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아이 씨, 싫어. 나 안 해!“ 적어도 다섯 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특전대’ ‘00 레인저’ ‘00 포스’ 이름은 좀 달랐지만, 알록달록 쫄쫄이를 입고 악의 무리를 물리쳤던 지구 용사들 말이다.
아이들은 뭔가를 모방하면서 자기 세상을 만들어 가고, 성장한다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내 어린 시절이 그랬다. 문제는, 모두가 다 빨갱이(아, 단어 선택을 잘못한 걸까?)가 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남자애가 핑크나 옐로가 되는 날에는 더 심각했다. 레드는 못해도, 적어도 블루, 아니면 그린. 아니, ‘핑크가 되느니 차라리 블랙이 낫다‘며 소리 지르고 나간 그 친구는 ‘남자는 자고로 핑크’라는 말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 차라리 마녀가 낫지 난쟁이가 뭐냐고!“ 조금 더 시간을 앞으로 당겨서 유치원 다녔을 때였던 것 같다.(아닐지도 모른다. 내 기억력은 그렇게 좋지 않다.) 부모님을 모시고 하는 발표회에서 ‘백설공주’를 하기로 했다.
‘일방적으로 선택하면 남는 역할이 있으니 선생님이 정해주겠다’며 파란 반 선생님은 구구절절 설명했다. 배역을 나누다 보니 어떤 여자 아이에게 ‘난쟁이 3‘ 역할이 갔다. 백설공주 역할을 하게 된 아이는 싱글벙글했지만, 이내 왕자 흉내를 내야 할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는 대성통곡했다.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매직포스 합체!‘를 외치는 새빨간 레드. 사과를 조신하게 들고서는 한입 깨물고 이내 픽 쓰러지는 새 하얀 얼굴의 공주를 꿈꾸는 것이 우리다.
아, 그게 벌써 몇 살 때 이야기냐고? 아니, ‘픽 미 픽 미’는 아니더라도,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목 놓아 부르던 101명의 오빠들을 잊어버렸나? 그럴 줄 알고, 다른 오빠들을 데리고 왔다. 아, 오빠가 아니라 이제는 할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마라. 노병들의 칼은 아직 날카로우니까.
그래, 치열한 전쟁터에서 각자 ‘주인공은 나야 나!‘ 아직도 독자들에게 귀 따갑게 외쳐대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계속해 볼 작정이다.
“대체 왜!“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상황에 걸맞은 표현 같다. 올림포스 산의 그 광경을 인간이 보았다면, 분명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번개의 신이자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는 신의 음료 ‘넥타르’를 마시며 한가롭게 트로이를 관망하는 신들 사이로 헤라의 화를 돋우고자 일부러 더 크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 탐욕스러운 여신 그대 헤라여, 왜 트로이를 파괴 못해 안달이 났소? 프리아모스와 그의 아들들, 트로이 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싶다면 좋소. 맘대로 하시오. 그러나, 그대가 사랑하는 그 도시들을 내 손으로 파괴하려고 손을 뻗을 그때는 그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프리아모스의 도시는 나를 찬양하며 재물을 늘 많이 바쳤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황소 눈의 여신은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좋아요, 나는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그리고 미케네를 사랑하지요. 이 도시가 당신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시거든, 그대 신들의 아버지여. 누가 당신을 막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나 역시 당신처럼 크로노스의 딸. 모든 불멸의 신들을 다스리는 바로 당신의 아내이기에 적지 않은 신들이 나를 따를 것입니다. 자, 그러니 어서 아테나에게 ‘트로이 인들이 맹세를 깨뜨리고 그리스 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어라’ 명령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윽고 신들의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테나는 올림포스 산에서 병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수많은 트로이 병사들 속에서 판다로스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테나는 침착하게, 그러나 거침없는 물처럼 그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였다. “아, 그대 긍지 높은 뤼카온의 아들아. 활쏘기의 명수여, 이제 화살을 날려 메넬라오스를 쓰러뜨려라. 그러면 파리스가 너에게 가장 큰 감사를 말할 것이다. 트로이가 온 입을 모아 그대를 칭송하겠지.“ 그때 우둔한 판다로스의 영웅심이 불타올랐다. 손은 지체하지 않고 화살을 활시위에 두었다. 명궁의 신 아폴론에게 ‘훌륭한 재물을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활시위를 당겼다 놓자, 이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메넬라오스를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하지만, 신들은 메넬라오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테나는 아주 가까스로 화살이 표적을 비껴가게 했다. “아, 사랑하는 나의 동생아, (실제로 아가멤논은 메넬라오스와 형제지간이다.) 너 혼자 싸우게 하여 내가 너를 죽음으로 내몰뻔하였다! 트로이 인들을 봐라, 손바닥 뒤집듯 딴 말을 지껄이는 저들을 반드시 신들께서 벌하실 것이다.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 역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와낙스가 이렇게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빗나갔다’ 곤 했지만, 사실 지금 메넬라오스의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다리, 발목이 자기 피로 붉게 물들었거든. 아가멤논은 다급한 목소리로 자기 동생을 치료할 믿음직한 사내,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 마카온을 데리고 오라고 소리쳤다.
