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존철학자 Sep 24. 2022

명품의 탄생

샤넬

아이콘의 탄생      


  루이비통과 에르메스, 샤넬은 세계 3대 명품으로 꼽힌다. 루이비통과 에르메스가 1800년대 장인의 손에서 태어나 그 후손들이 브랜드를 키워낸 것과 달리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라는 아이코닉한 존재가 모델이자 크레이티브 디렉터, 마케팅 총책임자로 일당백의 역할을 하며 오롯이 창업자 한 명의 역동적인 에너지로 명품의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샤넬은 1913년 설립되어 두 브랜드에 비해 역사가 비교적 짧다고 볼 수 있다. 역사 속 인물을 살펴보면 그런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모든 것을 고루하게 여기며 무한한 결핍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그 쾌감에 중독된 사람. 바로 샤넬이 그런 사람이었다.                     

 

 1883년 프랑스 소뮈르(Saumur)의 가난한 집안에서 가브리에 샤넬은 태어나게 되었다. ‘태어나게 되었다.’라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는 것이 그녀의 부모는 하루에 먹을 양식조차 제 때 구하지 못하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 샤넬의 존재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소녀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아버지 그녀를 양식을 축내는 짐으로 보는 듯했다. 아마 그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샤넬은 날 좀 봐달라며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녀는 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사랑했고 야합했고 배신했고 또 놀라게 했다. 생을 관통하는 불안정은 곧 그녀의 예술 원동력이었다.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그녀의 아버지는 13살의 샤넬을 언니와 함께 오버진 수녀원(Abbey of Aubazine)에 맡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 오버진 수녀원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은 샤넬의 뇌리에 깊게 박혀 브랜드 미학의 원천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검은색과 하얀색이 대비된 모던한 디자인의 옷은 수녀복을 닮았고, 로고는 수녀원의 스테인글라스를 닮았고, 화려하고 주렁주렁 매달린 브로치는 제의용 십자가를 닮아있다. 수녀원에 맡겨지기 전 샤넬의 12년은 굶주림과 고독 속에 있었기에 오버진 수녀원이 곧 샤넬의 고향이었다. 수녀원에 맡겨진 아이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갖고 있었는데 샤넬의 역할은 수녀복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바느질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다. 그때부터 샤넬은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옷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꿈꿨던 것 같다.         


 그러나 샤넬이 수녀원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숙비용을 지불하는 ‘유료 원생’과 자신과 같은 ‘무료 원생’의 차별에 반항했고, 다른 원생들이 수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과 달리 그녀는 절대 어머니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꽤나 자주 성경 구절을 베껴 쓰는 벌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자마자 샤넬은 자유를 꿈꾸며 자신이 가진 유일한 기술인 바느질 능력을 살려 봉제회사에 얼른 취업해버렸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일이 없는 저녁에 그녀가 어릴 적 별명이었던 ‘코코 샤넬’이라는 가명으로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점이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억압적인 수녀원의 환경 속에서 자신을 표출시키고 싶은 강한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카바레가 그녀가 상류층 인사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카바레에서의 활동으로 샤넬은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들은 꽤나 자주 코코를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노래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타 업장에서 그녀를 부르지 않았고 전업으로 삼을 만큼 많은 무대를 갖지는 못했다. 당시 샤넬은 자신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샤넬에게도 운은 찾아왔다. 23살의 나이에 카바레 단골 고객이던 에티엥 발상(Etienne Balsan)과 교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발상의 아버지는 군대에 제복을 공급하는 부유한 사업가였다. 샤넬은 발상과의 결혼으로 자신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상류사회로 진입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샤넬을 지극히 아끼던 발상은 그녀에게 수많은 드레스와 장신구를 선물했고 샤넬은 이를 통해 안목과 품격을 기를 수 있었다. 2010년 전기작가 저스틴 피카르(Justine Picardie)에 의해 발표된 논문 [CoCo Chanel: The Legend and the Life]에 따르면 친언니(Julia Bertha Chanel)의 외동아들로 알려진 안드레 팔라스(Andre Palasse)가 사실은 발상과 샤넬 사이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친언니가 1910년 28의 나이로 자살하자 그를 입양해 보살폈으며 자신의 유산 또한 두 딸과 함께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전해진다. 자유롭게 사랑했던 샤넬이었지만 모정만은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편안한 여성복의 발명     


