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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글을 오독할 여지를 제거하려 한다. '게임 = 나쁜 것', '게임 = 악한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내면의 나침반'을 분명히 외면한 지점을 기록하고 싶을 뿐이다.
이른 새벽, 혹은 아침에 가족들이 출근준비하는 인기척이 들릴 때 잠자리에 들었다. 그들이 한참 일할 시간에 눈을 떴다. 그들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방문을 걸어 잠궜다. 그들이 잠든 시간, 게임을 했다.
직업이 인터넷 방송인이었다면 적성을 찾은 것이겠지만, 나는 그저 게임으로 도피했을 뿐이다. 의식이 있을 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 나를 격추시키고 무릎꿇렸지만, 거기 엎어져 있던 것은 나였다.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널부러진 상태'에 나를 밀어 넣은 것? 나다. 남탓 하고 싶지 않다.
현실세계에 부딪힐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인생에서 완전히 패배했다고 느꼈다. 객관적으로 처절한 패배 맞았다. 건강, 꿈, 관계, 사랑, 돈, 당시의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절망과 비관 뿐이었다.
게임에서는 몬스터 한 마리 잡는 순간, 경험치가 얼마나 올랐는지 보인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게임 속 즉각적인 가짜 보상에서 도파민을 찾는 중독자가 되었다. 폐허가 된 현실을 복구하는데 사용했어야 할 노력을 게임 속 세계에 꼬라박았다.
그때 내가 열심히 했던 게임은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하 히오스)이다. 게임 제작 회사 ‘블리자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한 곳에 모여 승부를 벌이는 게임이다. 수십 개의 캐릭터가 있다. '캐릭터 레벨'은 한 게임 끝날 때마다 경험치가 쌓인만큼 올라간다.
처음에는 한 게임만 해도 레벨이 오르지만 나중엔 수십 판을 해도 올리기 어렵다. 히오스에 있는 수십 개의 캐릭터를 전부 5레벨 이상까지 올렸다. 좋아하는 캐릭터는 몇십 레벨까지 올렸다. 캐릭터별 레벨을 전부 더한 값이 '유저 레벨’인데, 1,000렙에 도달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게임에 쓴 걸까.
처음에는 재밌어서 했지만 나중에는 레벨 올리는 재미로 했다. 게임은 성취감을 줄 수 있도록 보상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레벨 시스템과 그에 따른 부산물이 그렇다. 레벨업 때마다 주는 상자를 열어 캐릭터 스킨을 꾸밀 수 있다. 골드를 모아 아이템을 살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그렇게 나를 갈아넣어도 보상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게임 속 보상에 중독됐다.
눈이 뻑뻑하게 지칠 때까지 게임을 했다. 컴퓨터를 끄는 순간 모두 사라지는 허무한 신기루 임을 알면서도. 리니지처럼 돈되는 게임도 있지만 히오스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가족들이 출근준비하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껐다. 눈감고 잠 청하려 누우면, 몰려오는 자괴감은 거대했다.
’난 쓰레기구나······.’
하루 중 내면의 나침반이 작동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는 말처럼, 마음이 말을 걸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고.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때뿐이었다. 이런 생활을 대략 8개월 동안 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더 오랜 기간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평생 그렇게 살다 현실의 삶은 핵폭탄 맞은 것처럼 파괴되어있는 것을 깨달으며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끗 차이로 살아남았을 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게임이 문제가 아니다. 인생을 삼키는 화마는 사람의 성향과 기호에 따라 도박일 수도 있고, 쇼핑일 수도 있으며, 코인이나 주식은 당연하고, 돈 그 자체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내 경우에 그것이 게임이었을 뿐이다.
게임도 재미를 주는,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활용하면 좋은 것이 된다. 돈벌고 일하는 것도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다. 주객이 전도되면 돈 벌고 일하느라 삶이 피폐해진다.
정작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놓치면 안 된다. 건강과, 가족과의 유대감 같은 것.
예수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00억이 있어도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일까? 일을 아무리 잘해도 유의미한 관계가 없는 인생은 얼마나 공허할까? 그런 삶의 끝은 사치와 향락, 권태감에 젖은 시간뿐이다.
게임 속 세계로 도피하는 것은 우울증 상태에서 시작됐다. 시작은 분명 외부로부터 쌓인 나쁜 것들로 인한 침체였다.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분명 내가 내 삶을 내팽개쳤다. 칼로 자르듯이 명확히 ‘여기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스스로 인생을 저열한 것으로 만들었다. 미끄러져 구정물 속에 들어갔지만, 나올 생각 않고 그 안에서 뒹구는 돼지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이유로 브런치 연재할 때 제목을 <쓰레기부터 정상인까지>라고 잡았다. 자기비하가 아닌 지난 날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다.
원래 생각하던 제목 중 <심해에서 해변까지>도 있다. 심해는 우울증 상태, 혹은 인생의 나락으로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해변은 건강을 잃지 않은 정상인들이 사는 곳이다. 헤엄치고 때때로 비치발리볼도 하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영역을 의미한다. 표지 디자인에 그때 그린 모티브 이미지를 반영했다.