어느새 병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마카온은 주저함 없이 화살을 뽑아냈다. 상처 난 곳의 피를 빨아냈다. 고통을 없애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들이 부상병을 돌보는 동안 아가멤논은 병사들 사이를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연설을 늘어놓았다. “자, 참으로 용맹한 그대 전사들이여. 맹세를 깨뜨린 저들을 과연 제우스께서 그냥 보고만 계시겠는가? 그들의 도시가 함락되고, 바로 그 날 저들의 아내와 자식들은 우리의 배에 실려 노예로 전락할 것임을 잊지 말라!“ 그때 크레타의 용맹한 장수, 이도메네우스는 아가멤논에게 말했다. “왕중왕이여! 나를 믿으시오. 전우로서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것이니. 아 그리고 약속을 깨뜨린 저들에게 죽음과 슬픔만이 있기를!”
대장들의 호령 소리와 함께 그리스 군사들은 쉴 새 없이 진군하고 있었다. 반면, 트로이 병사들의 진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던 탓에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그들에게는 아레스가 있었으며, 아테나는 양 떼를 몰 듯 그리스 병사들을 몰아쳤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전쟁의 불씨를 퍼뜨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리고 양쪽의 병사들은 한 지점에서 맞닥뜨렸다. 창과 방패들의 충돌은 마치 급류가 서로 충돌했을 때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죽고 죽이는 자들의 소리. 대지는 순식간에 그 빛을 갈아입었다. 핏빛으로 물든 것이다. 델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의 창에 안테미온의 아들 시모에이스가 쓰러졌다. 빛나는 갑옷의 주인 프리아모스의 아들 안티포스가 아이아스를 향해 던진 창은 오디세우스의 친구 레우코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감히 내 친구를 죽여? 내가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 누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침착할 수 있으랴? 오디세우스는 격분했다. 그가 쓴 청동 투구는 유난히 그때 빛났다. 마치 화염을 머리에 쓴 것 같았다.
대열의 맨 앞으로 나서는 오디세우스에게 감히 뭐라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이 창을 날리자 트로이 병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몰러났다. 그렇게 프라이모스의 서자 데모코온은 죽었다. 바로 그때였다. 트로이 병사들 맨 앞에 서 있던 헥토르가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헥토르’가 물러나다니?
