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그리고 분노
“와줘서 정말 고맙다.” 소년들은 막차를 억지로 세우고 올라탔다. ‘무슨 일인데?’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아저씨, 우리 친구가 죽었어요. 장례식장에 가야해요.” 말했다. 아저씨는 ‘운행이 모두 끝났으니 상관없다’고 말하며 장례식장 주소를 물어봤다. 허리도 굽히지 못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던지듯 내려놓고 달려간 그곳에 내 친구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어른들처럼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등교했다. 그래, 그게 그러니까 고등학교 1학년. 평생 철들 일 없다고 하는 남자 인생에 가장 천방지축이었던 때였다. 친구들이랑 모이면 세상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냈던 우리들인데, 그때만큼은 ‘와줘서 정말 고맙다. 00이도 정말 고마워할 거야.’ 말씀하시며 간신히 울음을 참으시는 그 녀석의 어머니를 뵙고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하물며 차가운 바닥, 하얀 얼굴을 하고 누워 있는 내 친구를 빤히 바라보며 오죽했을까. “나, 눈물이 안 나와.” 처음 겪는 깊은 헤어짐 앞에서 나는 그때 알았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표현조차 힘들다는 것을.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운구 행렬에 섞여 관 한 귀퉁이 손잡이를 잡고 화장터로 향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울지 못했다. 친구와의 이별을 글감으로 삼아 입력하는 이 순간이 되어서야 마음 놓고 울 수 있었다.
‘희로애락’ 감정에 대해 크게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면 이것들이다. 그중 유독 미움받았던 감정이 있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만큼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감각, 화를 내거나 슬픔을 터뜨리는 일은 표현하는 것보다 참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탓이다.
적어도 앞의 것, ‘화’라는 감정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희로애락, 하나라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목각인형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이를테면, 희와 락뿐만 아니라 노와 애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표출해도 되는, 자연스러운 나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분노할 때 분노하고, 슬퍼할 때 슬퍼하는 것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이상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마치 응당 분노해야 할 뉴스에 욕지거리는 아니더라도 ‘저건 아니잖아’ 언성을 높이거나, 혹 안타까운 일에 눈물 흘리는 것이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라는 거다. 여기 분내고, 화를 마음껏 표출했던 한 남자처럼.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책이!“ 막사 안에 칼을 차고 빛나는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모여 있다. 사뭇 진지한 것을 넘어 그들은 심각하다. 미간이 찌푸려진 채로 큰 목소리가 오고 간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심각해야만 했을까? 그러니까 이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9년째로 접어들던 때였다. 펠레우스의 아들이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 왕과 서로 싸우고 갈라섰다. 신은 이들 모두를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어디서부터 이 긴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우선, 앞서 언급한 두 남자, 그리스 원정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왜 아킬레우스와 싸우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대들이 프리아모스의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도록, 그러고 나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마음 다해 올림포스의 모든 신들께 기도를 올립죠. ㅁ...만약... 화살 잘 쏘는 신들 중의 명사수 아폴론의 분노가 정말 ㄷ... 두렵다면!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발 내 사랑하는 딸을 돌려주시오.“ 협박인지 간청인지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노인은 자신이 들먹이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섬기는 사제 크리세스다.
문제는, 여기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아가멤논이 그의 딸 크리세이스를 얼마 전 아킬레우스로부터 전리품으로 받았다는 것이고, 절대 자신의 전리품을(누군가에게는 귀중한 딸이었지만) 돌려줄 의향이 없었다는 사실 역시 문제였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당장 꺼져버려 늙은이!“ 와낙스(왕중왕이라는 고대 그리스어, 아가멤논의 별칭이다.)는 거의 늙은 사제를 짓밟다시피 하면서 쫓아내버렸다. 노인은 두려움에 떨며 뒤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딸을 찾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마음은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사제가 빌 곳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한 맺힌 가슴을 내리치며 아폴론에게 기도한다.
“아, 빛나는 화살의 신이여, 저는 당신께 아름다운 신전을 지어 드렸고, 신성한 제물들도 정성스레 드렸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아요. 딱 한 가지뿐입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의 그 빛나는 화살로 그리스인들이 대가를 치르는 일입니다.“ 기도를 들은 신의 손 위에서 노인의 머리색을 닮은 은빛 화살촉이 울어댔다. 아폴론은 그 한탄의 곡소리를 듣자마자 한달음에 올림포스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온 것이다.
