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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존철학자 Sep 24. 2022

명품의 탄생

루이뷔통

루이뷔통 예술을 운반하다.     


 루이비통의 시작     


 1821년 8월 4일. 루이비통은 프랑스 동부 쥐라 산맥(Jura Mts)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앙쉐(Anchay)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을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쥐라 산맥의 ‘쥐라’는 ‘숲’을 뜻하며 그 부근은 프랑스 일대에서 가장 숲이 우거진 지역으로 꼽힌다. 쥐라 와인은 현재까지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쥐라는 자연의 혜택을 많이 받은 지역이지만 도심과의 거리로 인해 발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특히 루이비통의 유년 시절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상업시설은 물론이고 교육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우거진 숲과 나무를 바라보며 유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어린 루이비통을 살뜰히 도 보살폈던 그의 친모는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뒤 그의 친부는 재혼했고, 허영심과 질투심이 많았던 그의 계모는 자신이 낳지 않은 양아들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그런 계모를 용인하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계모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해 루이비통은 마침내 가출을 시도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루이비통이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였던 어머니의 손재주를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손기술 하나를 믿고 무작정 프랑스의 중심부 파리로 몸을 옮기기로 결심했다. 앙쉐에서 프랑스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거리로는 약 470km에 달하고 가는 데만 무려 2년이 넘게 걸렸으니 말이다. 그는 가는 도중 숙박업소와 장터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맡아가며 여비를 스스로 충당했다. 13살의 가출 소년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16살의 장성한 청년이 되어있었다. 전염병을 포함한 온갖 질병들이 만연해 평균 수명이 50살을 넘지 않았던 그 시기에 16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다. 


 그가 파리에 도착하자 파리는 산업혁명으로 공장에서 내뱉는 연기로 자욱했으며, 사람들은 어딘가 분주했다. 루이는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년간의 도보 여행에 그의 손은 많이 거칠어 있었지만 결국 그에게 믿을 건 그 손 하나였다. 루이는 트렁크 가방을 제작하던 생 제르맹의 장인 무슈 마레샬(Monsieur Maréchal)의 작업실에 수습공으로 들어갔다. 여러 용품들 가운데 트렁크를 제작하기로 결심한 것은 루이에게 큰 행운이었다. 루이가 파리에 입성한 1837년 프랑스 최초 철도선이 개설된 이래로 10년 뒤 철도 여행의 대중화로 트렁크의 수요가 폭증했으니 말이다. 루이는 그곳에서 묵묵히 실력을 연마했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갔다. 그리고 14년이 지나 루이의 나이가 30대가 되었을 때는 스승 무슈 마레샬을 뛰어넘어 그 누구에게도 비할 바 없는 명실상부 최고의 장인이 되어있었다.      


 이 소문은 왕족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나폴레옹 3세의 아내, 황후 유지니에 드 몬티조(Eugenie de Montijo)가 루이를 패커(Packer)로 고용하게 되었다. 당시 일부 왕족들은 패커(Packer)라고 불리는 개인 맞춤형 가방을 제작하는 장인들을 두고 있었는데 루이는 왕비의 패커를 맡음으로써 장인으로의 최고 영예를 누린 것이다. 스페인 출신의 왕비는 옷에 대한 강한 욕심과 집착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많은 옷들을 훼손시키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루이의 섬세한 기술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혈혈단신으로 파리에 입성해 왕비의 간택을 받은 루이의 자신감은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을 거름 삼아 늦은 나이에 17살의 어린 소녀 클리 멘스 에밀리에(Clemence-Emilie Parriaux)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이 소녀는 그 아름다움으로 소문이 파다했고, 루이는 그에 걸맞은 사내가 되기 위해 자신의 패션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1854년 둘은 결혼했고, 결혼 직후 그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뤼 뇌브 데 까푸 신느 4번가(4 Rue Neuve des Capucines)’에 자신의 개인 매장을 열게 되었다. 이 매장에는 유지니에 황후의 넉넉한 후원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기술이 최고라 여기던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루이는 매장 간판에 이렇게 적었다. “귀하의 손상되기 쉬운 물건들을 가장 안전하게 보관하며 특히 의류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Securely Packs the most fragile objects. Specializing in packing fashions.)”      


