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
“와, 언제 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바이러스 때문에 올해는 바뀐 것들이 참 많았다. 모여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각종 강연과 모임이 취소되는 것은 물론, 휴가를 받아도 어디로 멀리 떠나기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2020년이 벌써 15주만 지나면 넘어가는 이 시점에 가장 그리운 것은 아마도 ‘여행’이 아닐까? 그게 그러니까, 작년 여름이었다. 지인들과 제주도 여행을 4박 5일 일정으로 떠났다. 생각난 김에 핸드폰 앨범을 보니 삼양해변에서 오랜만에 수영을 했던 기억, 가좌에서 시원하게 마셨던 한라봉 주스, 늘 봄에 머무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그 식당에서 먹었던 맛있는 밥들이 떠오른다.
“어? 없어. 진짜 없는데?“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신나게 놀았던 그 여행에서 문제는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다. 일행 중 한 명이 지갑을 분실한 거다.
결국 밥을 먹었던 가게 중 한 곳에서 지갑을 찾았지만,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지갑은 나중에 따로 받아야 했고, 그분은 급하게 증명사진을 찍고 임시 신분증을 들고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야, 7번 총기함 열쇠 그거 어디 갔냐? 방송 한번 해봐.“ “아씨, 립밤 또 어디 간 거야, 오늘까지
올영 세일이었던 것 같은데 이따 들러야겠네...“ “나 지우개 좀... 어제 샀는데 또 없어졌네... “ 아마 이쯤 되면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물건에 발이 달렸다고 믿어야 할 수준인 것 같다.
‘15만 개’ ‘교통수단별 분실물 관련 통계‘에 따른 서울 지하철*버스*택시에서 습득한 분실물이다. ‘잃어버리는 일’이 뭐 사실 인간에게 하루 이틀 일인 것은 아니다.
아, 나는 지금 유리 구두를 되찾은 그 공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은 같지만, 평생 못 찾은 어떤 남자가 있거든. 모노산달로스, ‘외짝 신발을 신은 남자’ 그 사람이 본 글의 주인공이다. ‘아, 그랬냐? 발바리 치와와 스치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디즈니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마 위의 저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어떤 노래가 자동 재생되는 착각은 한번쯤 느꼈을 것이다.
영화 ‘라이언 킹’의 주제가 ‘Circle of life‘의 첫 가사이다. (물론 정말 가사가 저렇지는 않다. 외국 노래가 모국어처럼 들리는 착각, 이른바 ‘몬더그린 현상일 뿐’) ‘내가 왕이 될 상인가?‘ 권력을 향한 욕망은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초원의 사자들에게도 다분했던 모양이다. 드넓은 사바나를 다스리는 왕 무사파의 동생(물론 이 둘은 같은 종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스카는 권력을 조카 ‘심바’에게 주기 싫어서 그가 어른이 되기 전 왕 무파사를 죽인다. 그리고 자신이 왕이 된다.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이는 집에서 떠나 거친 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이복형제 펠리아스가 왕권을 장악하면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이 왕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지혜롭고 현명한 켄타우로스(반인반마. 헤라클레스를 다룰 때 잠시 나왔다.)였던 케이론에게 가르침을 받고 자란다.
“야, 거기 너! 허우대가 멀쩡하게 생겼구나?
나 좀 업고 강 좀 건너라!“ 어느 날 청년은 사냥을 하던 중 자신을 업고 강을 건너라고 ‘요구’하는 노파를 만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탁’이 아니라, ‘요구’였다. 마침 청년은 어르신의 말이라면 웬만하면 들어주었던 모범 청년이었나 보다.
