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8/8
취미가 꼭 글쓰기일 필요는 없다만, 내 취미가 글쓰기라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오늘 글 썼니?”
1. 업적 아니라 만족
잘 살아낸 하루는 무엇인가. 글 쓴 하루. 못 살아낸 하루는 무엇인가. 글을 쓰지 않은 하루. 내 경우엔 이렇다.
취미는 특기가 아니다. 특기라면 업적이 있어야 한다. 작은 퀘스트라도 '성공'한 기록이 있어야 특기가 된다. 취미는 그런거 없다. 내가 그것을 누릴 때 만족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취미도 자기계발해서 업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순수한 만족감이 파괴된다.
2. 취미의 조건: 충만감을 주는가
'킬링타임'라는 표현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무료한 인간은 시간을 때울 자극을 찾아 끊임없이 배회한다. 유튜브도 배회하고 넷플릭스도 배회하고 웹툰도 배회하고 새로 나온 게임도 살펴본다.
혹시 스마트폰 세계를 돌아다니는 활동이 당신에게 충만감을 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워서 빈둥거리는 활동이 당신에게 충만감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취미다.
내 경우엔 그렇게 살 때 존재가 썩어가는 것을 감지했다는 말 정도만 할 수 있겠다. 충만하지 않고 피폐해졌다. 인생이 풍성해지지 않고 쌜쭉해졌다. 시간을 그렇게 흘려보낼수록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은데' 하는 감각만 올라왔다.
충만감을 주는 무엇을 찾아 취미로 삼으려면 탐색이 필요하다. 막상 취미를 만들려니 돈도 많이 들 것 같고 알아볼 것도 많아 피곤하고 귀찮은 사람이라면 한 가지 추천해보려 한다.
바로 글쓰기다.
3. 글쓰기는 항해일지
글쓰기는 '업적'을 생각하면 절대 진입하지 못할 영역이다. 자격증이 있는 영역이 아닌데도 그렇다. 글쓰기의 유익을 다루는 책은 수만 가지가 있으나 나는 한가지 포커스에만 맞춰서 이야기하겠다.
글쓰기는 정신건강에 좋다. 내면에 차오르는 독을 빼내기에 글쓰기만한게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덮는다.' 유튜브를 보는 것도 그렇고 드라마를 보는 것도 그렇다. 다른 이야기와 이미지로 덮어씌움을 시도한다. 덮지 말고 쓰자. 써서 빼내자.
사람으로 인해 미칠듯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노트를 펼쳐 한 페이지 가득 욕을 적은 적이 몇 번 있다. 내면에 가득한 씨발스러움을 거르지 않고 종이에 빼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큰 사고 칠 것 같은 위기가 인생에 몇 번 있었다.
그렇게 적은 페이지는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다. 내가 다시 보는 것도 싫다. 부정적 기운이 가득한, 저주의 마법서같은 느낌이다.
링컨이었나 워싱턴이었나. 분명 유명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은 있는데 찾을 수가 없어 그냥 적는다. 적이 화나게 하는 편지(오늘날로 치면 악플)를 보내오면, 반박하는 답장을 썼다가 보내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둔다. 다음날이 되면? 꺼내서 벽난로에 넣어 태워버렸다.
집에 벽난로가 없어 찢어 없애는 걸로 프로세스를 대체했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어 버리곤 했다. 세절기로 하지 않고 손으로 박박 찢었다. 종이를 찢는 행동에는 일종의 정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찢으면서 스트레스가 풀린다.
일단 종이 위로 분출된 압력은, 압력솥이 터지는 대형 사고를 막아준다.
정신 건강을 위해, 하루 한 줄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종이 위로 옮겨보는 것을 추천한다. ‘오늘은 힘들었다.’ 이렇게 일곱 글자만으로도 충분하다. 에너지가 조금 있는 날이면 ‘오늘은 즐거웠다.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한 단락 정도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풍랑 잔잔한 날은 잘 없고, 거친 바다와 파도가 나를 괴롭힌다. 항해 일지를 쓴다고 생각하고 기록해보자. 분명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4. 이순신의 난중일기
이 분야의 최고봉은 이순신 장군이 남긴 난중일기다. 먹을 갈고 붓을 다듬어 써야했던 시절, 전쟁으로 바빠 미쳐 돌아가실 장군이 하루 한 줄이라도 남긴 기록의 시간을 생각한다.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1258
난중일기를 보고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한 줄짜리 일기가 많다는 것이었다. 하나 옮겨본다.
1월 4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게 전부다. 어느 날의 일기는 아주 길지만, 이렇게 짧은 한 줄짜리 일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생이 전쟁 같고 지랄 맞을 때, 한 줄 일기라도 쓰는 행위는 우리 마음을 지탱해준다. 이순신 장군도 그렇게 마음을 지켰던 것 같다.
글쓰기가, 일기 쓰기가 화창하고 행복한 날의 깊은 충만감은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다만, 잠깐이나마 주어진 시간을 다른 것들로 채웠을 때와 비교해보면 좋겠다. 이순신 장군이 짬날 때마다 술을 마셨다면 어땠을까? SNS를 했다면? 게임을 했다면? 유튜브만 봤다면?
적어도 글쓰기는 인간을 피폐하게 하지는 않는다. 힘든 시기의 글쓰기일수록 인간을 지탱해준다. 빅터 프랭클은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죽음의 수용소에서’ 견딜 수 있었다.
평온할 때 글쓰기가 +20의 버프를 준다면, 삶이 엉망일 때는 -20이 될 것을 -2로 막아주는 게 글쓰기의 힘이다.
글을 써보라고, 당신에게 권유하고 싶었다. 와닿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충만하게 하는 즐거운 무엇을 부디 찾아내길 바란다.
그것을 매일 하기를. 그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사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을 죽이는 것들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고 살려내는 그 무엇을 말이다.
좋아하는 그것을 소중히 즐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