 당시 파리의 부유층 부인들 사이에서 수십 미터 길이의 실크 드레스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고 철도 여행 시 이들 드레스를 상하지 않게 하는데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루이는 이러한 그들의 염려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당시 트렁크는 둥근 윗부분에 가죽 손잡이가 달린 형태를 보였는데 루이의 트렁크는 모든 면을 평평하게 다졌고, 가죽 대신 옆면에 철제 손잡이를 달았다. 그리고 화룡정점으로 캔버스 천에 풀을 먹여 방수 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때문에 짐칸에 컨테이너 적재하듯 트렁크를 쌓아 올려 다량의 옷을 보관할 수 있었고, 윗부분의 옷까지 구김 없이 보관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눅눅한 화물칸에서도 오염 없이 옷들을 지킬 수 있었다. 가죽 손잡이가 없어 혼자 간편하게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짐꾼을 고용하고 있으며 옷의 손상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귀부인의 입장에서는 이는 문제 될 게 아니었다. 프랑스 귀부인들은 루이의 안전한 트렁크에 열광했다. 심지어는 입소문을 타 이집트의 왕실에게까지 의뢰를 받을 정도였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루이의 첫 히트 상품인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Grey Trianon Canvas)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성공으로 부를 축적한 루이는 전국 각지에 폭주하는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파리 외곽의 아니에르(Asnieres)에 첫 번째 공방을 열었다. 도저히 자신 혼자 트렁크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해 솜씨가 좋은 조수들을 고용하여 생산 거점을 만든 것이다. 아니에르에는 당시 최고의 자동차 생산업체들이 집결해 있었고 그들은 자동차를 구입 후 공방에 들러 트렁크를 주문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사업이 순항을 걷고 있던 1870년 독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 중 철강 생산 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던 아니에르는 집중포화를 맞아 공방은 폐하가 되었고, 결과마저도 비스마르크에 의하여 독일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황제 루이 나폴레옹은 성난 국민의 손에 폐위되어 6개월 동안 포로로 지내다가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황제 일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루이는 든든한 자신의 후원자마저도 잃게 되었다. 그렇게 1871년 피신해있던 루이는 아니에르로 돌아오자 폐허가 된 공방 안에서 머리를 움켜쥐었다. 조수들은 뿔뿔이 떠나 행방을 알 수 없었고, 그의 모든 장비와 가방들은 도난당해있었다.      


 그러나 51살의 중년 루이는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얼마 안 남은 재산을 몽땅 털어 파리 중심 루 스크리브(Rue Scribe) 지역에 새로운 매장과 공방을 차렸다. 한 차례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갔지만 그의 명성은 견고했기에 가방은 다시 팔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아니에르의 부서진 폐허를 연상시키는 회색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여러 색깔을 고심하던 중 루이는 승마 기구의 색깔로 고급스러움의 상징이었던 갈색을 택했다. 그리고 단순 기능성만 강조하던 트렁크에서 벗어나고자 갈색 장식용 가죽 줄을 덧대고 자신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새겨놓음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슬그머니 가격을 올려 독보적인 명품으로서의 이미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렇게 독불 전쟁으로 인한 시련을 이미지 변신을 위한 장치로 승화시켰고 노년이 된 루이의 과잉된 자의식을 트렁크에 새겨 넣음으로써 오늘날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흰머리가 성성한 루이가 환갑을 앞두자 ‘루이뷔통’은 어느새 고급 트렁크의 고유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시골 출신 16살의 어린 수습생이 그토록 꿈꿔왔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유럽 왕족의 집사들은 그에게 지속적으로 작업을 의뢰했고 70년대 후반 이동 수단으로써의 철도는 부유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확장되면서 상대적으로 형편이 넉넉한 일반 시민들도 그의 가방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방은 특유의 디자인으로 멀리서도 눈에 띄었고, 서민들은 우등 칸의 부자들 곁에 놓인 루이뷔통 트렁크를 동경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닿으면 닿을 수 있는 대중적인 명품’. 오늘날 루이뷔통 브랜드가 갖는 이미지는 어찌 보면 그때부터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시민들의 눈에 자주 노출되는 게 꼭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이 루이비통을 갖고자 모조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산업혁명으로 경제적 욕망이 들끓었던 도시의 상인들은 버젓이 모조품을 판매하고 큰 수익을 거뒀다. 육안으로 보기에 진품과 모조품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80년대 초중반 모조품의 매출이 진품의 매출과 맞먹자 루이는 도저히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당시는 특허권의 개념이 모호했고, 이들의 판매를 통제할 사법력이 조성되지 않았기에 루이는 타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가 변해야만 했다. 때마침 1885년 루이는 유럽 진출을 위해 큰돈을 들여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해외 매장을 열었고, 그가 책임져야 할 조수와 판매직원은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루이는 머리를 감싸 매고 고심을 이어갔다.      