 동시에 샤넬의 사랑도 멈추지 않았다. 1909년 샤넬이 26살이던 해 발상의 절친한 친구 에드워드 카펠(Arthur Edward Capel)과 바람을 피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한 선박 사업가이자 폴로 선수였던 카펠과의 사랑은 샤넬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을 가장 강렬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1919년 카펠이 차량 사고로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발상 또한 그녀의 바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서로 경쟁하듯 샤넬의 사랑을 갈구했던 점이다. 어느 날 샤넬은 “카펠과 함께 떠납니다. 용서해줘요”라는 말을 남기고 발잔을 떠났다. 그렇지만 이후에 샤넬과 발잔은 친구 사이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샤넬은 발잔이 선물한 반지를 목걸이 삼아 평생 걸었다.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카펠은 샤넬에게 파리의 호화 모자 상점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1910년 파리의 패션 거리 캉봉(Rue Cambon)에 문을 연 샤넬 모드(Chanel Modes)는 그녀의 모자를 유명 연극배우가 착용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할 수 없었던 샤넬은 3년 뒤 프랑스 북부 해변 휴양지 도빌(Deauville)에 캐주얼 의복을 취급하는 부띠끄(Boutique)를 열었다. 샤넬은 도빌에서 카펠과 정착하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샤넬과 같이 자유연애주의자이자 타고난 방랑가였던 그는 이를 거절했고 샤넬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존중해야 했다. 가벼운 재질의 멋스러운 휴양지 패션을 선보인 부띠끄는 성공을 거뒀다. 그곳의 대표 상품은 여성용 카디건(Cardigan)인데 도빌의 날씨가 차고 습하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넉넉한 사이즈로 쉽게 걸치고 벗게 고안되었다. 이 카디건은 폴로 경기장에서 보온을 위해 선수들이 착용했던 니트 셔츠를 모방했는데 이는 폴로 선수였던 카펠이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옷에 착 달라붙는 답답한 실크 드레스에 싫증 낸 호화 부인들은 이 카디건에 열광했고 이 성공은 추후 남성복의 요소를 여성복에 삽입하는 샤넬 고유 양식의 초석이 되었다.    

  

 이어 샤넬은 프랑스 남서부 연안의 고급 관광휴양도시인 비아리츠(Biarritz)에 2호점을 열었다. 당시 비아리츠는 국가 전쟁을 피해온 스페인 귀족들이 많았고, 카지노 또한 성행하고 있었다. 이들 고객의 경제력을 확인한 샤넬은 가격을 슬그머니 올렸고 고 가격 정책으로 큰돈을 만지게 되었다. 2호점의 성공으로 샤넬은 카펠의 투자 금액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도빌의 풍광이 너무 로맨틱하고 카펠이 곁에 없었던 탓일까. 샤넬은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 러시아 황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Grand Duke Dmitri Pavlovich)가 그 주인공으로 편한 친구 같은 그와의 사랑은 카펠의 사후에도 이어졌다. 그 시기 샤넬의 명성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1914년부터 1919년까지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쟁 물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관련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여성들이 노동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은 화려한 기존의 불편한 의복보다는 휴양지에 기반한 샤넬의 실용적 디자인에 매력을 느꼈다. 특히 남성 속옷에 사용되었단 얇고 가벼운 저지(Jersey) 천을 투피스에 활용한 옷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이 투피스는 1916년 파리 엘레강스 (Les Elegances Pariennes) 잡지와 미국 유명잡지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에, 다음 해 미국 보그(Vogue)지에 소개되었다.  


 사업이 성공을 거둔 와중에도 그녀 마음의 중심에는 항상 카펠이 있었다. 그러던 카펠이 1919년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큰 시름에서 앓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죽음이 있기 1년 전 사놓았던 파리 루 깜봉(Rue Cambon) 번화가의 건물이 생각났다. 그녀는 미친 듯이 일을 하고자 그곳에 종합 패션 매장을 차리게 된다. 호화로운 패션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도 샤넬은 편한 패션을 고수했다. 엉덩이 부분에 주름을 넣어 이동을 편하게 한 샤넬 라인 원피스와 오늘날 샤넬의 시그니처로 꼽히는 짧은 소매 재킷에 큰 호주머니 두 개를 장착한 재킷, 길고 따뜻한 머플러 등을 차례로 선보이며 20년대 편한 옷을 선호했던 여성들의 욕망을 정조준했다. 기존에 없던 여성복의 등장에 파리 여성들은 열광했고 편한 여성복의 대명사로 샤넬은 고객 저변을 기존 부유층에서 일반 여성들까지 넓힐 수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성을 잘 이해한다. 나는 여성들에게 운전할 때도 편하게 입을 수 있으면서도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옷을 입혀주고 싶었다.”



