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덕질

by 소피아미

나는 어릴 때부터 노래 듣기를 너무 좋아했다. 엄마가 새벽부터 틀어 놓은 라디오를 듣고 살아서인지, 타고난 흥이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노래뿐만 아니라 연예계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나는 이것이 다 엄마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집에는 늘 ‘선데이서울’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유명한 성인 잡지였다. 내 기억에 그 잡지를 어른들이 계실 때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엄마는 내가 그 잡지 보는 것을 알았을 것 같은데 한 번도 제지를 받은 적은 없다. 아무튼 그 잡지에는 수많은 유용한 정보가 가득했다. 그 잡지가 내 조숙함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잡지 ‘TV가이드’가 있었다. 그 잡지는 연예계 전반에 관한 잡다한 소식이 들어있는 1주일에 한 번 나오는 어른 손바닥 크기의 잡지였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나에게 누르면 나온다 했다. 나는 연예계 소식은 빠삭했다. 가수, 배우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집중을 공부에 좀 더 쏟았다면, 지금은 다른 모습의 내가 되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뭘 했어도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조숙했다. 어느 날 TV에 가수 혜은이님이 나왔다. 너무 예쁘고 작고 소중한 느낌이 나는 눈웃음의 소유자였다. (한 번씩 혜은이님의 그 시절 모습을 유튜브로 찾아본다. 요즘 가수들과는 다른 느낌의 개성과 멋짐이 있다). 그 이쁜 가수가 혼자 바닷가를 거닐며 ‘영원히 당신만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가 너무 애절하면서 멋있었다. 나는 식구들과 함께 보다가 자연스럽게 슬쩍 일어나서는 다른 방으로 갔다. 후다닥 연필을 꺼내서 기억나는 대로 그 노래의 가사를 적어 내려갔다. ‘둘이서 달리던 백사장 모래에 새겨진 그 언약.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영원히 당신만을 영원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열 살 남짓 어린아이가 뭘 안다고 그 가사를 그렇게나 눈에 불을 켜고 적어놓으려 했을까. 나중에 따라 부르려고 그랬지 싶다. 아마도 그 순간이 내 덕질라이프의 시작인 듯하다.

사실 내 진성 덕질의 시작은 중학생 때 조용필님이다. 처음 조용필님을 알게 된 것은 그의 노래 ‘못 찾겠다 꾀꼬리’ 때다. 그때는 저런 아저씨가 있는가 보다 했는데 중학교부터는 용필이 오빠가 되었다. 히트곡이 많기도 했겠지만 용필이 오빠가 미디어 노출이 가장 많았을 때다. 많이 보면 정들게 마련이지 않은가. 나는 가수도 배우도 잘생긴 사람을 선호한다. 나는 생긴 것을 가지고 말이 참 많은 사람이다. 안 좋은 버릇이라는 것 아는데 안 고쳐진다. 우리 오빠야는 그리 잘생긴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무 상관 없었다. 귀여운 오빠였으니까. 울 오빠가 ‘아직은 사랑을 몰라, 몰라. 그래도 우리는 좋아 좋아. 알 수 없는 너의 고백이 내 가슴을 뛰게 하지만 그런 것은 너무 어려워 싫어 싫어’를 부르며 살짝살짝 흔들고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난생처음 그 때 오빠의 카세트테잎을 샀다. 이런저런 기사를 찾아보니 우리 세대가 처음으로 부모님께 용돈 받는 세대라고 한다. 나 쓰기도 모자란 용돈을 근근이 모아 샀다. 나는 온 식구가 잠든 시간에 조용히 일어나 영어 듣기 하라고 사주신 헤드셋을 썼다. 눈을 감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빠의 노래는 아, 정말 내 몸이 두둥실 떠올라 그 음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오빠의 목소리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그것이 황홀경이리라.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나의 행동과 표정에서 부모님들이 나의 상태를 파악하셨나 보다. 아주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식구들과 함께 TV를 보다 용필이 오빠가 나오면 아버지는 인정사정없이 바로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리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미쳐버리는 것 같았다. 예전 부모님들은 상당히 엄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더. 나는 표를 내지는 못하고 속상함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요즘은 수많은 매체가 있어서 얼마든지 나중에 또 보고 또 보고가 되지만 그때는 그 순간을 놓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참으로 애가 끓고 안달이 나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안 그런 척하느라 엄청 힘들었다. 거기서 그런 티를 냈다가는 아버지한테 불호령 맞을 일이었다. 그런 만행(?)을 겪으면서도 행복한 덕질은 계속됐다. 그렇게 오빠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중 드디어 오빠를 직접 알현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중3 여름 방학 어느 날 내가 다닌 학교 바로 앞 체육관에서 오빠가 녹화방송을 했다. 자습을 핑계로 한 번씩 학교에 갔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녹화방송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 그날은 비가 왔는데 티켓이 있는 친구에게 내 우산을 빌려주었다. 그것이 신의 한 수가 될 줄이야. 나중에 비도 그치고 녹화 시간이 다 되어가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있나, 혹시라도 어찌어찌 끼어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입구에 가보았다. 경찰 아저씨들이 관객 대부분이 여중생인 무리를 곤봉으로 막 때리면서 정리한다고 난리였다. 내가 들어갈 틈은 전혀 없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자습이 될 리가 있겠는가. 원래도 잘 안 하는 자습인데. 시간이 흐르고 녹화방송이 끝났을 텐데도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우산을 챙겨가야 했다. 잃어버리고 가면 엄마한테 혼구녕이 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눈물의 그곳으로 다시 갔다. 아까는 그 난리였던 곳이 조용했다. 나는 경비 아저씨께 방송 끝났냐고 여쭈어보았다. 아 근데 아저씨 말씀이 아직 안 끝났으니 들어가 보라는 것이었다. 아니 이것이 무슨 일? 아까까지 금단의 구역이었던 그곳으로 튀어 들어갔다.