 모조품 제작업자들이 따라 하기 힘든 고급 기술을 가방에 투영시켜야 했다. 그리고 루이는 그 답을 목자 틀과 잉크를 이용하여 색을 입히는 실크 스크린 (Silk Screen) 기술에서 찾았다. 그리고 루이는 자신의 가방에 정교한 격자무늬를 입혀 새로운 고유성을 창조해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모노그램과 함께 루이비통의 트레이드 마크로 꼽히는 격자무늬인 ‘다미에 캔버스 패턴 (Damier Canvas pattern)’이다. 여기서 다미에(Damier)는 프랑스어로 체크무늬를 의미한다. 루이는 두 가지 색을 이용하여 캔버스 천에 체크무늬를 입히면 공방에서 비밀리에 사용하던 혼합 염료와 모조품의 싸구려 염료는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더해 정확히 정사각형 형태로 찍는 기술 또한 모방하기 쉽지 않았고, 루이는 꼼꼼하게 무늬 위에 자신의 로고를 새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루이는 뒤이은 모든 제품들에 다미에 패턴을 적용시킴으로써 이미 유통되고 있던 제품들을 무용하게 만들었다. 1888년 루이는 다미에 패턴을 적용한 이후 곧바로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The Paris World Fair)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공표함으로써 모조품과의 전쟁에서 1차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게 3년 뒤 철도 여행 대중화에 발맞춰 자신의 트렁크 브랜드를 유럽 제일의 브랜드로 키워낸 루이는 다미에 패턴이라는 유산을 남긴 채 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리고 아들 조르주 비통(Georges Ferreol Vuitton)이 루이비통의 고유성을 확보하는 과제를 짊어지게 되었다.          




 루이뷔통다운 것     


 조르주 비통은 장인 정신은 부족했지만 사업 감각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조르주는 루이의 외동아들로 일찍이 자신이 사업을 물려받을 것을 알고 있었고 사업에 대한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루이 또한 자신의 아들을 사업의 명수로 키우기 위해 공을 들였다.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함과 동시에 조르주를 영국으로 유학 보내 영어를 익히게 했다. 루이는 영어에 유창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업 확장에 약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르주는 루이가 다미에 패턴 개발에 몰두해 있을 때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런던 시내에 해외 매장 건설을 주도했고, 1893년 시카고 국제 박람회에 참가하여 국제적 위상을 공고히 한 것도 그였다. 조르주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브랜드를 위해 여과 없이 활용한 것이다. 또한 그는 과감한 투자로 1914년 파리 샹젤리제 거리(Champs-Élysées)에 패션 소매점 가운데 당대 최대 규모인 7층짜리 루이뷔통 매장을 세우기도 했다.              


