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아이고! 속상해라. 아이고, 원통해라!”
어느 산골 외딴집에 혼자 팥 밭을 일구며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이미 10월 말이 되어 밭에는 속이 꽉 찬 팥들이 익어 가는데 웬일인지 할머니는 원통하다며 통곡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할멈, 무슨 일 있소?”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건, 밤나무에서 툭 떨어진 잘생긴 알밤이었다. 알밤의 물음에 할머니는 뺨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사연인즉, 올봄에 갑자기 호랑이가 집으로 찾아와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가을에 팥을 거둬 팥죽이라도 쑤어놓거든 그때 잡아먹으라’고 대꾸했다는 거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고, 며칠 전 호랑이가 찾아와 ‘이제 때가 되었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고 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생각에 할머니는 서럽고 무서워 하루하루 엉엉 울며 보내고 있었던 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알밤은 ‘팥죽 한 그릇만 주면 못된 호랑이를 혼내주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얼른 가마솥에 팥죽을 쑤었고, 큰 대접에 가득 팥죽을 담아 알밤에게 주었다. 할머니가 쑨 죽을 맛있게 먹은 알밤은 아궁이 속에 쏙 숨었다. 할머니는 자기 일 인양 도와주겠다는 알밤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작은 알밤이 집채만 한 호랑이를 어떻게 혼내준다는 건지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한숨을 쉬는 할머니 앞에 이번에는 자라와 쇠똥과 송곳이 순서대로 찾아와 ‘팥죽 한 그릇만 주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전 배고파 찾아온 녀석들이나 배부르게 먹일 심산으로 팥죽을 듬뿍 퍼 담아 주었다.
“아니, 이만하면 됐어요!”
허겁지겁 그릇을 비우는 모습에 할머니는 흐뭇해져 더 주려고 솥을 열었지만, 녀석들은 모두 손 사레를 치며, 배부르다고 말했다. 그렇게 팥죽을 양껏 먹고 난 뒤 송곳은 부엌문 옆에, 자라는 물 단지 속에, 쇠똥은 그 밑에 숨었다.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져 가고, 할머니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서러워 다시 펑펑 울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번에는 절구와 지게와 멍석이 할머니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고 말을 건다.
이제는 별말도 없이 곧장 바가지를 들고 솥뚜껑을 연다. 펄펄 김이 나는 팥죽을 잔뜩 퍼 담아내어 준다. 다들 참 맛깔나게 먹는다. 그러고 나서는 멍석은 부엌문 앞에, 절구는 문 뒤에, 지게는 감나무 옆에 숨어 호랑이를 기다린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는 일이 없다. 할머니의 말처럼, 해가 지고 산속에 어둠이 깔리자, 달님과 함께 호랑이가 우악스러운 대가리를 쓰윽 내민다. 녀석은 추운 가을밤 날씨에 덜덜 떨며 할머니를 부른다.
“여봐, 할멈! 할멈? 약속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태연한 척 가슴을 부여잡고, ‘가을밤은 원래 추운 법이니, 아궁이에 가서 불이나 쬐고 난 뒤에 잡아먹으라’고 말을 건넸다. 호랑이는 삐죽삐죽 난 이빨을 드러내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아궁이 앞에 호랑이는 털썩 주저앉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아궁이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호랑이의 오른쪽 눈을 딱 때렸다. 알밤이었다.
“이게 뭐야!”
뜨거운 알밤에 맞아 데인 눈을 식히려는 호랑이의 왼쪽 눈에 물 단지가 보였다. 냉큼 달려가 바가지로 물을 푸려는데, 그 순간 물 단지 속에 있던 자라가 호랑이의 손을 온 힘을 다해 콱 물어버렸다.
깜짝 놀란 호랑이는 물 단지 아래 쇠똥을 보지 못하고 그만 밟아버렸고, 그 순간 쭉 미끄러지고 말았다. 알밤에, 자라에, 쇠똥에.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호랑이는 겁을 잔뜩 먹고 부엌 문쪽으로 달아났다.
“으아악!”
그때 부엌문 옆에 있던 송곳이 호랑이의 엉덩이를 푹 찔렀다. 호랑이는 너무 아팠던 나머지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때마침 문 뒤에서 기다리던 절구가 호랑이 머리를 세게 후려쳤고, 호랑이는 영락없이 멍석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멍석이 호랑이를 둘둘 말아 꼼짝 못 하게 만들자, 지게는 호랑이를 들춰 업고 연못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는 호랑이를 빠뜨렸다. 그렇게 하고 난 뒤 모두 함께 집에 와서 팥죽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호랑이 걱정 없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한국 전래동화 중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
“어, 어디 다녀오세요?”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영어학원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이었으니, 저녁 8시 30분쯤이었겠다. 집으로 귀가하시던 아버지를 만나 차에 타고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본래 6시면 집에 들어오셨던 터라, 야근을 하신 줄 알았더니, 아니란다.
“아, 그랬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동네 최 씨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다녀오시는 길이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옆 동네 어른들까지 조문을 오셔서 빈소는 그야말로 빈틈이 없었다고 했다.
“아마 영희 어머니 때문이겠지...”
조수석에 타고 계시던 어머니는 ‘영희 어머니를 생각해서 조문하러 오신 분들이 많았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영희 어머니는 돌아가신 최 씨 아저씨의 아내 되시는 분이셨다. 벼농사를 크게 하시던 최 씨 아저씨와 함께 밭을 일궈 여러 채소를 기르셨는데, 수확 철이 되면 우리 동네는 물론이고, 옆 동네까지 다니시며 집집마다 애호박이며, 가지 같은 걸 나눠주곤 하셨다.
어쩌면 그 많은 사람들은 평소 영희 어머니께 이것저것 받은 것이 고마워 작은 위로라도 되고픈 마음에 빈소를 채우지 않았을까? 팥죽 할머니가 무서운 호랑이를 피해 갈 수 있었던 이유도 비슷해 보인다.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협동이다. 알밤이며, 자라, 쇠똥과 송곳, 절구, 멍석, 지게까지 모두 하나로 힘을 모았기 때문에 호랑이를 물리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들은 힘을 합쳤을까? 서로 다 달라 보였지만, 딱 하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할머니에게 팥죽 한 그릇씩 대접받았다는 거다.
만약 팥죽 할머니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팥죽 한 그릇을 주지 않았다면 할머니는 호랑이에게 그대로 화를 입고 말았을 거다. 영희 어머니가 우리 동네 사람들은 물론, 건너 마을에서까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건, 팥죽 할머니가 호랑이로부터 살 수 있었던 건 마음이 담긴 채소와 팥죽을 건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덕은 헛된 메아리가 아니라’는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Friedrich von Schiller의 말을 기억하며 이웃에게 팥죽 한 그릇과 같은, 채소 몇 개와 같은 작은 덕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덕은 언젠가 꼭 필요할 때 메아리가 되돌아오듯, 나에게 되돌아 올 테니까. 잘하면,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