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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Oct 21. 2021

내 가족같은? 내가 족 같은?

영원히 ‘네’ 이야기로 남아야 할 이야기

“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짙은 네이비색 슈트에 노란 넥타이, 갈색 페니 로퍼 차림의 젊은 청년이 뚜벅뚜벅 면접실로 걸어 들어가요. 그래요, 철용이에요. 다시 일을 하기 위해 학원에 면접을 보러 왔어요.


“곽철용 씨? 스펙이 대단하시네요, 영어 공인점수도 있으시고…”


   면접관은 갑자기 말을 흐려요. 생글생글 웃던 철용이 얼굴도 갑자기 굳어져요. ‘다년간의 과외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는 자소서 속 문장은 ‘그래서 학원에서 일한 경력은?’이라는 질문 앞에 없던 것이 되어 버려요.


“그래요, 뭐… 우리가 경력직만 뽑는 건 아니니까. 이번 주 내로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벌써 비슷한 말을 열 번은 더 들은 것 같아요. 이쯤 되면 나를 면접 본 저 사람들은 학원 원장이 아니라, 앵무새가 분명해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똑같은 말을 내뱉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철용아, 그동안 고생했으면 됐지… 우선은 내려와서 좀 쉬는 게 어떻겠니?”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철용이에게 고향 집으로 내려와서 쉬라고 말해요. 철용이는 내심 그 말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대로 가면 실패한 시람으로 낙인찍힐 것 같아 아직 좀 더 있어보겠다고 튕겨요.


‘죄송하지만, 귀하를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나은 곳에서 꿈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더 좋은 기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문자는 비슷비슷해요. 그러고 보니 말뿐만 아니라 문자도 어디서 다 긁어서 붙여 넣기 하는 게 틀림없어요. 아니, 세상에 죄송할 짓은 왜 하나요? 보다 나은 곳을 원했으면 너네 회사에는 왜 면접을 봤게요? 더 좋은 기회?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어요.


“으아 씨* 인생 @같네, 진짜!!”


   석사까지 부지런히 공부했는데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에 화가 난 걸까요? 철용이는 냅다 욕을 하며 홧김에 핸드폰을 집어던져요. 와중에 할부가 남은 건 기가 막히게 기억했는지, 흔들리지 않는 편안한 침대에 살포시 던져요.


‘띠링!’


   어라? 문자가 왔나 봐요. 얼른 확인해보니, 합격 문자… 가 아니라 대학교 동기 J였어요. ‘철용아, 나 J다. 어떻게 지내?’ 하는 문자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냅다 전화를 걸어요.


“아 그래, 많이 힘들겠다… 그럼 계속 일 구하는 거야?”


   철용이는 대학생 시절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내 이야기를 공감해주고 같이 욕해주는 J에게 위로를 받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J가 잘 되었다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겠어요?


“진짜 가족 같은 분위기라니까? 너 그리고 전부터 애기들 좋아했잖아!”


   J는 철용이에게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보지 않겠냐고 물었어요. J의 어머니가 원장님으로 계신 곳이었지요.


   철용이는 대학생 시절 가끔 봤던 J의 부모님이 떠올랐어요. 근엄하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아버지, 늘 상냥한 미소를 띠셨던 어머니가 생각났어요. ‘그래, 좋아!’ 철용이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이야기했어요.


“응, 면접은 언제 보러 가면 되니? 필요한 서류는?”


   J는 철용이의 말에 그런 것 필요 없으니 그냥 너 편할 때 미리 연락 달라며 이야기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어요. 철용이는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 생각했어요.


“응, 엄마. 방금 통화했어요. 철용이? 좋은 애예요. 엄마가 하는 유치원도 가족 같은 유치원이니까, 잘 됐지. 응, 끊어요.”


J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는 유치원은 정말 ‘내 가족 같은’ 유치원이었을까요? 아니면 ‘내가 족 같은’ 유치원이었을까요? 철용이는 거기서 적응을 잘했을까요? 이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여러분께 맡기며 비정규직 철용이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공동 매거진? 그게 뭐야?”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브런치 작가 활동을 하던 후배가 ‘이번에 공동 매거진을 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더군요.


   부러웠습니다. 공동 매거진은 그야말로 ‘공동’이라서 아이디어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사람을 모은다 한들 모두의 노력 없이는 제대로 마무리될 리 없었기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어느 것 하나 혼자 한 것이 없네요. 이 매거진의 메인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신 클러치타임 작가님, 공동 매거진의 대장 역할을 해주시며 이끌어주신 음감 작가님, 우리 모두가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단톡방에서 프로 응원러가 되어주신 자전거 탄 달팽이 작가님까지, 모두가 계셔서 ‘공동’ 매거진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눈치 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철용이의 서사는 공통된 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작가의 부족함으로 인해 각색과 게재를 허락해주신 지인들의 경험이 제대로 다 녹아들지 못한 것 같아 감사와 더불어 송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모두의 작품, 비정규직 잔혹동화를 구독, 라이킷, 댓글, 공감으로 응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텍스트는 작가로부터 태어나지만, 독자에게 닿을  비로소 의미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빚은 글에 생명을 넣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한 마음을 거듭 전합니다.


   부디 바라기는 비정규직 잔혹동화라는 텍스트가 여러분에게는 ‘너’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비정규직이라는 이슈는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라고 해서 이것이 가치가 떨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 신부이지 시인이었던 John Donne이 쓴 기도문에 나온 것처럼,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전체의 한 부분’입니다. ‘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너’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세계는 ‘너와 나’ 두 존재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태어납니다.


   이런 점에서 비정규직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대신 ‘네’ 이야기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만 생각하고 ‘나’만을 위하는 ‘나나 랜드’ 같은 세상 속에서 ‘너’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하나쯤 있어도 좋겠지요.


   그러니 저는 오늘 마치는 철용이의 이야기가, 또 저희가 쓴 비정규직 잔혹동화가 ‘내’ 이야기 대신 영원히 ‘네’ 이야기로 남기를 바랍니다. 나와 너, 너와 나가 함께 어우러질 때 진정한 우리, 더 나은 우리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만을 이야기하는 세상에 너의 이야기를 슬며시 끼워 넣으며 쓰는 인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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