그리스 병사들이 이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더욱 함성을 크게 내지르며 앞으로 밀고 나왔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태양의 신이 크게 분을 발하며 소리쳤다. “말을 잘 모는 트로이의 병사들이여! 겁쟁이가 되지 마라! 일어나라! 저놈들에게 물러서지 말아라. 그리스 인들의 피부가 청동이나 돌이나 쇠더냐? 저기 봐라! 아킬레우스는 얼굴조차 안 보인다!“
한편 그리스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려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아테나는 일일이 그들을 격려했다. 만약 당신이 전투의 첫날,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사들이 먼지 속에 코를 박고 나란히 누운 것을 보며 무어라 생각했을까? 전쟁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이제 아테나는 튀데우스의 아들 디오메데스에게 달려갔다. ‘무쌍 난무‘라는 표현이 그에게 어울렸다. 도대체 어느 편에서 싸우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사내는 세차게 제방을 무너뜨리는 빗물처럼 트로이 병사들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사나운 맹수처럼 싸우고 있었다. “아, 제우스의 딸 아테나여. 내 기도에 응답하소서. 나를 쓰러뜨리고 죽을 것이라며 승리를 자축하던 저자를 내가 찌를 수 있도록 도우소서!“ 디오메데스의 기도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새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궁수 판다로스가 이번에는 그의 오른쪽 어깨를 향해 화살을 날려 그의 가슴이 붉은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기도를 들은 아테나는 장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라! 네 아버지가 자랑하던 그 용기가 아들인 너에게도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되리라. 자, 내가 네 눈의 안개를 걷어냈다. 이제 너는 신과 인간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신들과는 맞서지 말아라. 다만, 아프로디테가 싸움터에 나타난 것을 보거든 거침없이 날카로운 창으로 그녀의 고운 피부를 찔러 버리렴!“ 여신의 말에 용기를 얻은 디오메데스는 이제 파죽지세로 적진에 뛰쳐 들어간다. 트로이 병사들은 마치 우리 안에 들어온 사자를 본 양 떼 마냥 도망치기 시작했다. 자기 병사들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본 아이네이아스는 그 난리통에 판다로스에게 다가가 외쳤다. “명사수여, 빛처럼 빠른 너의 화살이 너무나 빠른 것인지 내 눈에 띄지 않는구나. 어서 제우스께 기도를 올리고 저 망나니에게 네 화살을 날리거라!“ 판다로스는 대꾸했다. “나는 이미 화살을 날렸고, 그의 어깨를 꿰뚫었습니다. 이미 그가 하데스의 얼굴을 본 줄로 생각했는데, 착각이었군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활과 화살을 불구덩이 속에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급함인지, 비꼬는 것인지 모를 그의 말을 제지하고, 둘은 전차에 탔다. 저 앞에 디오메데스의 지칠 줄 모르는 당당함이 보인다. 판다로스는 공격 자세를 잡고 외쳤다. “화살이 빗나갔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명사수의 창이 디오메데스의 방패를 찔렀다. 그러나, 방패의 주인은 여전히 멀쩡했다. 그런 그의 실력을 비웃으며 디오메데스는 응수하듯 창을 날렸다. 판다로스의 빛나는 갑옷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의 힘과 용맹함은 목숨과 함께 바람에 날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옆에 타고 있던 아이네이아스는 황급히 전차에서 내렸다. 이제 그와 대화할 수 없는 판다로스를 한번 보더니 분노에 찬 얼굴로 창을 휘두르며 고함을 내지른다.
동시에 디오메데스는 장정 두 명은 와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큰 바위를 혼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바위는 아이네이아스의 허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흑!“ 아무리 위대한 전사였다지만, 그 큰 바위를 견디긴 무리였다. 세상이 순간 캄캄해졌을 때, 미의 여신이 나타났다. 빛나는 아프로디테의 겉옷은 가련한 남자를 감쌌다. 여신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전쟁터에서 빠져나갔다.(아이네이아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디오메데스는 그런 여신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미의 여신이 아테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무자비하게 창을 휘둘러 여신의 하얗고 고운 손목을 찔렀다. 그러나 신들의 몸속에 흐르는 ‘이코르’가 흘러내렸다. 신들은 빵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기에 피가 없었다. “아악!“ 여신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어머니는 그만 아들을 놓치고 말았다. 마침 보인 아레스에게 말을 빌려 달라고 간청했다. 인간이 자신을 감히 공격했으며, 이것은 아버지 제우스에 대한 도전이라고 미의 여신은 추하게 꽥꽥댔다. 동생의 추태를 더 이상 보기 싫었던 아레스는 곱게 말을 내주었다. 곧 나는 듯이 달린 말 덕분에 여신은 올림포스에 도착했다. 어머니 디오네(아프로디테의 어머니, 혹자는 제우스의 여성형이라고도 한다.)가 보이자 딸은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다. 디오네는 딸을 안아주며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소리쳤다. “어머니! 디오메데스입니다. 그 자가 나를 찔렀어요! 이제 이건 트로이와 그리스의 전쟁이 아니라고요! 그리스 인들이 이제 신들에게 덤비고 있습니다!“ 거의 악에 바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딸의 모습을 본 디오네는 이내 분을 내며 말했다. “감히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활을 쏘다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신에게 대항하는 인간은 목숨이 길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아주 멍청한 놈이로구나!“