오빠는 그곳에서 마지막 피날레 노래를 열창하고 있었다. 녹화장은 체육관 반을 잘라서 한쪽은 관객을, 남은 반쪽은 무대를 만들고 그 뒤쪽은 칸막이로 가려놓았다. 그때 내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내 잔머리의 위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모든 곳을 빠르게 스캔하고 무대가 끝나면 오빠는 저 뒤쪽으로 들어갈 것이 확실했다. 나도 그 뒤쪽으로 가야만 했다. 살펴보니 무대 오른쪽에 사은품이 잔뜩 쌓여있은 곳이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곳에 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분이 오셨던 것 같았다. 사은품 정리를 하는 아저씨께 뒤쪽으로 가도 되냐고 물어보니 바쁜데 귀찮게 하네, 하는 표정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오빠의 안전이 이렇게 허술할 수가 있나, 는 지금의 생각이고 나는 부리나케 칸막이 뒤쪽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오빠가 노래를 끝내고 칸막이 뒤쪽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오빠를 따라갔다. 오빠는 어느 사무실로 들어가셨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다시 없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 오빠를 독대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옆에 다른 관계자들이 있었으나 그 순간 그 공간은 오빠와 나만 존재했다. 겉멋이 잔뜩 들어 있던 나는 “사인이라는 것 좀 해주세요” 했다. 오빠는 “사인이 뭔데?” 했다. 아웅,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그 사인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황홀한 꽃길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우산을 못 가져온 이유를 말하고 사인을 보여드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불꽃 자랑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의 생명과도 같은 오빠의 사인은 쫙쫙 찢어져서 쓰레기통에 들어 있었다. 부모님은 내 영혼을 뺏어가는 오빠와의 교감의 상징, 사인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던 것이다. Oh, my God.!!! 그날 나는 억장이 무너짐을 경험했다.

얼마 전에 오빠의 야외콘서트를 다녀왔다. 8월 중순이었는데 심한 바람이 불었다. 노래하는 오빠가 연신 콧물을 닦으셨다. 나이가 들면 바람에도 눈물 콧물이 흐른다. 얼마나 마음이 짠하던지.


이제 오빠도 늙고 나도 중년이다. 그렇다고 슬프지는 않다. 오빠는 아직도 현역이다. 어느 아줌마의 소녀 시절을 함께해 준 오빠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오빠,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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