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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존철학자 Sep 24. 2022

명품의 탄생

에르메스 

 - 에르메스의 시작     


 1837년은 분명 명품의 역사에 의미 있는 해이다. 루이 비통이 2년간의 도보 여행 끝에 파리에 도착한 해임과 동시에 명품 중의 명품 ‘에르메스(Hermes)’가 설립된 해이니까 말이다. 에르메스의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는 1801년 벨벳과 실크의 도시라 불리는 독일 섬유의 중심지 크레펠트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전쟁 중 질병에 걸려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뒤부터 프랑스로 건너와 정착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뒤이어 언급할 샤넬을 포함한 세계 3대 명품의 창업자 모두 부모로부터 단절된 환경에서 자라났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들의 내면에 내재된 결핍과 불안감이 곧 예술에 대한 집 착심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1800년대 후반까지도 일반 시민들의 주요 장거리 교통수단은 마차였으며 말과 관련된 장비에 대한 수요는 늘 있어왔다. 이에 티에리는 인근 공방에 들어가 바느질을 익힌 뒤 말안장을 포함한 마구(馬具) 용품을 제작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837년 같은 해 루이가 프랑스 최초의 철도선이 건립되는 것을 확인한 후 트렁크 제작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것과 달리 티에리는 마들렌 광장(Madeleine)의 상가를 임대해 마구를 제작하는 가게를 차린 것이다. 티에리가 첫 가게를 차린 그 장소는 루이필리프 왕이 행진하는 도중 공화당원들이 기습했던 곳으로 해당 습격 사건의 여파로 무구한 시민 수십 명이 사망했었고 그 여파로 임대료는 바닥을 쳤었기에 티에리는 빠르게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승마는 귀족들의 주요 취미 활동이었고 티에리는 오롯이 마구 제작에 집중하여 귀족들의 신뢰를 얻어갔다. 그런 티에리에게도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왔다. 1842년 루이필리프 왕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이 마차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원인은 엉성한 품질의 마구 때문이었고, 귀족들이 마구의 품질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에르메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힘입어 티에리는 루이와 같이 나폴레옹 3세의 왕실에 마구를 납품하기도 했다. 루이비통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왕실에 물품을 납품하는 것은 프랑스 최고의 장인임을 인정받는 것과 같았다. 이 기세를 몰아 그의 노년기인 1867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에서 자신이 생산한 마구 제품으로 참가하여 1등 상을 수상하여 명실상부 최고 마구 장인으로 거듭났다. 현재 에르메스 로고에 새겨진 마차의 그림 또한 최고 품질을 지향했던 티에리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티에리는 1878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자신의 인생을 최상품의 마구를 제작하는데 헌신했다.                                             