이것은 분명 내가 살았던 어두운 시절을 묘사하는 하나의 그림이다. 그러나 여기, 한 겹이 더 있다. 자기기만의 껍질을 벗기고 들어가야 한다.
모든 것을 남 탓하면 많은 것이 쉽게 해결된다. 그게 가장 쉽다. 하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내가 만들어낸 지옥이 있었다. 그곳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 아주 강한 의지로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 부끄럽지만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지드래곤이 불러 너무 아이러니한 노래지만(자연인 권지용의 내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루저'라는 곡이 있다. 곡의 초입 가사는 이렇다.
'루저. 외톨이. 상처뿐인 겁쟁이. 못된 양아치. 거울 속의 나.'
나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종합하면 '쓰레기같은' 인간. 그 시절의 나는 쓰레기였다.
누군가가 "난 쓰레기야.." 같은 말을 할 때 "네 탓이 아니야.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고 말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그걸 알면서 계속 그러고 있어? 정신차려 이 인간아." 라고 해줘야 할 때도 있다.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 나는 후자의 말이 더 필요했다.
부록 : '내면의 나침반'에 대하여
이 부분은 잘 안 읽히면 스킵해도 좋다.
무엇의 좋고 나쁨은 가르는 기준은 삶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아니면 피폐하게 하는가.?
신경계가 무너지면 감각이 고장 난다. 고장난 사람일수록 내면의 나침반을 무시한다.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전통과 교육의 산물, 헛소리라며 일축한다.
법이 없으면 다들 야만인으로 돌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대체로' 맞는 말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전부 야성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순간의 기록을 살펴보면 영화 속 이야기가 더 허구 같을 정도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어보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은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다.
동물과 비교해보자. 내면의 나침반이 더 명확히 보인다. 사바나 초원에 사는 코끼리, 사자, 코뿔소는 물론, 유전학적으로 인간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도 오직 본능대로 산다. 제일 힘세고 우월한 수컷이 모든 암컷을 독차지한다. 반항하는 수컷을 때려죽이는 것? 당연하다.
반란이 일어나긴 하지만, 반란으로 왕좌를 차지한 수컷이 공화제를 만들고 삼권분립을 설계하는 일 따위? 없다. 본능을 따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지능이 없는 게 아니다. 이성의 쓰임새가 인간과 다르다. 원숭이도 개도 자신의 지성을 총동원하여 본능의 하인으로 삼는다.
인간에게는 '아,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라는 내면의 나침반이 심겨있다. 이걸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다.
측은지심은 남의 불행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겨울철 빙판길에 미끄러져 심하게 아파하는 사람을 보고 낄낄대는 사람은 무언가 섬뜩하게 느껴진다.
수오지심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다.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뻔뻔하게 구는 사람의 비율이 높은 사회일수록, 선량한 사람들이 손해보고 고통받는다. 이른바 ‘조별과제 잔혹사’를 생각해 보자.
역할을 나눴는데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조원들이 다 안해온 상황. 넷 중 둘은 미안해하고 민망해 한다. 다른 둘은 그런 기색 없이 오히려 뻔뻔하다. 앞의 둘은 그래도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다른 둘에게는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니네가 사람이냐?"라는 말이 나온다.
'윤리'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한복 입은 도덕 선생님이 생각나며, 알레르기를 일으킬 사람이 많기에 이제야 이 단어를 쓴다.
참으로 희한하게 인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문명마다 공통적으로 '윤리'라고 일컫는 요소가 발견된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느니,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느니, 거짓말하지 말라느니 하는 것들이다. 이런 윤리 지침이 규범화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당연시되고, 서로 물건을 훔치는 게 이상하지 않다면?
말과 피부색이 다른 타 부족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속이는게 당연하다면? 그곳이 바로 인세지옥이다. 모두가 피폐해지고 괴로워진다.
인류 역사에는 각성의 순간들이 있다. 먼저 깊이 고민한 개인이 깨닫고 전파한다. 그를 통해 집단적 학습이 이루어진다. 이후 사회적 합의를 거쳐 '그러지 않기로' 약속한다. 약속을 지킬 사람은 무리에 받아들이고,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무리의 이름으로 처형하거나 무리 밖으로 쫓아낸다.
고대에는 추방형이 많다. 당시 추방은 사실상의 처형이다.
약속을 지키는 무리는 융성한다. 그들의 삶은 풍성해진다. 옆에 사는 사람이 나를 속이고, 내 것을 훔치고, 내가 자고 있을 때 나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에서만 대규모의 협력이 가능하다.
가족 빼고 아무도, 심지어 가족조차 믿지 못할 집단은 신뢰 사회로 발돋움할 수 없다. 가만히 두면 자기들끼리 자멸한다. 항상 불안과 긴장과 배신과 음모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일수록 강자가 공포로 지배하는 구조가 된다.
이 안에서는 충성 경쟁이 일어나는 한편, 강자를 제거하기 위한 속임수가 횡행한다. 괜히 고대 왕들이 밥 먹기 전에 독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무엇이, 이런 것들을 당연하지 않은 세상으로 바꾸어 왔다. 나는 그것을 '내면의 나침반'이라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