 형식을 파괴하다     


 브랜드의 선전으로 자본이 넉넉해진 샤넬은 다양한 시도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1952년 라이프(Life)지와의 인터뷰에서 메릴린 먼로가 잠잘 때마다 옷 대신 입는다고 말한 향수 ‘샤넬 No.5’이다. 1920년대 당시 여성들이 사용하는 향수는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분류되었다. 첫 번째는 정숙하면서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자 하는 여성들이 애용했던 꽃향기의 향수였고, 두 번째는 사교계나 쇼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몇몇의 젊은 여성들이 애용한 머스크 향으로 가득 찬 저돌적인 향수였다. 이에 고리타분함을 느낀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던 신여성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향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조향사 어니스트 보(Ernest Beaux)에게 이 과제를 위임했고 어니스트는 당대 최초로 단일 향수가 아닌 80가지 향료를 섞는 방식으로 쟈스민을 기본으로 한 특유의 비누 향을 만들어냈다. No.5에는 당시에 좀처럼 사용되지 않던 ‘알데하이드(aldehyde)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단일 향으로 사용되면 느끼하고 강한 인상을 주지만 이를 다른 원료와 섞어 은은하게 남김으로써 기존에 없던 지속성이 강한 향을 만들어냈다.       


 샤넬이 샘플을 시향 할 때 어니스트는 각 샘플에 1에서 24까지 번호를 매겼는데 그녀는 단번에 5번 샘플을 골랐고 특이하게도 향수의 이름을 ‘NO.5’로 지었다. 숫자 ‘5’는 샤넬에게 의미가 깊은 숫자였는데 샤넬은 그의 첫 의류 컬렉션을 5월 5일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숫자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병을 카펠의 화장품 용기, 그리고 크리스털 위스키 티켄 더(Decanter)와 닮게 꾸몄다. 그녀는 이 향수가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확신하고 출시 전 샤넬의 전 매장에 향수를 듬뿍 뿌리고 당대 사교계 인사들에게 라벨을 붙이지 않은 향수를 선물하며 바이럴 마케팅에 나섰다. 그리고 드디어 21년 5월 5일 출시된 NO.5는 독특한 디자인과 향으로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24년 샤넬은 모조 보석과 모조 비즈를 소재로 한 코스튬 주얼리(Costume Jewelry)를 선보임으로써 또 하나의 혁신을 이뤄냈다. 평소 샤넬은 다양한 장신구들로 검정 톤의 옷에 에지(Edge)를 더하는 자신만의 패션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다른 고객들이 이러한 패션을 흉내 내고자 했지만 고가의 주얼리 가격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곤 생각했다. “꼭 보석들이 진짜일 필요가 있나?” 그리고 유리 조각, 모조 진주, 도금 은 등 다양한 소재들로 코스튬 주얼리를 출시했고 이들이 출시된 이후 그녀조차도 보석 대신 이 코스튬 제품을 애용했다. 그리고 장신구들은 어디까지나 패션을 위한 부가적 소품일 뿐 그 보석 자체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향후 샤넬의 크레이티브 디렉터가 될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는 이 코스튬 주얼리에 깊은 영감을 받아 옷에 비즈 장식을 수놓는 샤넬 특유의 맥시멀리즘(Maximalism)을 완성해냈다.             


 잇따른 2년 뒤 26년 거의 모든 천을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인 이브닝드레스를 리틀 블랙 드레스(Little Black Dress)를 출시했는데 이는 화려함을 뽐내는 무도 회복 사이에서 짙은 검은색을 사용해 역설적으로 더욱 눈에 띄게 하기 위한 의도였고, 샤넬의 또 하나의 혁신에 대중은 열광했다. 같은 해 보그(Vogue) 지는 이 드레스를 ‘샤넬의 포드(Chanel’s Ford)’라 소개했는데 이는 드레스가 파리의 유니폼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샤넬은 2년에 한 번씩 세상에 없던 것을 내놓고 스스로를 브랜딩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샤넬의 암흑기는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를 덮친 것이다. 샤넬은 전쟁 당시 대부분의 매장을 닫고 호텔을 전전하며 긴 망명생활을 이어갔다. 망명 생활 중 나치의 관료와 교제하고 그들에 협력했다는 점에서 부역자로 인식되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위의 이유로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처칠의 정치적 은총으로 풀려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샤넬은 스위스에서 휴식기를 갖다 1954년 71세의 나이로 파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상은 샤넬의 존재를 잊어가는 듯했으나 샤넬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노인이 된 샤넬은 기력을 짜내어 기존의 브랜드 유산을 살려 편안한 의상들로 컬렉션을 열었다. 그러나 54년은 유행이 돌고 돌아 다시금 몸매 라인이 강조된 여성적인 옷들이 조명받던 시기였기에 관계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옷들이라며 컬렉션을 혹평했다. 반면 신여성들이 패권을 잡고 있던 미국의 패션계는 현대적 여성 욕구에 걸맞은 옷이라며 컬렉션을 호평했다. 어쨌거나 컬렉션을 통해 샤넬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세상에 알렸고, 그녀의 화제성은 입증되었다. <뉴요커> 지는 그 무렵의 샤넬을 이렇게 묘사했다. “감각이 살아 있는 용모, 암갈색 눈, 빛나는 미소, 결코 막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생기. 그녀는 스무 살 여인이었다.” 이후 그녀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져온 순모 트위드 (Tweed) 소재를 활용한 샤넬 슈트(Chanel Suit)와 현재까지도 샤넬의 대표상품으로 자리 잡은 금색 체인이 달린 퀼팅 숄더백(Quilting Shoulder bag)을 출시하여 잇따라 히트시켰다. 이 두 제품을 통해 샤넬은 패션계 여왕의 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샤넬은 57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패션 오스카상(Fashion Oscar)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1971년 1월 10일 일요일. 산책을 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피로를 느낀 샤넬은 침대에서 가정부에게 소리쳤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창문을 열어줘!” 놀란 가정부는 샤넬의 방으로 뛰어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샤넬은 37년 간 머물렀던 파리 리츠 호텔(The Ritz Paris)에서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발렌시아가, 입 생 로랑, 피에르 발맹, 살바도르 달리 등 많은 문화인이 애도하는 가운데 샤넬은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샤넬은 숨을 거두는 그 해까지도 창작 활동에 몰두해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열정의 화신이라 할만하다. 루이비통과 에르메스는 가족 경영으로 창업자의 이름보다 그 브랜드 자체가 인정을 받았던 것과 달리 샤넬은 창업자 자신이 곧 그 브랜드의 핵심 아이콘이기에 샤넬의 부재는 브랜드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왔다. 샤넬의 향수 사업을 위탁하여 운영했으며 샤넬 하우스를 인수한 자크 베르트하이머(Jacques Wertheimer)는 고심이 깊어졌다.        