- 버킨백과 켈리백의 탄생     


 말의 안장은 1분에도 몇 번씩 흔들리게 쉽게 닳고 바느질이 풀어지게 된다. 그래서 마구 장인들의 핵심 기술은 가죽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중첩시켜 내구성을 높이는 것이었는데 이는 추후 에르메스 브랜드의 높은 품질의 상징이 된다. 바느질의 대가인 아버지의 장인 정신을 계승한 것은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Charles Emile Hermes)였다. 샤를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최상품의 마구를 제작하는데 매진했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수공예 실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버지가 사망한 바로 그해 만국 박람회에 다시 한번 출전하여 1등 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자신이 에르메스의 정통 계승자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이 두 차례의 만국 박람회 수상으로 인해 에르메스는 마구에 있어서 그 어떤 제품 비할 바 없는 최고급 브랜드로 공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기세를 받은 샤를은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 인근에 새로운 매장을 열고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품목을 늘려 말의 안장에 연결시키는 주먹만 한 가방인 새들백(Saddle Bags)을 개발하여 판매하기도 시작했는데 이는 현재 에르메스 버킨(Birkin) 백의 원형이 되었다. 그렇게 샤를은 마구 용품의 최강자에서 가죽용품의 최강자로 브랜드를 자리매김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그러다 1902년, 샤를의 두 아들인 아돌프 에르메스(Adolph Hermes)와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Emile Maurice Hermes)가 브랜드에 합류하면서 에르메스는 3세대 경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동차가 대중화되었다 해도 여전히 귀족 계층에게 승마는 떼놓을 수 없는 취미였기에 에르메스의 마구 제품의 매출 또한 유럽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Nikolai Ⅱ) 또한 에르메스의 고객일 정도로 브랜드의 명성은 3세대까지도 이어졌다. 1914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모리스는 프랑스 기병의 물품을 제작할 가죽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그는 차량이 오가는 교통수단의 발전과 여행 산업의 발전, 지퍼의 대중화를 목도하게 되었다. 모리스는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차의 수가 줄어들고 자동차의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모리스는 에르메스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모리스는 1918년 에르메스의 단독 대표가 된 뒤 에르메스의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 : 마구 안장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바느질 기법)와 지퍼 기술을 적용한 핸드백과 여행 가방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의류, 벨트, 장갑 등 다양한 형태의 가죽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미국에 진출하였으며 29년에는 에르메스 최초의 여성복 라인을 선보였다. 그렇게 모리스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최고의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한 다양한 가죽 제품과 여성복을 내놓으면서 종합 패션 브랜드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럼에도 모리스는 에르메스의 헤리티지(Heritage)를 잇고자 말과 관계된 진귀한 물건이라면 어느 것이든 수집하여 브랜드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그렇게 그가 모은 컬렉션은 그렇게 에르메스가 창립 100주년이 되던 해에 에르메스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이후 1951년 모리스의 사위였던 로베르 뒤마(Robert Dumas)가 가업을 승계하게 되었고 뒤마는 사륜마차 로고에 더해 포장지로 오렌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현재 인식되고 있는 특유의 브랜드 고유성을 확보하였다. 오렌지 색은 천연 가죽 색과 가장 흡사하면서도 물자가 부족했던 2차 세계 대전 시기 가장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던 연료였다. 그는 에르메스가 가진 고급의 이미지를 가죽에만 가두지 않고 스카프 ‘까레(Carres)’와 향수 오드 에르메스(Eau d Hermes)를 내놓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버킨 백과 동시에 에르메스를 양대 축이라 불리는 켈리 백을 출시한 것이다.     1956년 모나코의 왕세자비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가 ‘쁘띠 싹 아 끄로와(Petit Sac A courroie)’라는 라인의 가방을 들고 임신한 배를 가리고 있는 사진이 ‘라이프(Life)’ 잡지를 통해 소개되면서 사람들은 이 백을 켈리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쁘띠 싹 아 끄로와’라는 이름 대신 사람들이 이를 켈리백이라 명명하자 뒤마는 직접 모나코 왕실을 찾아 가방의 이름을 ‘켈리백’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그는 본격적으로 이름을 변경하여 대대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그렇게 가방의 상단에 핸들이 하나 달린 개인 간소한 디자인의 실험적 제품은 훗날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의 가수 겸 배우 제인 버킨(Jane Birkin)이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로베르의 아들인 장 루이 뒤마 회장에게 켈리 백이 작아 불편하다는 의견을 말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1984년 켈리보다 넉넉하게 공간을 키운 버킨백을 완성시켰다. 켈리백과 켈리백의 파생상품인 버킨백은 현재 에르메스의 매출을 책임지는 일등 공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에르메스의 장인 정신     


 현재 에르메스의 최고 경영자(CEO)는 6대손인 액셀 뒤마(Axel Dumas)로 2004년 이후 8년간 전문 경영인을 도입한 적이 있으나 다시 뒤마가 경영 일선에 복귀함으로써 지속적으로 가족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루이비통이 아르노에게 인수당한 후 신예 디렉터의 주도하에 파격적 시도들로 브랜드의 이미지를 대중화시킨 것에 반해 에르메스는 하이엔드(High-End) 브랜드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한 때 아르노의 LVMH가 에르메스를 인수 합병하기 위해 지분의 23%까지 차지한 적이 있으나 뒤마 이외에도 40명의 창업주 6대손 가운데 10여 명이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아르노의 공격으로부터 브랜드를 지켜낼 수 있었다. 현재까지도 에르메스의 모토는 ‘장인 정신’으로 켈리백과 버킨백 두 가지 라인의 품질을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1990년부터 2010년대까지는 명품의 기업화 시기로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브랜드를 선전한 후 공장을 통해 생산 단가를 낮추는 타 기업과 달리 에르메스는 지독하게도 수공업을 고수하며 최고급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에르메스의 직원 1만 8,000명 가운데 장인의 수만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르메스 장인들의 주요 기술은 왁스를 입힌 프랑스산 리넨 실을 사용해 바느질을 수십 번 중첩시키는 새들 스티치(Saddle Stictch)와 단면의 광택을 처리하는 기술로 두 가지 모두 마구와 안장을 만드는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장인의 기술 외에도 에르메스는 스크래치가 없고 땀구멍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 최고급 악어가죽을 참나무 액에 8개월 이상 숙성시킨 후 송아지 가죽을 섞은 최고급 소재만을 활용하여 가방을 만든다.     