바로 이 일 때문에 용맹한 그리스의 군사들은 신이 내린 전염병에 걸려 픽픽 쓰러졌다. 장작더미에 붙은 불은 병사들이 매일 죽어나가는 통에 꺼질 줄 몰랐다. 신의 화살은 무려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나 더 그리스 군사들의 진지를 유린했다. 그리고 열 번째 날이 되자 헤라가 아킬레우스가 머무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의 마음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빨리 달리는 전사’ 아킬레우스는 병사들을 모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병사들이여. 전쟁과 병 때문에 모두가 계속 죽는다면 우리는 전쟁을 끝내지도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자, 아폴론이 왜 저렇게 역정을 내는 것인지 사제에게 물어보자. 아니면 뭐 예언가나 꿈 해몽에 뛰어난 사람 어디 없나? 거수해보도록 하지?“ 그 이야기를 듣기 무섭게 칼카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폴론으로부터 과거와 앞의 일 모두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자였다. “제우스가 사랑하시는 아킬레우스여! 아폴론께서 왜 저렇게 화를 내시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하는 이야기는 분명 왕을 노엽게 할 것인데, 나를 끝까지 지켜주신다면 나는 용감한 가슴과 혀를 가지고 내가 본 것을 말하겠습니다.” 그러자 ‘빨리 달리는 전사’ 아킬레우스가 그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오, 칼카스여,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의 그 용감한 가슴을 부여잡고 신의 뜻을 우리에게 들려주게나. 내가 태양 빛을 받고 살아 있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거친 손을 갖고 자네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지키겠네. 혹 와낙스라 할지라도 말이지.“ 용기를 낸 예언자는 말했다. “아폴론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은 그의 사제가 기도를 올렸기 때문입니다. 아가멤논이(여기서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진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사제를 모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제의 딸, 크리세이스를 돌려주지 않았지요.(아킬레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딴 곳으로 돌렸다.) 사슴과 같은 눈망울의 그 처녀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아폴론은 계속해서 우리의 군사들을 고통 중에 방치할 것입니다.“
하필 이야기를 왕중왕 아가멤논이 들어버렸다. 그의 분노는 이미 시커멓게 가슴을 다 태우고 그것으로 모자라 자기의 두 눈동자마저 불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칼 손잡이에 거의 손이 닿아있었지만, 아직 칼날은 빛나지 않았다.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분노를 담아 그가 말한다. “아, 이게 누군가? 재앙의 예언자여! 그대는 매번 우리를 쓸데없는 유언비어로 혼란하게 해 놓고는 오늘도 또다시 이상한 소문을 늘어놓는구나? 그래, 거기엔 진실도 조금 섞여있지. 물론 나는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보다 크리세이스가 더 좋아. 그렇지만, 뭐 상관없지. 이 모든 재앙이 그녀 때문이라면 나는 돌려보내겠다. 기꺼이!“ 여기까지 들은 모든 군사들의 눈이 커졌다. ‘역시 왕중왕이야!‘ 탄성이 터질만한 그때 다시 말을 이어간다. “아, 그렇지만 말이지.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당신들은 나를 위해 또 다른 전리품을 내게 가져와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이 왕중왕께서 그대들 모두를 위해 희생했으니 말이야! 혹시 이게 탐탁지 않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아이아스의 것이든, 아니면 오디세우스가 받은 것이든 그걸 다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 말이야!” 이야기를 들은 그리스의 자랑스러운 전사 아킬레우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분노를 표출한다. “총사령관, (여기 등장하는 장수들은 각자 자기 세력의 우두머리이며, 아가멤논은 그들 모두를 대표하는 총사령관이다.) 그대의 욕심은 그대의 명성만큼이나 저 높은 하늘에 가 있는 것 같소. 생각해보시오. 우리가 그동안 함락시킨 도시에서 빼앗은 모든 전리품들은 이미 나눠가졌소.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더!‘(우스꽝스러운 아킬레우스의 얼굴 묘사에 왠지 웃음을 참는 듯 이상한 소리가 어깨너머로 들리는 듯했다.) 외치며 그대의 탐욕을 굳이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오?“ 이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아니라 자리에 앉아있고 또 서있는 모든 영웅들을 향해 몸을 틀고 계속해서 말한다. “아, 용사들이여! 영웅들이여! 우리가 왜 여기 와서 이렇게 피 흘렸던가? 트로이 인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던가? 아니지! 이것은 맹약! 우리가 한 맹세 때문이야! 위대한 왕중왕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와의 맹세 때문이 아니던가?“ 마치 웅변대회에서 최우수상이라도 탔을 것 같은 아킬레우스의 말에 모두가 격양된다. 이제 다시 이 탁월한 웅변가는 아가멤논에게 시선을 돌려 말을 이어간다. “당신에게 수모를 당하며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유독 어금니가 더 부딪히는 것 같았다.) 싸울 생각은 전혀 없소. 난 내 병사들과 함께 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병사들은 함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기들 차례가 아니라 저 존엄한 왕중왕의 지껄임을 가만히 들어야 했거든. “하, 내가 그대에게 ‘오, 위대한 용사여 제발 그대로 있어주오’ 하면서 간청할 줄 아는가? 그대 맘대로 하시게! 내 곁에는 위대한 아킬레우스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용사들이 가득하니 말이야. 다만, 브리세이스만큼은 놓고 가라.“
그리스 최고의 용사라고 불렸던 아킬레우스에게 이런 모욕은 없었다. 더욱이 자신이 전리품으로 받았던 여인 브리세이스마저 뺏으려 하니 가슴에는 불이 옮겨 붙었다.
