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써낸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글입니다.
"내 과자!!!!!!!!!!!!!! 끼야야야약!!!!!!!!!!!"
길에서 이렇게 큰 아이 비명 소리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봤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자전거를 타고 브레이크를 잡으며 내리막을 가고 있었고 그 소리는 약 20m 앞에서 났다. 그리고 어떤 아이가 미친듯이 내리막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이상한 아인가? 싶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가는 것이었다.
브레이크를 잡으며 내려가는 중이었다고 해도, 내리막 자전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저렇게 빠른 달리기 실력도 정말 오랜만에 봤다. 시끄러운 소리를 계속 내면서 가는지라,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질때마다 (자전거 브레이크를 잡고 내려가다 놓고 내려가다 하니까)
저 앞에 가는 다른 아이들이 친구이고, 개네가 장난친다고 과자 들고 간건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됐다. 벌써 200m쯤 뛰고 있다.
뭐 그러던지 말던지. 갈 길이 바빠서 지나치려는데 아이가 더 못뛰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딱 지나치려는 찰나, 아이가 주저앉는다. 대성통곡 할 기세다.
이 광경부터 봤으면 그냥 지나쳤으련만, 나는 기승전결 서사구조에서 대략 기의 끝 - 승의 시작 정도를 본 셈이었다. 주변에 지나가는 어른들이 꽤 있었지만, 아이가 왜 우는지, 왜 뛰었는지,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없을 테니까.
하아.
딱 옆에서 자전거를 멈췄다. 아이는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토해내기 직전이었다. 울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내가 다정한 목소리의 말투의 캐릭터였다면 분명 대성통곡을 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아이도 직감했으리라. 이 사람은 도와줄 것 같긴 한데, 울면서 말하면 진짜 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직감 말이다.
나는 숨기지 않고 그런 기운을 잔뜩 풍기며, "울지 말고 말해, 안 그러면 나 간다."고 말했고, 아이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마침 눈에 보이는 건물 1층은 빈 상가였고 벤치처럼 걸터앉을 수 있는 턱이 높게 있었다. 자전거를 놓고, 아이와 털퍼덕 앉아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들었다.
아이가 처음에 말한 것은 누가 자기 지갑을 훔쳐갔다는 식이었는데, 진정시키고 천천히 들어보니 아니었다. 마을버스에서 내릴 때 지갑을 놓고 내린 것이었다. 과자가 아니라 지갑이었다. 내가 처음에 잘못 들었거나, 아이가 정신이 없어 지갑이라고 외쳤거나.
아이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야 했고, 지갑이 없으면 거기까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에 미친듯이 달려간 것이었다. 넘어졌으면 아마 몸이 아작날 속도로.
"그래, 핸드폰은 있고?"
"네. 근데 예수님께 미사 드리러 가야 하는데" (또 울라함)
(단호) "너가 정해, 지갑 찾는게 먼저야 미사 가는게 먼저야."
1초 정도 생각하더니 지갑이라 한다.
"그럼 미사는 못갈 수도 있는거다?"
끄덕끄덕.
아이 목에 걸린 작은 가방안에 핸드폰이 있었다. 일단 다행. 잃어버린 건 지갑 뿐인 것 같다.
버스 번호를 물어보니 서초 13번이라 한다. 내린 정류장을 물어보니 ㅇㅇ성당 앞이라 한다.
"자 그럼 아저씨가 버스 회사에 전화해서 찾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께. 알았지?"
아이 손에 환타가 있었다. "이거 마시고 있어." (사준 줄)
서초 13번을 운영하는 버스 회사를 검색해서 찾을 정신이 없어서. 다산 120으로 전화했다. (박원순 칭찬한다) 120 콜센터 직원은 사연을 듣고 금세 찾아 문자로 번호를 줬다.
"어떻게 됐어요?"
"지금 다산 120센터 전화해서 버스회사 번호 물어봤고, 문자가 오면 거기로 전화해보면 돼."
문자가 바로 안온다. 내가 살짝 초조해질라 한다.
"몇학년이야."
"초등학교 6학년이요."
"이름은 뭐고."
"ㅇㅇㅇ"(까먹음)
이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왔다. 이 아주머니도 나처럼 기-승을 본 분이었다. 아이와 나의 대화를 들으며 상황파악을 하시더니
"아줌마도 성당 가는데."
라고 한다. 나는 문자가 왔길래 ㅇㅇ운수로 전화를 건다. 상황을 말하고 얘기를 들어보니 운행중인 버스에서 기사가 그거 찾을 세는 없고, 차고지에는 몇바퀴 더 돌고 12시 넘어서 들어온다고 한다. 내일 아침 9시 넘어 전화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단다. 오케이.
전화를 끊고 보니 그사이에 아주머니가 아이 할머니와 통화해서 자초지종을 전달했고, 할머니가 이리로 온다는 것 같다. 아이는 할머니랑 산다고 했다.
아이에게 통화 내용을 설명해주고 내일 학교 가서 선생님한테 허락 받고 전화해보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문자로 보내줬다. 아이를 보내기 전에 꼰대짓 (초등학생과 20살 차이나는 성인 대화여도 누군가에겐 꼰대짓)을 좀 했다.
"아까 울고 주저앉으려고 했잖아. 그치?"
"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돼 안돼."
"안 돼요."
"물론 너가 울면서 뛰어서 내가 널 도와주러 온거겠지만..."
잠깐 표정을 봤다. 잘 알아듣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럴 때 어떻해야겠어. 생각!해봐."
아이가 잠깐 생각한다.
"음, 주변의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해야 해요."
"주변에 아무도 없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음..." (생각은 하는데 막혔다)
"경찰서 가서 상황을 말하고 도와달라 하면 돼."
"그렇지만 이 주변엔 경찰서가 없는 걸요."
'맞는 말이네.' (이자식 똑똑하네? 그치만 티안내고)
"그러면,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한테라도 말할 수 있겠지?"
"네."
"중요한건 이럴 때 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야 해. 그리고, 이건 정확히 하자. 버스 기사 아저씨가 훔쳐간 게 아니라 너가 놓고 내린거지? (아이가 끄덕끄덕) 다음에 이런 일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어떤 말은, 내가 남에게 해주는 말이어도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마치 신이 나의 입을 빌어 내게 말하는 것처럼. 이 순간 나는 그것을 느꼈다.
"내리기 전에 잘 확인해볼래요."
"그래. 이제 괜찮아졌어?"
눈물 싹 가셨다. 처음에 울음 멈췄을 때부터 눈빛에서 느꼈는데, 용감한 아이다. (그러니까 그 내리막을 그렇게 달리지. 성인이 그렇게 달리면 무릎 아작난다.)
"할머니가 이리로 오신다고?"
"저랑 성당에 가서 만나기로 했어요."
아주머니가 말한다.
('휴, 아주머니한테 맡기고 갈길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아주머니가 이어 말한다)
"천사같은 아저씨 만나서 다행이네."
'천사는요. 애가 주저앉지만 않았어도 저는 백퍼 지나쳤어요. 백퍼'
"가, 조심히 가, 무슨 일 있으면 문자해. 아저씨 담배좀 핀다."
아이는 씩씩하게 일어나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2019. 6. 11
어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