한편 디오메데스는 계속해서 아이네이아스를 공략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폴론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양신은 맹렬히 공격하는 장수를 상대로 말했다. “튀데우스의 아들아! 이제 그만 족한 줄 알고 물러서라. 신과 겨루는 일이 미친 짓임을 너는 알지 못하는가?“ 아무리 용맹한 디오메데스라도 이번에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트로이 군은 용기를 얻어 적들과 용감하게 일대일로 대치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는 동안 아폴론은 아이네이아스를 독려했다. 그런 모습을 본 헥토르와 사르페돈 역시 용기를 내어 뒤따랐다. 그리스 병사들은 새삼 트로이 병사들의 방어력이 더욱 강력해진 것을 느꼈다.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이때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가 사르페돈을 상대하고자 나섰다. 동시에 양 쪽에서 창이 날았다. 사르페돈의 손에서 나온 창은 틀레폴레모스의 목을 뚫고 그것도 모자라 한참을 더 날아갔다. 그리스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나와 그의 시체를 치워야 했다. 그 광경을 치욕스럽게 바라보며 분을 참지 못했던 남자가 있었다.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천둥을 다스리는 제우스의 아들을 공격할지, 아니면 그가 지휘하는 저 병사들을 쳐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사르페돈은 제우스의 아들 혹은 손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차라리 병사들을 공격하자고 생각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유린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했던 헥토르가 이제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의 옆에는 전쟁의 신 아레스가 있었다. 그리스 병사들이 다시 한번 주춤할 수밖에 없을만한 대단한 기세였다. 이 모습을 본 헤라는 아테나에게 말했다. “저 잔혹한 아레스의 꼬락서니를 봐라. 우리도 맹렬한 전투력으로 무장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자 아테나 여신은 갑옷을 챙겨 입었다. 양쪽 어깨에 아이기스(아테나의 방패)를 걸쳤다. 황금 투구가 찬란하게 빛난다. 전차에 올라타 사내가 들기에도 무겁고 커 보이는 창을 비껴 들었다.
헤라가 채찍으로 말을 재촉하자, 하늘의 문이 열린다. 두 여신은 하늘의 문을 향해 질주한다. 그때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제우스를 의식한 헤라가 남편에게 묻는다. “제우스여, 우리가 아레스를 응징한다면 나를 비난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 아레스를 혼쭐 낼 수 있을만한 자는 아테나뿐임을 나도 알고 있소. 그녀가 아레스와 맞서도록 잘 도와주시오.“ 오로지 그리스 병사들을 구원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전차는 디오메네스를 향해 질주한다. 아테나는 디오메네스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 곁에 있다! 저 잔혹한 아레스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확신에서 나온 자신감은 그로 하여금 큰 소리를 지르며 아레스에게 과감히 도전하게 만들었다.
창이 아레스의 아래쪽 복부를 찌르고 다시 뽑혔다. 아레스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모습은 싸움에 휘말린 병사들이 잠시 고개를 돌려 그 광경에 잠시 홀리게 했다. 자신의 꼬락서니를 의식했는지, 패배를 맛본 전쟁의 신은 황급히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대로 올림포스에 올라간 아들을 본 아버지는 싸움만 하고 다니는 자식을 혼쭐 냈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신에게 ‘아레스가 다쳤으니 잘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두 여신도 올림포스로 돌아온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 위대한 장군들이여. 그대들이 하실 일은 군사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저들이 성문 앞에서 굳건히 버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우리는 아테나의 신전에 제사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니 헥토르, 당신은 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 여인들을 불러 모으세요. 여신께 디오메데스를 물리치게 해 주시면 제물을 바치겠다고 기도를 올려달라고 하세요.“ 한편, 열세에 빠진 트로이 군의 용맹한 장수들인 아이네이아스와 헥토르에게 예언자가 나타났다. 헬레노스의 말을 들은 헥토르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일단 성 안으로 마지못해 들어갔다. ‘이 헥토르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여인네들을 부르러 가야 한다니...‘ 트로이의 위대한 헥토르가 스카이아이 성문까지 도착했을 때, 화려한 조명 대신 트로이의 모든 백성들이 그를 둘러 감쌌다. 모두는 헥토르에게 자기 혈육이 무사히 잘 있는지부터 물었다.
헥토르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올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불 보듯 뻔하게 다 알고 있었다. “아들아, 왜 싸우다 말고 전쟁터에서 돌아왔느냐?“ 어머니는 궁으로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손을 잡더니 물었다. 지친 아들에게 ‘일단 포도주를 신들에게 바치고, 그다음 너도 마시라‘고 권했다. 헥토르는 어머니의 권유를 거절하며 예언자가 한 말을 전했다.