 탁월한 사업가였던 조르주는 브랜드의 매출을 성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모조품은 또 한 번 루이비통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7년이 지나자 인쇄 기술은 발달해 그의 아버지가 힘써 고안한 다미에 패턴을 경쟁자들이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시대는 기능성을 강조한 가방이 아닌 미학이 녹아든 사치품으로서의 가방을 구입하고자 했다. 조르주는 변화의 필요성을 직감했고 가방에 자신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알파벳 ‘L’과 ‘V’를 비스듬히 겹친 로고와 프랑스 아르누보 양식의 영향받은 꽃을 번갈아가며 입혔다. Art Nouvea. 프랑스어로 직영하면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이며 19세기 말 일본의 판화인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일어난 미술 형식으로 평면에 꽃과 덩굴 등 자연을 새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아르누보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영향을 받은 조르주는 아버지의 로고 옆에 꽃들의 이미지를 입히는 모노그램 캔버스(Monogram Canvas)를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모조품과의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1905년 갖은 노력 끝에 당시로서 생소하게 브랜드 문양에 대한 특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공방에 틀어박혀 제품 연구에만 몰입하던 그의 아버지와 달리 조르주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차량 여행을 즐겼다. 그는 루이비통의 가방이 차량 뒤 트렁크에 쉬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 가방의 크기를 지속적으로 축소시켜나갔으며 검은색 방수포를 덧입혀 내구성을 비약적으로 향상했다. 또한 내부 구조를 다양한 물건을 담을 수 있도록 구획을 나눠 오늘날 우리가 공항에 들고 다니는 트렁크 내부의 원형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그는 여행용 트렁크가 강도들의 표적이 되는 것에 착안해 가방에 휴대용 텀블러 자물쇠를 부착한 가방을 개발하여 출시했다. 더 나아가 홍보의 일환으로 당대 유명 마술사였던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에게 신문을 자물쇠가 닫힌 루이뷔통 트렁크에서 탈출해볼 것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여 바이럴 마케팅을 선보였다. 물론 후디니는 제안에 응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자물쇠의 존재에 대해 재인식하게 되었다. 모노그램 캔버스의 개발과 특허 취득, 내부 구조의 변경, 텀블러 자물쇠의 개발 사례를 통해 우리는 조르주의 실용적 성품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필요에 의해서 개발된 이들 장치는 오늘날 루이비통의 미학의 초석으로 공고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조르주는 트렁크에서 벗어나 제품 라인업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는 납작하게 접는 여행용 가방인 스티머 백(Steamer bag), 둥근 형태의 키폴 백(Keepall bag), 휴대용 손가방인 스피디 백(Speedy bag), 복주머니 형태의 노에 백(Noe bag)을 차례로 선보여 오늘날 루이비통이 명품 핸드백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루이비통이라는 이름을 유럽 최고의 명품으로 만든 것은 루이이지만 이를 현대에도 사랑받을 수 있는 글로벌 브랜드로 변화시킨 것은 분명 조르주의 공이라 할 수 있다. 조르주가 개발한 텀블러 자물쇠, 모노그램 패턴은 현재까지 루이뷔통 미학의 가장 주요한 원천이며, 무엇보다 그는 실용적 성품으로 상품 카테고리를 핸드백으로 확장시켜 브랜드의 한계를 넓혀 놓았다.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 쉬지 않는 열정으로 루이비통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조르주는 1936년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후 조르주의 아들 가스통 루이 뷔통 (Gaston-Louis Vuitton)은 공성이 아닌 수성의 싸움을 이어가게 된다. 1883년 태어난 가스통은 누나 장 루이비통이 병으로, 쌍둥이 남자 형제인 피에르 루이비통이 1차 세계 대전 중 사망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가스통은 열정적인 아버지 밑에서 14세의 나이에 아니에르 공방에서 도제식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강인했던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비해 유약했지만 미적 감각에 있어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이집트, 유럽, 미국 등을 해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할 정도로 여행을 즐겼고, 세계의 다양한 미술에 관심을 보였다. 탁월한 수집가였던 그는 앤티크 용품, 부족 미술품, 빈티지 장난감, 고서적 등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기능성의 시대를 종결하고 본격적인 미학 시대를 열고자 백의 크기를 더욱 소형화시켰으며 루이뷔통 매장 내 디스플레이에 각별하게 신경 써 세련된 이미지를 첨가했다. 또한 단순 판매 용도가 아닌 브랜드 선전을 위한 여행용 키트, 샴페인 운반 백, 나무 퍼즐 게임 등의 제품을 개발하여 브랜드의 신선함 높였다.     




-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에 삼켜지다     


 1970년 가스통의 사망 이후 글로벌 럭셔리 기업으로 거듭난 브랜드 루이비통에게 중요한 것은 경영이었다. 제품 생산 공장을 다변화하여 글로벌 수요에 대응하고, 아시아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며, 변화하는 트렌드를 읽어 새로운 브랜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중요해진 시점이 온 것이다. 루이비통의 네 번째 선장을 맞게 된 가스통의 사위 앙리 라카 미에(Henry Racamier)는 국제 비즈니스 전문가로 유통 전략을 수립하고 아시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1980년대 루이비통을 파리와 뉴욕 증권 거래소에 차례로 상장시킨 다음 셀린느와 지방시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샴페인 브랜드 모에 샹동과 코냑 브랜드 헤네시를 보유한 모에 헤네시와의 합병을 추진하여 오늘날의 거대 기업 LVMH(루이뷔통 모에 헤네시)를 탄생시킨 것도 그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합병은 루이뷔통 가문에게는 재앙과도 같았다. 문화적 토대가 달랐던 모엣 헤네시 그룹과 루이비통은 독립 경영을 약속했지만 이내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젊은 기업인이 있었다. 유럽 최대 재벌이자 세계 부자 순위 3위 그리고 현재 LVMH를 이끄는 철혈 기업가 베르나르 장 에티엔 라르노(Bernard jean Etienne Arnault)였다. 건설 재벌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는 프랑스 최정상 공학 대학인 그랑제꼴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뒤 경영 수업을 받게 된다. 그는 천재적인 사업 감각으로 입사 5년 만에 실질 경영권을 장악하였고, 아버지 회사의 사명을 페리 넬로 바꾸고 건설 사업부를 매각한 다음 부동산 사업에만 집중하여 막대한 돈을 벌여 들였다.       