‘얼른 할머니 건너게 해 드리고 나는 마저 사냥해야지’ 생각했을 터. 그런데 이상했다. 무슨 돌부처라도 업은 것처럼 할머니가 천근만근이었던 것이다. “고맙다. 아, 그리고 신발은 미안하게 됐다.“ 청년은 사냥은커녕 바로 들어가야 했다. 할머니를 건너게 해 드리려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거든. 거기에 발에 부상까지 입었으니 사냥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이 할머니는 말로만 사과를 하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짐작했을지 모르지만 이 노파는 마귀할멈이 아니라, 헤라였다. 헤라클레스의 경우와는 반대로 헤라의 각별한 총애를 받게 된 이 청년의 이름은 ‘이아손’이다. “아, 보인다! 한쪽 신만 신은 자, 그 남자를 조심해! 그 자가 왕, 당신을 죽일 테니까! “ 한편, 펠레아스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듣고 남자들의 얼굴이나 손이 아니라 발을 유심히 보고 사느라 거북목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이올코스에서 삼촌 펠리아스가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고 왕 행세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아손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달았다. 마침내 한쪽 신발만 신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청년이 등장했을 때, 왕은 깜짝 놀라 정말 거북이라도 된 마냥 잔뜩 움츠렸다. “황금 양털! 그걸 구해와라. 그럼 내가 너에게 이 자리를 넘기마!”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침착하게 왕은 말했다. 사실 ‘황금 양털을 구해오라’는 요구는 헤라클레스의 과업 중 어렵고 어려웠던 것들과 비등한 일이라서, 사실 왕은 ‘구해오는 길에 혹시나 네가 소식이 끊기면 좋고’ 같은 심보로 이야기를 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황금’ 양털이라니? 도대체 이건 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보이오티아의 왕 아타마스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하나는 네펠레, 둘째 부인은 이노였다. 이노는 의붓자식인 프릭소스와 헬레를 죽일 마음을 먹었다. 먼저 구운 씨앗을 가지고 수확을 망쳐버렸다. 싹이 나지 않으니 흉년이 들었고, 기근이 발생했다. “신들이 프릭소스를 원합니다. 제물로 바치세요!“ 흉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탁을 받기 위해 델포이로 사자를 보냈더니, 이미 이노에게 뇌물을 먹은 전령은 거짓 보고를 올렸다. 신들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요구했다는 것이다. 신이 원한다는데 어쩌랴? 칼이 아들의 목을 베려는 그 순간이었다. “아들, 여기야!“ 네펠레가 두 자식을 빼돌렸다. 그녀는 헤르메스가 준 황금 양에 아이들을 태웠다. 양은 하늘로 솟구쳤다. 안타깝게도 남매는 생이별을 해야 했다. 양이 비행하는 도중 헬레가 그만 떨어진 것이다. 그 지점을 그녀의 이름을 따 헬레의 바다라는 뜻인 ‘헬레스폰토스‘라고 부른다. 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이다. 한편 황금 양은 계속 날아 흑해 가장자리 콜키스라는 곳에 무사히 도착했다. 프릭소스는 고마운 양을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치고(동생을 떨어뜨린 것에 대한 합법적 복수?) 아이에테스 왕에게 양털을 주었다. 왕은 잠들지 않는 용이 황금 양털을 지키게 했다.
이아손 역시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우선 제우스의 오크나무로 뱃머리를 만든 아르고호를 준비했다. 이 배는 그 어떤 배들보다 빠를 뿐만 아니라, 최고 신의 오크나무로 만들어진 뱃머리는 인간의 언어로 예언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전방에 방지턱이 있습니다?) 배를 구했으니, 이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앞서 이 모험에 참가한다고 언급했던 헤라클레스는 물론, 아내를 찾기 위해 저승까지 다녀온 상남자 오르페우스를 비롯해 카스토르, 폴레데우케스, 바람의 아들 제테스와 칼리이스, 멜레아그로스, 테세우스, 페이리투스를 비롯한 남자 영웅뿐만 아니라, 이후 한건을 크게 하게 되는 사냥꾼 아틀란테 역시 원정대에 합류한다. “땅이다! 땅이 보인다!” 출정한 아르고 호는 폭풍에 떠밀려 여자들만 살고 있는 렘노스 섬에 정박한다. 아마존이 용맹함으로 유명하다면, 이 섬의 여인들은 악취로 유명하다. 아, 안 씻은 게 아니냐니! 숙녀들에게 무슨 망발인가?
사실 여기에는 신의 분노 서린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찌 된 이유에서였는지, 미의 여신에 대한 숭배를 그녀들은 거부했다. 분노한 아프로디테는 여인들에게 악취가 나게 만들어서 남자들이 결코 가까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 여보 미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안 되겠어.“ 문제는 남자들이 본토로 가버렸을 때 일어났다. 단지 떠난 것을 넘어 남편이 ‘남’ 편이 되어버린 거다. 분노한 여자들은 섬으로 돌아온 남편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여왕 힙시필레는 그래도 아버지만큼은 살려둬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토아스 왕만은 살려서 궤짝에 가둬 보내버린다.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보니 렘노스 섬에 접근한 그 배를 보고 여인들은 낯선 이들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결국 영웅들의 매력에 사로잡혀 버린다. “아니, 지금 우리가 뭘 하러 왔는지 잊어버렸소?“ 헤라클레스의 강력한 항의가 아니었다면 모두가 아예 살림을 차릴 뻔했다. 배는 이제 지중해를 빠져나가 흑해로 들어서기 직전이다. 아르크톤네소스 반도가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여러분, 계시는 동안 마음껏 즐기시기 바라오. 하지만, 저기 보이는 저 산만큼은 안됩니다.“ 왕 키지코스는 선원들을 반겼지만, 산만큼은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거기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낳은 거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누군가? 거기에 바로 그 헤라클레스까지 있지 않은가? 거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방을 빼야 했다. 왕은 뒤에 어떤 일이 자신을 운명처럼 기다리는지 전혀 몰랐다.