 

 켈리, 버킨 등 에르메스의 대표 핸드백의 경우 주문 후 수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는 장인 한 사람이 백 하나의 전 공정을 모두 책임지기 때문이다. 에르메스 백의 제작은 한 명의 장인이 과정을 책임지기에 가방의 고유번호를 통해 어떤 장인이 언제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에르메스의 가방 장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체 장인 학교에서 3년 공부를 마친 후 아틀리에에서 2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또한 이러한 장인이라 할지라도 프랑스 노동법상 주간 근로 시간은 33시간으로 한 명의 장인이 가방을 만드는 데 약 20시간이 걸리기에 한 장인이 일주일에 두 개의 제품도 완성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에르메스의 대기열이 발생하고 오히려 이 대기열은 브랜드의 명품 이미지를 부각하는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에르메스의 스카프인 까레(Carres) 또한 7만 가지 염료 가운데 본사에서 개발한 도안 속 색상과 가장 가까운 것을 심혈을 기울여 골라, 최고급 실크 트윌 원단에 색을 입히고, 스카프 테두리를 꼼꼼하게 손바느질하여 완성된다.      


 에르메스의 지분은 가문 사람 200여 명에게 분산되어 있기에 성장 압박에서 벗어나 공급을 줄이더라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할 수 있었다. 루이비통은 브랜드 가치를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대중성을 확보하여 매출을 신장시키기 위해 애를 쓴 반면 에르메스는 매출 여부와 무관하게 퀄리티의 유지에 주안점을 둠으로서 상대적 브랜드 가치를 높여온 것이다. 실제 재무제표를 보더라도 매출 및 영업이익률 측면에서는 루이비통이 앞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뒤마는 에르메스가 럭셔리 회사가 아니라 최고 품질의 상품을 만드는 장인 기업이라 말한다. 에르메스에는 마케팅 부서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품질이 곧 마케팅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에르메스는 가족 경영을 고수해 명품 브랜드 가운데 자본 논리에 잠식되지 않으면서 품질이라는 권력으로 명품 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에르메스는 다양한 디자이너와 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들 모두 에르메스의 고유 이미지를 훼손시키지 않는 선에서 작업한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벌킨 백과 켈리백의 경우 디자인의 원형은 수십 년이 넘게 유지되고 있고, 디렉터들은 핸드백이 아닌 여성 의류 카테고리 내에서 집중적으로 창의력을 활용해왔다. 벨기에 앤트워프 출신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는 여유로운 실루엣과 정교하고 완벽한 테일러링 기반의 베이식 아이템으로 하우스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의류에 이식하였고, 패션계의 악동이라는 장 폴 고티에(Jean-Paul Gaultier)는 브랜드 유산인 승마를 위트 있게 재해석하였다.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는 의류를 모던하고 웨어러블 하게 연출하였고 호평을 받았고, 2014년부터 현재까지 에르메스의 크레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출신의 나데쥬 바니 시뷸스키(Nadège Vanhee-Cybulski)는 구조적인 디자인과 독특한 커팅으로 표현된 의상들에 말안장의 스티치, 핸드백의 버클과 스트랩, 스카프의 프린트 등 브랜드 고유의 디테일들을 접목하여 브랜드의 원형을 지키고 있다.     


 에르메스는 대량 생산으로 의류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가문의 유지를 받들어 최고급 소재를 활용한 장인 중심의 공방 체제를 이어갔고 그 변치 않는 우직함이 역설적으로 트렌드를 뚫고 최고급 브랜드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럭셔리 시장 전문 조사기업 알파 밸류(Alphavalue)는 에르메스 장인 1명의 가치가 프랑스 금융 그룹 소시에테 제네랄(Societe Generale) 은행의 인재보다 30배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했다. 수공업 장인의 인적 가치가 프랑스 일류 금융 전문가의 가치를 뛰어넘은 것이다. 에르메스가 지독하리만치 고수하고 있는 수공업 정책은 소비자들의 선망의 요소로 자리잡음으로서 브랜드는 시대의 변화에도 굳건히 최고 명품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브랜드의 생존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대의 흐름에 읽고 이에 맞춰 유연하게 변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대의 흐름에도 고유성을 보존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루이비통은 전자의 방식으로 성장해왔고, 에르메스는 후자의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많은 브랜드들이 전자의 방식을 택하고 후자의 방식을 포기하는 바람에 에르메스의 가치는 더욱 부각되었다. 짧은 기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19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오직 에르메스만이 할 수 있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에르메스는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부끄럽지 않은 브랜드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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