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엄마가 되기까지

by 소피아미

나는 아들 셋을 낳은 엄마다. 그 시작은 1991년 2월, 나는 이십대 중반에 처음으로 엄마가 되었다. 그때는 딸보다 아들 낳는 것이 뭔가 뿌듯하고 당당하고 편안하고 그랬다. 지금의 청춘들이 이런 소리를 듣는다면 ‘조선시대야, 뭐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때는 그러했다. 2년 후 둘째를 또 3년 후 셋째를 낳았다. 그 시절은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준비 또는 각오 이런 거 없었다. 결혼하면 다음 순서는 당연히 출산이었다.

첫아들 낳고 흐뭇해하는 나에 비하면 남편의 표정은 나의 그것과 달랐다. 갓난아기를 쳐다보는 눈길이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한마디. “낳았으니까 내 애인가 보다 하는 거지 그리 이쁘거나 그런 줄은 모르겠어.” 나는 속상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 남편에게 물어보니 키워내야 하는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고. 그것이 뭔지 지금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나는 수술로 아기를 낳아서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퇴원하고 친정에서 한 달 있다가 집으로 갔다. 아기를 낳기 전에 엄마로서 나의 세상은 예쁜 아이의 눈을 맞추며 우아한 어머니의 일상을 상상했더랬다. 상상은 상상일 뿐, 첫날부터 전쟁터가 되었다. 나는 아이 셋 다 요즘 말로 독박육아를 했다. 그때는 독박육아라는 말도 없었고, 사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남편 공격용 단어로 보이기에). 어쨌든 남자는 돈 여자는 살림과 육아가 철저히 나뉘어 있었다. 친정엄마가 가끔 돌봐 주시긴 했으나 첫애는 정말 힘들었다. 지나고 보니 산후우울증이었나보다 싶다. 가슴이 답답하고 "이 일이 언제 끝나나, 끝나기는 할까" 라고 느낄 시간도 없었다. 낮에는 젖먹이고 기저귀 빨고 널고 개고의 무한반복. 밤에는 한 시간 자고 깨서 젖 물리고 두 시간 자고 깨서 젖 물리고의 무한반복.

그 와중에 나는 심한 젖몸살을 앓았다. 왼쪽 가슴이 아팠다. 전에 어느 개그맨이 유행시킨 말이 있다. ‘안 겪어 봤으믄 말을 하지 말어.’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한, 두 시간마다 젖을 먹여야 했다. 애도 울거니와 젖을 안 먹이면 젖이 불어서 더 아프고 몸이 뻐개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젖몸살이 난 가슴에서는 찐한 녹색 모유가 나왔다. 아기에게 먹여도 될까 걱정하니 엄마는 상관없다 하셨다. 모유 색깔이 푸르딩딩하니 하도 생경해서 엄마가 안 계셨으면 못 먹였을 것이다. 밤에 젖을 물리고 아이를 내려놓으면서 내리 3시간만 올곧게 자고 싶다는 바램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잠시 눈을 붙이면 금새 아이가 빼액, 하고 운다. 정말이지 온 우주의 힘을 끌어다 천근만근의 몸을 일으키고 다시 젖을 물렸다. 그때 친정엄마는 젖병을 못 사게 하셨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분명 너무 힘들어서 분유를 먹이려 했을 것이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 했던가. 그렇게 힘들었음은 잊어버리고 자식이 둘은 있어야지, 라며 둘째를 낳았다. 한 번 해봤다고 수월했다. 첫애 때는 겨를이 없어 알 수 없었던 진짜로 품에 안을 줄 알게 되었다. 아, 아이가 이렇게 이쁜 거구나, 했다. 걱정했던 젖몸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수월하다 싶었는데 또 그놈의 수유에 문제가 생겼다. 아기가 두 달쯤 되었을 때 모유 수유 도중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진짜로 내 젖꼭지의 반이 찢어져 너덜너덜 떨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왼쪽이었다. 얼마나 아픈지 또 ‘겪어보지 않았으믄 말을 하지말어’가 절로 나왔다. 너무 아파서 오른쪽으로만 수유를 했다. 그랬더니 왼쪽 가슴 젖이 불어서 또 젖몸살이 날 판이었다. 손으로 짜내어도 아이에게 수유하는 것과 같은 효과는 전혀 없다. 하는 수 없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간신히 붙으려 하던 젖꼭지가 다시 떨어지며 으악,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내 머리를 찌른다. 가슴이 아픈데 머리끝이 송곳으로 찔리는 느낌은 왜일까. 재밌는 것은 그와 동시에 불어있던 모유가 빠져나가면서 얼마나 시원한지 모른다. 정말 여자는 복잡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때 나는 여실히 깨달았다. 나는 여자들이 이런 것을 겪으며 사느라 남자보다 좀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심성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어쨌든 나의 출산은 이렇게 둘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세상일은 진짜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한순간의 격정을 이기지 못한 결과로 계획에 없던 셋째를 낳았다. 셋째는 거의 거저 키웠다. 위에 형아 둘이서 반은 키웠다. 자기들끼리 노니 위의 아이들만큼 힘들지 않았다. 셋째는 정말 정말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웃으면 이쁘고 울어도 이뻤다. 우는 것을 보고 싶어 자는 아이를 일부러 깨워 울리기도 했다. 큰애는 울까 깰까 벌벌 떨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옛날 어르신들은 그리 많이 키웠을까 했는데 내 경험상 키울 수 있다는 결론이다. 또한 키울 때는 힘겨웠지만 장성한 아이들을 보는 기쁨은 이루말 할 수 없이 뿌듯하다.

얼마 전 ‘인생의 역사’라는 시화집을 읽었다. 내용 중에 작가는 태어난 자신의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그리고 작가는 아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살아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가 다치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주문을 외우듯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지키는 것이 결국 아이를 지키는 일이며, 부모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에게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너무너무 동의한다. 나는 그 작가의 책을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글은 최소한의 감정으로 차분히 나를 설득한다. 그런데 위의 글만큼은 모든 감정을 끌어모아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자동으로 그리되었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그렇게 만든다. 특히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더하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너무 힘이 들어가면 일이 다른 방향으로 가기 쉽다. 약간의 느슨함이 자식을 키울 때도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사는 동네에 좋은 지인의 시어머님 말씀이 떠오른다. ‘화초든 자식이든 약간의 무관심이 더 잘 자라게 하느니라.’


이제 나의 아이들은 내가 그들을 낳았을 때보다 더 나이가 들었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이 나를 사용한 지 오래다. 얼마 전에는 내가 크게 아파서 아이들에게 가해자(?)가 될 뻔하기도 했다. 혹 내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 아이들의 삶에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큰 지장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이제사 진짜 엄마가 되었나 보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 잡고 보니, 재수 없으면 120살까지 산다는데 너무 일찍 이런 얘기를 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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