바로 칼을 빼들고 도륙해버려도 시원치 않은데, 웬일인지 그는 멈칫하고야 말았다. “아니,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마침 여신의 눈동자가 그에게 보였거든. 두 사람의 갈등을 올림포스에서 내다본 헤라가 딸 아테나를 보낸 것이었다. “칼을 빼지 마라, 용사여. 너의 그 분노를 헤라께서 보시고 나를 보내셨다. 지금 이 순간을 참아라. 그렇다면 너에게 모욕을 되갚아줄 세배의 보상이 너에게 찾아올 것이다. 자, 그러니 분노를 삭이고 여신의 말씀에 복종해라.“ 칼은 칼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에게는 ‘신의 명령을 복종하면 반드시 신께서 되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고 아테나는 다시 자기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다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신랄한 말을 쏟아부었다. “기억해두시오. 분명 그리스의 모든 병사들이 나를 열망하고 흠모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헥토르가 이 수많은 병사들을 죽이고 쓰러뜨릴 바로 그때, 영웅을 믿지 않고 조롱했던 일을 후회하며 슬픔과 비탄이 당신의 심장을 찌를 테니 말이오!“ 대화가 과열될 대로 과열되자 황희 정승이 등판했다. 필로스의 웅변가였던 늙은 왕이자 장수, 네스토르가 일어난 것이다. 그는 싸움을 중재하며 조언을 건넸다. “프리아모스의 자식들과 트로이 사람들만 좋아할 거요. 우리들의 위대한 두 영웅이 싸우는 이 광경 말이오. 그대들이여, 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생각해보시오. 아가멤논, 그대는 왕중왕이지.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여인만큼은 그냥 두시오. 그리고 아킬레우스. 그대는 위대한 영웅이지. 하지만, 아가멤논은 우리의 총대장이오. 잊었소? 이렇게 하는 것은 영웅의 품격에 옳지 못한 일이오.“ 둘은 탐탁지 않았지만, 노병의 이야기는 구구절절 옳았다.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와 함께 동료들을 데리고 자기 함선으로 들어갔다.