이 사단을 만들어 놓고 전쟁터에는 꼴도 보이지 않는 못난 동생 파리스에 대한 원망도 잊지 않았다. 여인들은 신전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지만, 여인들의 기도는 여신에게 닿지 못했다. “대체 넌 뭘 하고 있지? 지금 우리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너 때문에 전쟁의 불길은 더 거세지고 있는데 무얼 하고 있느냐? 아직 트로이가 전부 불타진 않았다! 일어나! 싸우러 가야 한다!“ 멱살이라도 잡고 당장 끌어내고 시원치 않았지만, 말로 해결하는 것이 형으로서 동생을 위해 베풀 수 있는 관용이었다.
파리스는 ‘5분만’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철없는 아들처럼 ‘금방 준비하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헥토르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말을 한 여인이 있었다. 헬레네였다. “아, 이 끔찍한 재앙은 나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이 있기 전 어머니에게 태어나기도 전에 파도가 나를 삼켰다면 좋았을 것을.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쳐버린 남자와 나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 휘말린 형님은 이제 앉아서 좀 쉬세요. 우리는 인간이니 다 필멸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후세 사람들은 우리를 영원히 노래해주지 않을까요?“ “미친 연놈들... “
헥토르는 더 이상 그 꼬락서니를 볼 수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분을 넘어 미칠 것 같았다. 아내와 자식은 집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 안드로마케는 전세가 기울었다는 소식에 트로이 성벽으로 뛰쳐 나갔다‘고 했다.
헥토르는 스카이아이 문 앞에 이르러서야 사랑하는 아내와 별 같이 아름다운 아들을 만났다. 무사한 남편을 보자 안드로마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을 용기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 용기가 당신을 망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아요. 그리스 병사들이 전부 달려들어 당신이 죽기라도 하는 날엔 나는 차라리 땅속으로 가라앉아버리는 편이 더 나을지 몰라요.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켈레우스가 내 가족들을 모두 다 죽였으니 말이죠. 강하고 따스한 나의 남자 헥토르, 나의 곁에 있어줘요.“ 헥토르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킬레우스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죽음이 자신을 결국 덮칠 것이며, 하데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그것이 남자를 더욱 초연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전쟁터에서 물러난다면 트로이의 모든 백성들 앞에서 얼굴을 어떻게 들까? 내 영혼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소. 거기다 그리스 병사들이 당신을 끌고 갈 것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오. 차라리 그 고통스러운 소리를 듣기 전 내가 먼저 대지 아래로 들어가기를 바라겠소.“ 헥토르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팔을 아들에게로 뻗었다. 하지만, 피칠갑을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아이는 놀라 유모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투구의 붉은 장식이 흔들리는 것은 아이를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헥토르는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투구를 벗고 아이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하늘을 향해 아이를 번쩍 들고 아버지는 기도한다. “제우스여! 이 아이도 저와 같이 모든 트로이 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보다 훨씬 용감한(이때 잠시 헥토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이구나!‘ 사람들이 말하게 하시고, 전쟁터에서 적들을 죽이고 전리품들을 가지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도록 이 아이에게 복 내리소서!“ 그리고 어느새 고운 뺨을 눈물로 적시고 있는 여인을 향해 남자는 말했다. “사랑하는 안드로마케, 절망에 스스로를 던지지 마시오. 나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이는 없소. 하지만,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용감한 자이든, 겁쟁이든 운명을 피할 순 없지. 자,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 부녀자들에게 주어진 일을 하시오. 전쟁은 트로이의 모든 남자들, 그리고 남자 중의 남자. 이 몸 헥토르가 해야 할 일이라오.“ 다시 투구를 집어 들자,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집으로 향했다. 몇 번이나 다시 돌아보며 여인은 눈물을 쏟았다. 하녀들과 함께 헥토르의 죽음을 애도했다. 산 자를 위해 애도한다는 것은 다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그만큼 그의 운명은 뻔했던 것이다.