 그는 부동산 사업과 건설업의 한계를 인지하였고, 80년대부터 진행된 패션 산업의 급격한 성장을 목도하면서 회사의 자본을 투입하여 패션산업에 뛰어들길 갈망했다. 먼저 우여곡절 끝에 84년 크리스천 디올(Christian Dior)의 모기업 부삭(Boussac) 그룹을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부삭의 직물 사업과 기저귀 사업을 정리하고, 직원 8,000명가량을 감원해 2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 전통의 럭셔리 브랜드는 가족 경영을 원칙으로 하며 하나의 가문이 하나의 브랜드를 이끄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신 경영 기법을 몸에 익힌 인수 합병 전문가이자 공학도 출신의 냉혈한 기업가인 그는 복수의 브랜드를 합쳐 그룹으로 운영하길 원했다. 디올 브랜드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경험하게 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럭셔리 기업을 만들겠다.” 그는 사치품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갖고 있었고 더 많은 브랜드를 갈망했다. 그러던 중 모에 헤네시 그룹의 알랭 슈발리에와 경영권 분쟁을 겪던 라카 미에가 제 발로 도와달라며 에르노를 찾아온 것이다. 냉혈한 아르노는 라카 미에 에 백기사로서의 연대를 약속했지만 지분을 공격적으로 인수한 뒤 슈발리에와 라카 미에를 차례로 내쫓은 다음 LVMH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마흔에 불과했다. 그렇게 루이비통은 사위의 욕심으로 4대에서 가족 경영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노는 여러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공격적 마케팅과 혁신 경영으로 루이비통의 최전성기를 만들어낸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롭게 빛나다     


 크리스천 디올(Christian Dior), 셀린느(Celine), 펜디(Fendi), 지방시(Givenchy), 겐조(Kenzo), 불가리(Bulgari), 티파니 앤 코 (Tiffany & Co.) 등 60개가 넘는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LVMH 그룹을 현재까지 이끌고 있는 아르노는 많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지만 명품 산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인물로 꼽힌다. 그는 브랜드의 역사성 위에 신진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얹어 브랜드의 에너지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고 대중화시키는데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마크 제이콥스에게는 루이비통의 디자인을 맡겼고, 존 갈리아노에게는 크리스천 디올의 디자인을 맡겼다. 그리고 스타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명품의 대중화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리가 현재 명품이라 불리기에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역사와 장인 정신이다. 명품은 인간이 가진 ‘선망’의 감정을 물질로 환원시킨 것이다. 그리고 브랜드가 가진 유구한 역사와 최고만을 고집하는 장인 정신은 선망의 명분을 제공해준다. 1837년 마구와 말안장을 만들었던 ‘에르메스’, 1847년 금세공업자이자 상인이었던 ‘카르티에’ 등 현재 각광받는 명품 브랜드들 다수는 1800년대 장인의 수공예품에서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루이뷔통 역시 앙쉐 마을의 소년은 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파리 최고의 명장이 되었고, 황후의 친애를 받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유럽 최고의 가방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텀블러 자물쇠, 다미에 캔버스, 모노그램 캔버스라는 루이비통만의 고유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하나 명품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현대적 감각이다.      


 전통 깊은 브랜드가 현대적 미학 감각을 반영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무른다면 그 브랜드의 생명력은 약화된다. 브랜드가 젊은 세대들에게까지 소구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동적 에너지가 필요했고, 아르노는 이 진리를 명쾌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셀린느’에 피비 필로, ‘지방시’에 리카르도 티시, ‘펜디’에 칼 라거펠트라는 신예 디자이너를 각각 기용함으로써 브랜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아르노는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졸업한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에게 루이비통을 혁신시키라는 과제를 부여했다.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수석 디자이너로 루이비통을 이끈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이 젊은 여성들이 열광하는 혁신적인 브랜드로 탈바꿈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은 상업성을 강조하며 팔릴만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학풍을 보이는데 제이콥스는 현대 여성들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꿰뚫고 이를 핸드백의 형태로 재탄생시켰다.     