아가멤논은 배 한 척을 바다에 띄웠다. 선원 20명과 신에게 바칠 제물, 그리고 크리세이스를 태운 다음 오디세우스에게 ‘아폴론 신전으로 가서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왕은 조용히 두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그대들은 가서 브리세이스를 데려와라. 거부하거든 내가 직접 군대를 끌고 갈 것이라고 전해라.” 두 전령은 억지로 아킬레우스의 배 앞으로 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들을 마중 나온 그리스의 영웅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아킬레우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먼저 침묵을 깨기로 한다. “당신들에게는 잘못이 없지. 내 친구여, 브리세이스를 데려오게. 이들 편에 그녀를 보내야겠어. 그리고 나중에 이미 늦은 그 날이 와서 저 놈들이 나를 필요하다고 말할 그때, 아가멤논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했는지 말할 수 있는 증인으로 서 달라고 하자고.“
아무리 대장부라고 할지라도 눈물은 다 삼킬 수 없었다. 떠나는 브리세이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아킬레우스는 병사들을 두고 잠시 바닷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바다의 요정이자 이 남자의 어머니 테티스가 나와 아들의 슬픔을 들어준다. “어머니, 제우스께서 나의 명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가멤논이 나를 희롱하고 모욕했습니다. 내 명예의 전리품을 모조리 다 빼앗았습니다!“ 분함에 눈물까지 흘리는 아들을 꼭 안아주며 테티스는 물었다. “아들아, 왜 그렇게 분노하느냐? 누가 너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그리 슬피 우는 것이냐?“ “어머니,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신성한 도시 테베를 정복했습니다. 모든 전리품들은 우리 모든 병사들이 나누어 가졌지요. 그런데, 아가멤논은 브리세이스를 빼앗았습니다. 나를 무시했어요. 어머니, 어머니라면 제우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실 겁니다. 간청해주세요. 트로이 인들을 돌봐주시고, 저를 모욕한 그리스 인들을 바닷가의 배 사이에 가둬버리라고 하세요, 그제야 그들은 가장 용맹한 이 아킬레우스를 존중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겠지요.”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 아들아. 죽음을 운명으로 타고난 내 아들아. 너의 그 짧은 삶을 불행하게 보낼 수는 없지. 제우스께 너의 마음을 전달하겠다. 올림포스로 가겠다. 일단, 싸움은 하지 말아라. 조용히 네 함선 안에서 기다리렴.“
테티스는 올림포스로 떠났다. 어머니의 말대로 아들은 회합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전쟁터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 배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편 오디세우스는 아폴론 신전으로 향했다. “신이여! 노여움을 풀고 그리스 인들을 파멸에서 구하소서!“ 기도를 올리고 제물들을 장작 위에 올렸다. 일행들은 고기를 나눠 먹고 아폴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때가 되서야 아폴론은 분노를 잠재웠다. “아버지, 내 아들의 원통함을 들어주세요. 그 아이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빨리 죽을 운명을 타고났어요. 그런데 아가멤논, 저 못된 것이 우리 아이의 명예를 조롱했습니다. 트로이 병사들이 싸움터에서 이기게 해 주십시오. 그때 제 아들 아킬레우스의 명예가 다시 그리스 군사들 사이에서 높아지겠지요.“ 제우스에게 이런 일이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헤라가 ‘트로이를 돕다니 제정신입니까?‘ 화를 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헤라가 모르게 조용히 검은 눈썹을 아래로 숙여서 ‘찡긋’ 했다. 그렇지만, 헤라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제우스에게 달려와 따지듯 물었다. “이번에는 누구와 함께 작당모의를 하셨습니까? 신들의 왕이시여! 매번 그렇게 나 몰래 하기를 당신은 즐겨하시지요.“ 제우스는 불쾌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헤라여, 그대가 나의 아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는 일 모두를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라오. 마땅히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당신에게 응당 먼저 전해질 것이니까.“ 하지만 상대는 여신들의 우두머리 헤라 아니던가? 그녀는 검은 눈동자를 치뜨며 대꾸했다. “아, 크로노스의 아들. 테티스는 분명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아킬레우스의 명예, 그걸 지켜달라고 했지요? 분명 당신은 그것을 약속했음에 틀림없어요! “ “쓸데없는 소리! 자꾸 그런 소리를 하면 할수록 헤라, 나의 마음은 당신에게서 떠날 뿐이오. 내가 혹시 당신의 목을 조르기라도 한다면, 올림포스의 그 누구도 날 막을 순 없겠지.“ 황소가 두려움에 빠질 때처럼, 여신의 눈은 말없이 껌뻑거렸다. 헤라는 그렇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부부 싸움을 본 올림포스의 신들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때 분위기를 띄우려 헤파이스토스가 잔을 건네며 한 마디 꺼낸다. “두 분께서 어차피 죽을 운명인 인간들 따위의 일로 이렇게 다투시니 제 마음이 무겁습니다. 현명한 어머니께서 제우스의 마음을 풀어주세요. 가장 강한 저분께 대항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헤라는 새하얀 팔을 내밀어 잔을 받아 들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헤파이스토스는 여러 신들에게 잔을 일일이 권했다. 신들의 축제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아폴론은 음악을 연주하고, 무사의 여신들이(음악과 예술의 여신) 반주에 맞추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어느새 태양이 수줍게 얼굴을 감추자 신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번개의 신 제우스는 자기 침상에서 잠에 빠졌다. 옆에 헤라도 함께 한 채로.