한편, 눈치를 보던 둘째 아들이 일어났다. 갑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더니 성을 통과하면서 그는 숨 가쁜 척 달린다. “형님, 내가 우물쭈물하는 탓에 형님을 붙들어맨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그런 파리스에게 헥토르는 오히려 웃으며 말한다. “그럴 리 없다! 전쟁터에서 너를 과소평가할 이는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너야말로 진정한 전사다. 자, 이제 우리는 싸워야 할 때다. 우선 트로이에서 그리스의 병사들을 몰아내고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고 난 후다. 그때 모든 일을 바로잡아도 늦지 않아.“ 형제는 함께 성문 밖으로 달렸다. 둘의 모습을 본 트로이의 사내들은 다시 힘을 냈다. 그리스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다시 아테나의 눈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올림포스 산 꼭대기에서 트로이로 향하는 여신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아폴론이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급히 올림포스에서 뛰어 내려오는가? 네가 사랑하는 그리스 인들에게 승리를 주려고 전세를 바꾸려는 거겠지? 자, 그런데 오늘만큼은 내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어떤가, 지혜의 여신이여! 오늘만큼은 싸움을 잠시 중지하자. 또 내일 인간들은 피 터지게 싸울 테니 말이야.“ 아테나는 눈을 꿈뻑대며 말했다. “어떻게 싸움을 중지시킨단 말입니까?“ 씨익 웃으며 태양신은 대꾸했다. “말을 잘 다루는 헥토르다. 그가 마구 덤벼들게 만들면 된다. ‘일대일로 결판을 내자’며 도전을 하게 되면 그리스 인들도 전사를 한 명 보내겠지.“ 합의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그러나, 그런 신들의 의중을 간파한 예언자 헬레노스는 헥토르의 어깨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 내 말을 들어보시오. 지금 당장 트로이와 그리스의 모든 병사들이 그만 싸우도록 해주시오. 그리고 일대일로 결판을 내자고 제의하셔야 합니다. 지금 내가 신들의 이야기를 엿들었소. 당신은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 모양이오.“ 이 말을 들은 헥토르는 창을 높이 들고 전쟁터 한가운데로 나갔다. 이미 그에 대해 몸으로 겪은 모든 사내들은 멀리 비켜섰다. 그는 양쪽 병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외쳤다. “자, 들어라! 제우스가 우리 모두에게 예정된 죽음을 내릴 것이야. 둘 중에 하나, 트로이가 함락되든지, 아니면 바다를 건너온 자네들이 죽어 함선은 항구로 돌아가지 못하겠지. 그러니 차라리 나와 대적할 용기 있는 사내가 있다면 일대일로 겨뤄보는 것이 어떤가? 자, 제우스가 우리의 증인이 되실 것이다. 내가 그의 창에 찔려 죽는다면 내 갑옷을 벗겨라. 그대들의 함선에 장식하기에 좋을테니. 그러나 나의 시신은 집으로 돌려보내라. 적어도 화장은 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내가 그자를 죽여 아폴론이 나를 칭송하신다면, 나는 그의 갑옷을 망설임 없이 벗길 것이다. 그리고 활의 신 아폴론에게 바칠 것이다.“
그리스 진영에 순간 침묵이 흘렀다. 헥토르의 도전을 받아 그 앞에 서기에는 두려웠고,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사나이로서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으니, 제비를 뽑아야 했다. 각자의 이름을 표시한 돌을 아가멤논의 투구 안에 던져 넣었다. 네스토르가 투구를 흔들었다. 그때 하나의 돌이 튀어나왔다. ‘아이아스’ “아, 이것은 분명 내 것이야! 저 헥토르를 무찌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을까? 자, 내 동료들이여. 이제 트로이 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몰래 제우스에게 기도를 올리게. 아, 아니! 들어도 상관없지(이때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누구도 두렵지 않으니까!“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 하고 아이아스는 무장을 했다. 이제 결연한 미소를 지으며 창칼을 들고 성큼성큼 달려 나간다. 그리스 병사들은 아이아스를 보며 환호했다.
반면 트로이 인들은 부들대는 무릎을 잡느라 애를 썼다. 큰 소리를 냈던 헥토르 역시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하데스의 얼굴이 코 앞이다. 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동료들 사이로 숨을 수도 없다.