당장의 근심거리를 치워준 이들을 위해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큰 연회를 베풀었을 것이다. 아르고 호는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들의 떠나기 싫은 마음을 누가 알았던 것일까?
“역풍입니다! 도저히 진행할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지. 돌아간다!“ 다시 돌아온 영웅들이 귀찮았던 것일까? 왕은 그들에게 환영의 인사로 화살 비를 퍼붓는다. 알고 보니 거인을 죽인 일에 대한 복수로 여신이 역풍을 만들어 보냈고, 왕은 적들이 급습한 것으로 착각해 공격한 것이다. 제 아무리 군사들이 베테랑이라 할지라도, 영웅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싸움이 거의 일방적이었다는 사실은 새벽, 동이 트고 난 뒤 알 수 있었다. 키지코스 왕들의 병사들이 대부분 몰살당했던 것이다.
점쟁이 몹소스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영웅들에게 진상을 알려주었다. 여신의 형상을 뱃머리에 새기고 진심으로 사과를 전달하고 난 뒤에야 바람은 가라앉았다. 그렇게 아르고 호는 다시 출항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영웅들이 한참 전투 중이었을 때,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과 물을 구할 수색대로 몇 사람이 차출되었다. 그중 헤라클레스의 친구였던 힐라스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드리오페스의 왕 테이오다마스와 님프(요정) 메노디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는데,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대단했다.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물을 찾아 헤매던 그를 보고 연못에 있던 님프들이 홀려 버렸다. 그들은 미소년을 유혹해서 연못에 빠뜨린다. 자기들이야 물에서 숨을 쉬는데 문제없었다지만, 여긴 입장이 좀 달랐다. 결국 힐라스는 익사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친구를 생각하던 헤라클레스는 망부석이 되는 대신 ‘그를 찾기 전까지 항해에 참가할 수 없소’라고 말해버린다.
마침 그가 쓰는 힘만큼 많이 먹는 헤라클레스가 보기 좋지 않았던 이아손은 별로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헤라클레스의 이탈을 허락한다. 이후 그의 이야기는 외양간을 치우는 과업으로 이어진다.
항해를 계속 이어나가던 아르고 호는 베브리코스 섬에 도착한다. 이 섬의 왕인 아미코스는 권투를 아주 좋아하는 남자였는데, 장갑 속에 대못을 숨겨서 시합을 했다. 아무리 권투를 좋아하는 장정이라도 그와 붙는 날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승부! 남자의 승부를 하자고!“ 원정대 역시 섬에 들어온 이상 시합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대표로 나선 폴리데우케스는 오늘날로 치면 빠른 스피드를 자랑했던 경량급이었다. 반면 강펀치에 느린 아미코스 왕은 펀치를 힘껏 날렸지만 맞추지는 못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왕은 패배하고 만다. 긴 환호성과 함께 항해는 계속된다.
“아, 배고파! 배고프다고!“ 트라키아에 상륙한 영웅들은 제우스의 벌로 눈이 멀게 된 예언자 피네우스의 외침을 들었다. 그는 본래 트라키아의 왕이었는데, 신의 분노를 사버린 탓에 눈이 멀어버리고, 하피(여자의 머리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괴물 새)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늘 하피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탓에 그는 매일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앞서 원정대를 소개할 때 바람의 아들이라고 묘사된 칼라이스와 제테스 형제가 나섰다. 그들은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아들들이었다. 한편으로는 제우스의 분노가 무서웠지만, 점쟁이는 그럴 일 없을 것이라 했다.