 마크 제이콥스는 1963년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7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3번의 재혼을 하며 미국 각지를 이사를 다녔는데 그러다 17살 때 그런 어머니를 떠나 친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친할머니는 뉴욕의 세련된 동네인 어퍼 웨스트사이드(Upper west side)에 거주했으며 그곳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그의 예술적 원천이 되어주었다. 소년 시절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자 했던 그는 ‘샤리바리’라는 의류 매장에 찾아가 무급으로라도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와중 존경하던 페리 엘리스를 만나고, 그는 마크에게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 진학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청년기 뉴욕의 번화가를 전전하며 대중문화를 온몸으로 흡수했고, 블론디, 롤링스톤즈 같은 펑크 뮤지션들의 음악과 스타일에 심취해 있었다. 파슨스에 진학한 마크는 재학 시절부터 황금 골 무상, 와인버그 골드 팀블상 등 교내 여러 상을 휩쓸며 주목을 받았고, 이후 ‘제이콥스 더피 디자인 주식회사(Jacobs Duffy Designs Inc)’라는 패션회사를 설립했다.      


  스트릿 패션에 기반하여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인 그는 보그지에 ‘패션계 떠오르는 7인’으로 선정되고, 23살의 나이에 유명 패션 어워드인 CFDA의 ‘페리 엘리스상’을 최연소로 수상하며 스타 디자이너로 거듭났다. 이후 브랜드 ‘페리 엘리스’의 부사장으로 역임하다가 자신이 내놓은 그런지룩이 브랜드 이미지와 상충된다는 내부 비평에 해고당하게 되고 이후 아르노 회장에게 발탁당한 것이다. 아르노는 마크의 젊고 반항적인 이미지를 루이비통에 이식하는 베팅을 한 것이다. 이후 마크는 모노그램을 살리되 기존 소재에서 탈피하여 에나멜가죽을 이용한 베르니 컬렉션을 선보이고, 데님 소재를 활용한 제품을 내놓는 등 다양한 시도들을 이어갔다. 또한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콜라보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2001년에는 현대 예술가 스티븐 스프라우스와 모노그램 위에 페인트로 로고를 휘갈겨 쓴 ‘그라피티 모노그램’을 선보여 2030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3년에는 아시아의 앤디 워홀이라 불리는 무라카미 타카시와 함께 하얀 가죽 위에 다채로운 색감을 익힌 ‘체리 블로섬 모노그램’을 선보였고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치며 파격적인 세련됨을 보유한 브랜드 정체성으로 덧입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파격적 시도와 패션 업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한 에너지로 대중성을 확보한 루이비통은 2008년 포브스(Forbes) 세계 명품 순위에서 에르메스(Hermes)를 제치고 당당히 1위로 올라섰다. 마크는 미국적인 캐주얼과 프랑스의 엘리강스함을 잘 버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루이비통의 백을 젊은 여성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have item)으로 포지셔닝함으로써 루이비통의 장기적 성장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고, 예술가와의 콜라보를 대중화시켰다. 이후 발렌시아가를 급성장시킨 니콜라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 남성복 디자이너 킴 존스(Kim Jones), 스트리트 브랜드의 대부 버질 아블로(Virgil Abloh)를 차례로 내세움으로써 모조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루이비통의 고유성인 다미에 패턴과 모노그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루이비통을 지탱하는 동력은 역사성과 아트 컬래버레이션이다. 킴 존스는 루이비통과 스트릿 브랜드 슈프림과의 협업을 선보이고 흑인 스트릿 패션 디자이너인 버질 아블로를 영입함으로써 파격 DNA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 3대 명품으로 꼽히는 에르메스, 샤넬, 루이뷔통 가운데 루이비통은 가장 대중성 있는 명품으로 꼽힌다. 루이비통은 기능성을 강조한 고급 트렁크 브랜드에서 출발해 자신만의 고유성을 만들어냈고, 베르나르 아르노의 심복 마크 제이콥스에 의해 루이비통은 예술을 담아내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또 하나의 자신 다움을 창조해냈다.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한 아이디어에서 탄생한 다미에 패턴과 모노그램은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아르노의 야망에 의해 가족경영은 막은 내렸지만, 루이비통은 오히려 이를 계기로 현대적 감성의 브랜드로 재탄생되었다. 정통성과 파격이 균형을 이룬 최초의 브랜드 루이비통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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