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존철학자 Sep 24. 2022

말싸움의 기술

4. 극단적 가정

 사람 관계를 지나치게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실수니까 한 번만 넘어가 줘.”이다. 그들은 ‘실수’라는 짧은 단어 하나로 자신의 과오를 말끔하게 덮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말에 보통의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첫 번째는 너의 그 실수가 첫 번째가 아니라며 너의 요구 자체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런 식으로 답하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를 넘어가 줘야 한다면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여도 실수니까 넘어가 줘야겠네.”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가정으로 상대의 과오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는 넘어가야 한다.’라는 말에는 그 한 번의 실수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범위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그 어떤 실수라도’라고 우리가 해석해도 사실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석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서 누가 봐도 아닌 상황을 제시하면 상대는 말을 잃기 마련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A : 나는 그의 곡을 표절하지 않았어. 곡 길이가 4분이 넘는데 20초 멜로디 라인이 비슷하다고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 아니야?     


 B : 그럼 그 20초에는 당신 곡의 클라이맥스를 완전 똑같이 넣어도 그 곡은 표절이 아니겠네요?     


 위 대화에서 표절 당사자는 ‘20초’라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 이에 상대는 그 20초라는 기준을 극단적으로 적용시켜 완전히 똑같은 음을 사용하는 상황을 제시했다. 이 상황은 누가 보기에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흔히 학계의 이론들이 이런 식으로 반박당하곤 한다. 학자가 제시한 이론이란 모름지기 모든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 하나의 반례를 꼬집어 짚어내 이론의 부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같은 원리를 무의식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기술이 바로 ‘역지사지’이다. 드라마에서 학교 폭력의 피해자 어머니가 학교를 방문해 일을 무마하려는 선생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바로 “당신 아들이 이렇게 맞고 와도 넘어가시게요?”이다. 물론 선생의 아들이 맞고 들어올 확률은 크지 않지만 그만한 확실한 공격이 있을까. 초등학교 주변 300미터에 설치한 어린이 보호구역인 ‘스쿨존’ 도입을 두고 양측이 논쟁한다고 가정하자. 만약 찬성 측이 “해마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학교 주변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당신 아이들이어도 스쿨존 도입에 반대하실 겁니까?”라는 말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극단적 가정이 가진 힘이다.   


 여기서 아까의 예를 비틀어 조금 더 생각을 넓혀보자.      


A : 나는 그의 곡을 표절하지 않았어. 곡 길이가 4분이 넘는데 20초 멜로디 라인이 비슷하다고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 아니야?     

B : 그럼 그 20초에는 당신 곡의 클라이맥스를 완전 똑같이 넣어도 그 곡은 표절이 아니겠네요?     

A : 완전히 똑같으면 안 되겠지.. 근데 나는 비슷하지 완전히 똑같지는 않잖아..     

B : 그럼 어느 정도 똑같아야 표절인가요선생님이 말씀대로라면 그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기준을 말씀해주세요.     


 때때로 나의 가정이 너무도 극단적이라며 상대가 반격을 가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때 나의 예가 극단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앞서 언급했지만 말싸움에 있어 해명과 설명을 요구하는 쪽이 승리한다. 대개의 경우 나의 요구에 상대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고 이 어눌함을 또다시 공격하면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곧 윤리의 기준이라는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에 다른 의견을 가진 짓궂은 학자들은 철도 위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갈래 길에는 한 명의 어린아이가 있을 때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핸들을 비틀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은 벌어질 일이 희박하지만 무고한 어린아이가 죽는 상황은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 다른 학자들은 무인도 고립된 사람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병든 노인을 살육해 먹으면 살 수 있다면 그래야 하는가를 묻기도 했다. 공리주의자의 입장이라면 적절한 대답을 내놓기 힘들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하는 어떤 철학자는 과학 기술이 발달해 뇌파를 조정해 우리의 감정을 극강의 행복으로 바꾸는 기술이 나온다면 그렇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물론 이런 기술이 발명될 확률은 희박하지만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모여 ‘인간’의 정의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철학자가 인간이란 다리가 가늘고 곧게 뻗어 있으며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털이 난 생물이라고 정의하자 동료들은 그의 견해에 수긍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음날. 어떤 철학자가 토론장에 닭 한 마리를 끌고 들어오며 “이게 인간이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가정은 유서 깊고 검증된 토론의 기술 중에 하나다. 때때로 짧은 가정 하나가 말싸움의 완전한 승리를 못 박을 강력한 한 방이 되기도 하니 기회가 될 때 연습해보자.         

작가의 이전글 말싸움의 기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