“오, 좋아! 이건 대박이다!“ 잠에서 깬 아가멤논은 로또 맞는 꿈이라도 꾼 듯이 상쾌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트로이가 완전히 함락되고 마침내 승리하는 꿈을 꾼 것이다. 꿈에서 공적을 치하했던 신의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그는 왕을 상징하는 황금 홀을 집어 들고, 용맹함의 상징인 청동 갑옷을 얼른 입었다. 병사들 앞에서 자기가 들은 신의 메시지를 근엄하게 최대한 위엄 있게 읽을 것을 연습하면서 먼저 원로들을 설득하기로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필로스의 왕, 네스토르는 말했다. “동료들이여, 우리들 중 가장 명예로운 자의 꿈에 신이 나타나 뜻을 전했습니다. 이제 아카이아(그리스의 옛 지명)의 아들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칼과 창을 들립시다. 자, 이제 전쟁터로 갑시다!“ 소문은 늘 빨리 퍼진다. 이미 병사들 사이에는 아가멤논의 꿈에 나타난 제우스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미 9년이나 흐른 전쟁에 지칠 대로 지칠 그들은 집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때 노장 네스토르가 우왕좌왕하는 장군들을 앞에 두고 말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가시오! 부대에서 이탈하려는 자들은 처단하시오. 자 이제 신에 뜻에 따라 이 전쟁을 끝내야 할 때가 왔소!“ 큰 황소를 바치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간절히 기도했다. “오, 가장 위대하시고 뛰어난 제우스여, 프리아모스의 궁전을 불태우고, 헥토르의 갑옷을 뚫으소서! 우리가 저 트로이의 병졸들 모두를 먼지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병사들의 함성은 제우스의 왕좌를 울리기에 충분했지만, 제우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꿈에 나타나 거짓된 내용을 이야기해준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전쟁의 불길은 타오르기 시작했다.
청동 갑옷은 작열하는 태양 볕은 반사시켜 하늘로 치솟게 만들었다. 그리스의 배와 막사에서 달려 나오는 전사들의 함성과 발소리로 천지는 진동했다. 단 한 사람, 아킬레우스와 그의 병사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전쟁의 물결 속에 뛰어들었다.
“우와아아아아!!!“ 지평선까지 보이는 넓은 들판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구름처럼 피어오른 먼지 때문이었다. 거기 사생결단이라도 한 듯 비장하게 서 있는 트로이 인들의 맨 앞에 신처럼 아름다운 미남자, 파리스가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청동 날이 박힌 창을 비껴 들고 당당하게 섰다. “그리스 인 중에서 나를 상대할 자 누구인가?“ 그때 파리스를 알아본 메넬라오스가 굶주린 사자처럼 흥분하여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를 본 파리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영혼까지 뒤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트로이의 명장이자, 겁쟁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미남자의 형 헥토르가 말했다. “차라리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한 여인에 미쳐서 우리 모두를 파멸에 빠뜨린 자여! 투지도 없는 너를 저 그리스 놈들이 얼마나 비웃고 있는지 봐라!“ 파리스는 쏘아대는 형에게 ‘자신이 메넬라오스와 일대일로 대결할 것이며, 승리하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각자 고향으로 떠나게 할 것이라‘고 계획을 말했다.
어찌 되었든 9년이 흐른 이 전쟁이 이제는 끝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병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양쪽 병사들은 뒤로 물러났다. 전차에서 내려 갑옷을 벗는다. 창과 칼도 모두 다 땅으로 내던졌다. “아, 이 얼마나 끔찍한 아름다움인가?“ 헬레네가 이 광경을 보기 위해 탑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트로이의 원로들은 탄식을 질렀다. 그녀는 왕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고향에서 보았던 그리스의 이름난 장수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이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주재 아래 맹약의 제의가 거행되었다. 제우스 앞에서 시작되는, 누구도 깰 수 없는 약속이었다.
고결한 파리스는 전투 준비를 한다. 갑옷을 입고 청동 칼과 방패를 어깨에 걸친다. 그의 금발이 흐르듯 삐져나온다. 붉은 술이 달린 투구를 뒤집어쓰고 창을 비껴 들었다.