“자, 헥토르여. 일대일로 싸울 때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 인 중에서 사자처럼 용맹한 아킬레우스 다음으로 누가 용감한지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헥토르는 긴 창을 쳐들어 아이아스를 향해 던졌다. 창은 아쉽게도 방패를 뚫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이아스의 차례였다. 창이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순간, 헥토르가 몸을 돌려 피하지 않았다면,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제 서로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창을 휘두른다. 사자처럼 사납고, 멧돼지처럼 무섭다. 헥토르의 창은 아이아스의 방패 한가운데를 찔렀다. 하지만, 창 끝이 부러졌다. 그 순간 아이아스의 창은 헥토르의 목을 스쳤다. 붉은 피가 솟았다. 하지만, 용맹한 사내는 멈추는 것을 몰랐다. 잠시 한 발 물러서더니 커다란 돌 하나를 움켜쥐고 아이아스에게 던진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패가 찌그러진다. 이번엔 아이아스가 더 큰 돌을 집어 들어 던진다. 방패로 막아섰지만, 뒤로 넘어졌다. 아폴론이 아니었다면, 제 아무리 헥토르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 용맹한 자들이여, 싸움은 그만두시오. 구름을 다스리는 제우스는 그대 둘을 모두 사랑하니 말이오. 자, 이제 둘의 용맹함을 모두가 보았습니다. 보시오, 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그제야 해가 진 것을 알았다. 이후 다시 대결할 기회가 있을터이니 오늘은 일단 싸움을 멈추자고 말했다. ‘남자는 싸우면서 친구가 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둘은 화해를 했다. 친구가 되었다는 표시로 선물을 교환했다. 헥토르는 은빛 못이 박힌 칼과 칼집을, 아이아스는 빛이 나는 자줏빛 벨트를 주었다. “우와아아아아!“ 트로이 남자들은 헥토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헥토르를 위시하고 성으로 들어갔다. 한편 그리스 사람들은 아이아스의 승리를 축하하며 아가멤논에게 데리고 갔다. 아가멤논은 황소를 신에게 바쳤다. 기도가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골고루 나눠 먹었다. 한편 젊은 녀석들이 먹을 것에 정신 팔린 풍경 너머 현명한 노장 네스토르는 곰곰이 생각했다. 또 묘안을 짜려는 터. 손가락을 튕기며 그가 말하자 먹던 고깃덩이를 내려놓고 모두가 집중했다. “우리 병사들의 붉은 피가 뿌려지고, 하데스의 얼굴이 그들을 마주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이 모든 것이 잔혹한 전쟁의 신, 아레스가 개입했기 때문이오! 자, 이제 젊은 이들의 시신을 거둬 화장을 해줍시다. 고향에 돌아갈 때 가족들에게 뼈라도 가져다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들을 한 곳에 고이 묻어줍시다. 아, 함선 옆으로 높은 탑을 쌓고 방책과 튼튼한 문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방책 밖에는 깊은 호를 파서 트로이 인들이 감히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한편, 트로이 인들도 도성 꼭대기 프리아모스 성에 모여 회합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명석한 안테노르는 말했다. “트로이 인들과 동맹군 여러분, 내 맘 속에 떠오른 바를 이제부터 말하겠소. 아르고스(그리스를 말한다.)의 헬레네를 보물과 함께 돌려보냅시다. 우리는 맹약을 어기고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생각해보시오. 이렇게 길게 전쟁을 끌면서 도대체 우린 무엇을 얻고 있단 말입니까?“ 헬레네를 결코 잃을 수 없는 금발의 남자, 아름다운 파리스가 벌떡 일어났다. 거침없는 말투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입 다물어라, 안테노르여!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 분명 너의 지혜를 송두리째 신께서 가져가심이 분명하군. 여기 트로이 인들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는 결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보물은 물론 내 것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약간의 타협점을 찾은 파리스는 다시 앉았다. 그때 프리아모스 왕이 일어났다. 위엄 있는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백성들이여, 오늘만큼은, 오늘 밤만은 전처럼 지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스스로를 놓아버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대들이 맡은 것을 철저히 하라. 날이 밝는 대로 이다이오스, 자네는 그리스 함선으로 달려가라.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를 만나라. 파리스의 제안을 전하고 시신들을 거둬 화장을 할 때까지만이라도 이 싸움을 잠시 멈출 수 있는지를 정중히, 꼭 정중하게 물어보아라.“
“헛소리 하지마라!“ 날이 밝자 이다이오스는 그리스 진영으로 들어가 왕자의 말을 전했다. 모두가 침묵하는데, 용장 디오메데스가 거칠게 침묵을 깨고 말했다. “헬레네는 물론, 파리스의 보물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다. 바보가 아니라면 트로이 인들의 운명이 거의 파멸 직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여기 없거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때 아가멤논이 거들었다. “이다이오스여, 모든 그리스 병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도 잘 보았겠지. 아, 한 가지만큼은 받아들이도록 하지. 시신을 거두는 것 말이지.“ 태양이 높이 떠오르자 양쪽은 전쟁터에서 다시 마주쳤다. 사실 자기 편의 시신이 어느 것인지 분간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시신에서 피를 씻어내고, 마차에 싣는 동안 눈물이 흘렀다.