 베르트하이머는 샤넬의 유작들을 제품으로 출시해 반전을 모색했지만 시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후 경영을 맡은 아들 알랭 베르트하이머(Alain Wertheimer)는 수십억의 광고를 들여 No.5를 광고했고 제품은 샤넬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다시금 비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브리엘을 대체할만한 혁신적이고 섬세한 디자이너를 물색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끌로에(Chloe)를 이끌고 있던 파리 패션계의 아웃사이더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였다. 1982년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된 라거펠트는 가브리엘 샤넬이 곧 브랜드 샤넬이라는 판단 하에 샤넬의 성장 배경, 염감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고, 기존 샤넬의 포인트에 대중문화요소를 녹여내 샤넬을 재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재까지도 칼 라거펠트는 죽은 샤넬을 환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거펠트는 샤넬의 트위드 슈트, 샤넬 로고, 리틀 블랙 드레스, 퀼팅 백, 커스텀 주얼리 등 역사 전반을 연구하고 핵심 요소들을 현대의 트렌드를 반영하여 변주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컬렉션을 만들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영감은 바로 그녀다.”, “내 소명은 샤넬 재킷의 명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 말처럼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샤넬 제국을 이끌어온 그는 그야말로 가브리엘 샤넬의 혼령이 현대에 남아 머문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 샤넬의 진정한 계승자였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했고 그 역시도 2019년 하늘의 별이 되었다.    

 

 차기 선장을 맡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30년 동안 라거펠트와 함께 일한 그의 유일한 오른팔 버지니 비 아르이다. 라거펠트가 디자인 스케치를 하면 그녀가 아틀리에를 총괄하여 옷을 제작하고, 모델 캐스팅, 무대 설치 등의 모든 과정을 챙길 정도로 라거펠트는 그녀를 신뢰했다. 샤넬의 CEO 알랭 베리트 하이머는 말했다. “샤넬의 창립자인 가브리엘 샤넬과 칼 라거펠트의 유산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컬렉션을 위한 창작 작업을 버지니 비아르에게 맡긴다.” 버지니와 샤넬이 함께한 시간은 무려 32년에 달한다. 지금 현존하는 인물 가운데 비아르만큼이나 샤넬 하우스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라거펠트의 소명을 이어받아 샤넬의 생명력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쳐 새로운 전설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 한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가브리엘의 말이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결핍과 불안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녀는 세상을 증오하는 대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많은 남자들을 사랑했고, 세상 모든 여인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예술을 사랑했다. 피카소,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교류했으며 작가 장 콕토의 알코올 중독 치료비를 부담하고,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나지 않게 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자 했다. 그런 그녀의 죽음에 온 세상이 슬퍼했다. 라거펠트 또한 그녀를 사랑했기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죽음 전까지 샤넬 하우스의 자리를 지켰고, 비아르도 그렇기에 그녀가 남긴 발자취에 윤을 더하고 있다.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의 연보다 끈끈한 연모와 존경으로 대를 이어간 샤넬 하우스의 빛나는 발자취를 기대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명품의 탄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