하늘로 날아 오른 두 남자는 하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 아무리 괴물 새들이라도 바람의 아들들을 당해내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결국 그곳에서 다시 하피가 목격되는 일은 없었다.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내 보답으로 그대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려주지.“ 원정대가 지나가야 할 코스에는 많은 배들을 침몰시킨 심플레가데스 암벽이 버티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 암벽이 말을 한다는 점이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심지어 신들에게까지 희생을 요구했다. 제우스의 전령들이었던 비둘기들조차 한 마리가 목숨을 내놔야 할 만큼 예외는 없었다. “자, 그러니까 비둘기를 가지고 가게. 암벽을 지날 때 날리시고, 비둘기가 무사한 경우에만 그대로 진행하라고. 내 말 알아듣겠지? “
아르고 호가 암벽 사이에 이르자 이아손은 침착하게 비둘기를 한 마리 날렸다. 암벽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비둘기를 삼킬 듯 좁아졌다. 하지만, 비둘기는 어림도 없다는 듯 가볍게 암벽 사이를 지나갔다.
“좋아, 지금이다!“ 이윽고 배가 다시 출발했다. 약간의 상처를 입긴 했지만, 무사히 통과했고, 마침내 흑해 진입에 성공했다. 영웅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전혀 몰랐다. 그들 뒤로 여신 아테네가 암벽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영웅들은 온갖 진귀한 광경을 목격했다. 흑해에서의 여정을 진행하며 태양신 아폴론이 동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존 종족이 사는 곳이나 코카서스 산 중에서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보기도 하지만, 모든 뒤처리는 힐라스를 기다리고 뒤따라 올 헤라클레스에게 맡기고 훌쩍 떠난 것이다.(너무하네)
결국 아르고 호는 콜키스에 도착한다. 황금 양털이 있는 그곳이다. 아이에테스 왕을 만났다. 황금 양털을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쉽게 주진 않았다. “본래 주인이었던 프릭소스는 내 딸과 결혼을 했소. 애석하게도 그는 죽었지. 그런데 사위가 나에게 그 양털을 맡겼지 뭐요? 이제 그건 내 것이지. 내 맘대로 할 거야. 미안하게 됐소. 다시 돌아가시오.“ “당신 것이라고요? 나에게 황금 양털을 가져오라고 한 펠리아스에 대해 잘 모르나 본데, 그 역시 프릭소스 집안의 사람이오. 그렇다면 당신이 양털을 내주어야 하지 않겠소?“ 이아손의 말 역시 일리가 있었다. 아이에테스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었고, 3개의 과제를 낸다. 물론, 해결하라고 내는 것이 아니라 ‘맞고 뒤져라’ 식의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이야기를 뒤에서 지켜본 왕의 딸 메데이아의 가슴에 에로스의 화살이 깊게 박혔다. 아이손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왕의 딸은 아버지가 낸 과업의 해결책을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아손에게 몰래 찾아가 ‘당신을 도울 테니 그 대가로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구걸하는 사랑은 늘 비참하다. 그녀 역시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만큼 메데이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아, 그래서 첫 번째 과제가 뭐였냐고?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일이었다. 아이에테스는 포세이돈에게 황소 두 마리와 녹이 슬지 않는(스댕?) 쟁기를 선물로 받았다. 신이 준 황소는 좀 유별났다. 성질이 얼마나 거셌는지, 코로 불길을 뿜었던 것. 보통 사람이라면 밭을 갈다가 불에 타 죽을 터였다. “자, 이 연고를 받으세요.” 새살이 솔솔 돋는 그 연고였을까? 불길을 견딜 수 있는 연고를 건네받은 이아손은 무사히 밭을 다 갈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을 수 있었다.
두 번째 과제는 다소 진부했다. 전사들을 무찌르라는 것. 하지만 이 역시 평범한 병사들은 아니었다. “용의 이빨을 땅에 심으면 거기서 전사들이 나올 텐데, 그 놈들을 다 무찌르게.“ 왕의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용의 이빨에서 나온 전사들이라면 차라리 데려다가 국방력이나 강화할 것이지. 어찌 되었든, 이빨을 심자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전사들이 땅에서 나왔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알려준 대로 바위를 하나 들어 그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전사들은 바위를 마치 자기편이 자기를 해치려고 던진 것으로 착각했다. 서로 시비를 걸고 싸우다가 자멸했다. 이쯤 되자 왕은 반은 포기했는지, 세 번째 과제로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고 있는 황금 양털을 직접 알아서 가져가라‘고 말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가져갈 것이었으니까요. 대신, 누구도 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해주십시오.“ 왕에게 말한 뒤 이아손은 황금 양털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메데이아였다. 그녀는 용에게 노래를 불렀다. 달콤한 가락에 하마터면 이아손 역시 잠들 뻔했다. 하지만 여전히 부릅뜨고 있는 용의 서늘한 눈동자에 잠이 확 달아났다. “푸흡!“ 입을 가리고 겨우 웃음을 참은 메데이아는 용의 눈에 수면제를 몇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자 눈마저 감겼고, 이아손과 함께 황금 양털을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왕은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아이에테스는 황금 양털을 가져가는 이아손을 뒤쫓았다. 아르고 호에는 그렇게 또 한 명이 더 타게 되었다. 메데이아는 왕이 이렇게 할 것을 미리 알기라도 했었는지, 자기 이복형제인 압시르토스를 인질로 삼고 배에 탑승한다. “야! 거기 안 서냐,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왕은 고함을 지르다 이내 주저앉아 오열한다. 메데이아가 겨우 아기에 불과한 압시르토스를 토막 내 바다에 던져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황금 양털, 그게 대체 무엇이길래 왕은 아들 하나를 저 세상으로 보냈다. 사랑하는 딸을 약녀의 대명사로 만들어 버렸다.