맞은편에 메넬라오스 역시 같은 차림을 한 것이 보인다. 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나오는 것은 투구 안에서 나오는 둘의 안광뿐. ‘쾅!‘ 상대의 둥근 방패를 먼저 타격한 것은 파리스였다. 하지만, 창은 방패를 뚫기에 부족했다. 이내 구부러지고 말았다. 이 와중에 메넬라오스는 제우스에게 기도를 올렸다.
“위대한 제우스시여, 뛰어나게 아름다운 저 파리스를 쓰러뜨려 신의를 베푼 사람을 배반한 자에게 복수하게 하소서!“
긴 창은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 빛을 내며 파리스의 방패를 뚫고 들어갔다. 만약 파리스가 슬쩍 몸을 비틀지 않았더라면, 죽음이 그에게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얍!“ 메넬라오스가 다시 칼을 빼들고 파리스의 투구를 내리쳤다. 하지만, 이번엔 칼이 부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이번엔 아예 미남자의 투구를 세차게 휘어잡고 끌고 갔다.
“크흑!“
투구의 가죽끈이 파리스의 목덜미를 감기 시작하자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마침 미의 여신이 가죽끈을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미남자는 죽었을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파리스를 황급히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의 방으로 데려간다. 한편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찾아 숨통을 끊으려고 트로이 병사들 사이를 뒤지고 다녔다. 하지만, 여신이 숨긴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상황을 파악한 아가멤논은 일부러 목소리를 더 굵게 내며 소리쳤다.
“트로이 병사들아! 메넬라오스가 이겼다. 그러니 이제 맹약을 지켜라! 헬레네와 보물을 우리에게 돌려보내라!“ 그리고 그리스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어났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이야기를 처음 읽어본 독자라면, 시작부터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정말 난데없이 시작하는 서두의 내용 때문이다.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린 번역문을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라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그것은 아카이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주었으며 영웅들의 수많은 굳센 혼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때부터 노래하소서!‘ (1:1-7)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트로이 목마나, 파리스의 선택 이야기는 온대 간데없고, 다짜고짜 ‘분노를 노래하라’라니? 사실 이 작품은 전쟁 10년째에 있었던 ‘아킬레우스 분노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데 왜 ‘아킬레우스에 관한 시’가 아니라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시’(일리아스는 트로이의 옛 지명 ‘일리온’에 관한 시’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트로이 전쟁 속 한 단면을 보여줌을 통해 전쟁 사건 전체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분노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전쟁의 양상을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는 왜 하필 ‘분노‘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미 한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희로애락’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와 슬픔은, 아니, 적어도 화는 우리에게 ‘참아야 하는 것이 미덕’인 감정이지 않았던가? 때문에 우리는 왜 시인이 하필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치기로 작정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근육들이 있다. 하나 같이 모두 중요하지만, 사람을 걷고, 달리고, 뛰게 만드는 다리 아래쪽의 근육이 있는데, 이것을 ‘아킬레스 건’이라고 부른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설명할 아킬레스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본글에서도 묘사된 것처럼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했다. 막 태어난 그를 불사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어머니는 스틱스 강에 아기를 담갔는데, (이렇게 하면 불사의 몸이 된다고 한다.) 그때 발뒤꿈치를 잡고 강에 담갔기 때문에 강물이 닿지 않은 그 부분은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
실제로 테티스는 ‘인간 중에 가장 짧게 살다 갈 운명’이라는 아들에 대한 신탁을 듣고 해결책으로 강물에 아기를 담갔지만, 결국 영웅은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앞선 모자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킬레우스 본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명예를 잃고 조롱당하는 일은 분노하고도 남을 일이었던 사건이었다. 더욱이 ‘인간 중에 가장 짧은 인생이 주어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보물인 명예를 강탈당한다는 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단명을 타고난 영웅에게는 전부였으니까.
영웅은 피규어가 아니다. 그는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화를 낸다. 전부를 앗아가려는 운명의 소용돌이 앞에서 저항한다.
당신에게도 ‘이건 내 전부야’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가? 진리나 어떤 신념 같은 것이 있는가? 그것이 상실되려는 위기 앞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를 보여줄 텐가?
혹시 그때에도 ‘화는 나쁜 거야. 화내면 안 돼’ 억누르며 목각인형으로 남을 텐가? 아니, 분노해야 한다. 화내야 한다. “나 진짜 화났어!“ 외쳤던 영웅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피규어가 아니니까. 오늘도 숨 쉬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