다. '아 진짜 이건 너무 잘 썼잖아!' 부러움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고 페이지는 계속 넘겨다. 그리고 돌아온 둘째. 게임에서 다 이겼다며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나는 즐거운 독서를 멈춰야 해서 좀 아쉽다. 게다가 김애란을 따라 나 역시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쓰고 있었단 말이다. 아들아. 자 이제  영어단어를 외워야 할 시간이구나. private를 삼일째 읽지 못하는 아들. 그래 이 단어가 쉽진 않지. 그럼 어떻게 이걸 니 머릿속에 각인시켜줘야 할까? 엄마는 방법을 모르니 계속 반복 반복 시킬 뿐. 간간히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다가 공부 끝난 후 엄마 운동 갔다 올 테니 넌 그때 좀 쉬고 있어라는 말 한마디에 천사 같은 아들로 돌변한다.


김애란과의 만남은 거기서 끝이 났고, 다시 만나기까지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내내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가 말해준 부모님의 연애담이라던가, 함께 헌책방을 돌던 나이 많은 동기라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맴돌았고.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어떤 추억이 더 있는데? 란 질문들이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사람을 더 알고 싶은 마음, 처음 알게 된 설렘, 왠지 친해진 기분 같은 것들이 독서의 즐거움을 가중시킨다. 아직 다 읽지 않아 또 만나게 될 김애란을 기대하면서,  하루종일 혼자 설렌다. 내 독서는 이렇게 흐르는 중이다.


활자 속에 깃든 잔인함과 어쩔 수 없는 아늑함에도 불구하고 '말' 안에는 늘 이상한 우스움이 서려 있다. 멋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다 휘청거리는 언어의 불완전함 같은 것이, 언어는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 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99페이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문장이다. 활자, 깃든, 불구하고, 우스움, 휘청거리는, 종종, 불완전해지기로, 보인다. 등 문장을 해부해 보면, 전혀 낯설지 않은 낱말들인데 어째서 이것들이 만들어낸  문장은 새로워지는 것일까? 김애란은 분명 여기에 어떤 마술을 부렸을 테다. 그 마술에 놀랐고, 이건 그녀의 문장이야. 그녀의 것이구나 했다. 그리고 어째서 나의 문장은 그런 것이 없을까를 궁금해한다. 부모님의 연애시절도 모르고, 책방을 함께 걸었던 동기도 없었던 게 원인일까? 우리 둘 사이의 놓인 우주적인 거리가 궁금하다. 그리고 그 먼 거리에 닿고 싶다는 간절함. 조금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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