프리아모스가 소리 내어 울지 말 것을 명령했기에 아무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불을 질러 태운 다음, 그들은 트로이로 돌아갔다. 그리스 군사들 역시 똑같이 한 뒤 함선으로 돌아갔다. 한편, 그 일을 하지 않은 그리스 병사들은 새벽에 함선 주위로 높은 탑을 쌓았다. 방벽을 세웠다. 그리고 전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었다. 방벽 밖으로는 깊은 호를 파고 안쪽으로 날카로운 말뚝을 박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의 이 분주한 모습을 올림포스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던 신들은 매우 놀랐다. 포세이돈이 말했다. “제우스여, 저 그리스 인들을 좀 보세요. 거대한 성벽을 쌓고 깊은 참호까지 파는 것을 보니 나와 아폴론이 전에 영웅 라오메돈을 위해 쌓은 성벽이 생각나는군요. 아, 물론 저것에 비하면 그 모든 성벽 따위는 이미 인간들에게 잊힐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분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하, 튼튼하다고?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저들이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면 저 모든 것들은 그저 파도 앞에서 작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을 거야.“ 누가 뭐라고 하건 말건, 공사를 다 마친 그리스 인들은 음식을 차려 먹고 렘노스에서 가져온 포도주를 마시며 밤새 파티를 했다. 이아손의 아들 에우네오스가 가져온 술이었다.
포도주를 즐기고 싶었던 것은 트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밤새 제우스가 천둥을 계속해서 퍼부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면, 믿어지는가? 본 글의 주요 이야기를 이루는 내용은 일리아스의 4권부터 7권까지의 내용으로 ‘전투 첫째 날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원래 그런 것이다. 못 믿겠다고? 달력을 봐라. 방에만 머물지 말고, 나가서 하늘을 보고 들판을 보아라. 벌써 달력이 이만큼 넘어갔고, 올해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조금 진부한 표현을 굳이 가져다가 사용한다면, 오곡백과는 함께 입을 모아 노래한다. ‘아, 인간아. 보아라. 우리가 얼마나 익었는지 똑똑히 보고, 시간이 흐른 것을 깨달아라.‘
“벌써 10월이야?“ “와, 몰라보겠다. 아가씨 다 됐네!“ 시간의 무색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침잠했다는 증거 일터. 다시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몰두할 만한 ‘보편적’ 간절함이 있다는 것이다.
간절함은 헥토르로 하여금 죽음이 뻔히 보이는 상황 앞에서 누구는 ‘너는 불나방이야’ 이야기할만한 모습, 곧 의연히 전쟁터로 달려가는 태도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참 묘하다. 같은 삶의 간절함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로 하여금 누구보다 간절한 사내 헥토르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게 했으니 말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어디 그 둘 뿐이랴?
공주로 변장했던 진짜 사나이 아킬레우스, 미친 척하던 저 명석한 오디세우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삶에 대한 간절함은 이름 날린 영웅들에게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무개. 전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던 병사들에게도 동일했다. 그렇다. 인생은 모두 동일하다. 모두 동일하게 값지다. 필부에게도, 군자에게도. 영웅에게나, 겁쟁이까지. 누구나 우리는 자기의 삶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알던 모르던,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싸우고, 도망치며, 이기고, 패배한. 살아남고, 죽임 당했으며, 수치당하고, 영광을 얻은 모두의 삶이 모두 값지다. 그래,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 내 삶이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세상에서 ‘조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인생 안에서’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누군가를 연민하는 일. 나 자신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몇 년 뒤의 일은커녕, 몇 시간 후의 일조차 알 수 없어 두려워 떠는 모습,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 때문에 좌절하는 것. 그 모든 일은 우리가 스스로의 인생 속에서 주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 사실 서러워 몰래 울던 오늘, 당신의 하루는 충분히 비장했다고. 그러니까, 어깨를 펴라. 고개를 들고 크게 외쳐봐라. ‘오늘밤 주인공은 나야 나!‘ 누구는 당신을 실패자, 패잔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삶에 대한 의지, 간절함. 그것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