‘인륜‘ 그러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야 할 규칙은 존재했다. 아르고 호에서 일어난 이 끔찍한 일은 분명 인륜에 반하는 것이었다. 격노한 제우스는 아르고 호가 항해하는 길을 따라 폭풍우를 보냈다.
아르고 호의 예언하는 뱃머리는 ‘저기 보이는 섬으로 가서 죄를 씻으라’고 말해준다. 결국 압시르토스를 죽인 죄는 용서받지만, 아버지를 배신한 자식은 그 당시에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었나 보다. 메데이아는 아버지를 배신한 죄를 씻지 못했고, 그녀는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귀를 막아! 빨리! 그리고 오르페우스! 어서 노래를!“ 귀환하는 여행을 계속하던 아르고 호는 세이렌들이 노래를 부르는 바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주변을 지나가는 배에 탄 선원들을 홀리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보통의 경우, 항해에 집중하지 못한 선원들은 키를 놓쳤고, 결국 그 해역에는 부서진 배들의 잔해로 가득했다. 선장은 이 곳을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모두의 귀에 귀마개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오르페우스에게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라고 요구했다. 선장의 유난 덕분에 선원들은 단 한 명도 홀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이후 스케리아 섬에 도착한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결혼을 했다. 두 사람의 첫날밤은 분명 황홀했을 것이다. 그 어떤 신혼부부도 황금 양털 위에 누워보진 못했을 테니까. 자, 남 좋은 이야기는 짧게 하고, 아르고호는 다시 출항하는데, 안타깝게도 폭풍우에 떠밀린다. 얼마나 폭풍이 심했는지, 내륙까지 떠밀려 버린다. 트리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아르고 호가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이아손은 아르고 호를 짊어지고 사막을 횡단해야 했다.
그들은 크레타 섬에 닿았는데, 탈로스라는 골렘이 섬을 지키고 있었다. “우워어어!!!!” 큰 소리를 내며 바위를 집어던지는 골렘은 마법사였던 메데이아가 나서 최면을 걸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돌아온 이아손을 맞이한 것은 죽어가는 아버지였다. 이번에도 메데이아가 해결사로 나서는데, 먼저 노인을 토막 낸다.(잘못 본 게 아니다.) 그리고 냄비에 넣고 끓인다. 그러자 몸이 합쳐지면서 노인은 다시 젊은이가 된다.
“아니, 나도! 나도!” 펠리아스는 그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와 자신에게도 젊음을 부여해달라고 말한다. 메데이아가 어떻게 했을까? 똑같이 하기는 했다. 하지만, 뭔가 비밀의 약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펠리아스는 받지 못했고, 결국 그 길로 펠리아스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긴 여행을 떠난다. 웃긴 것은 이 일이 있은 뒤 우리의 상상처럼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아손은 왕위를 얻는 것에 실패한다. 펠리아스의 아들이 ‘왕을 시해했다’며 메데이아와 함께 이아손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원정대의 이야기는 끝이 나고, 아르고 호는 포세이돈에게 바쳐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애석하게도 동화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맺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아손은 추방당한 땅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인 글라우케와 결혼하겠다며 메데이아를 내친다.
하지만, 메데이아가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이제 와서 나를 버리냐’며 늘어진다.(사실 말로 했을 때 알아서 잘했어야) 그러자 이아손은 이렇게 변명한다. “내가 빚을 진 건 그대가 아니오, 메데이아여. 오히려 사랑의 여신에게 빚을 진 것이지.“ 이런 멍멍이 소리를 듣고도 웃으며 물러난 메데이아에게는 분명 어떤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선물입니다. 결혼 축하드려요.“
생긋 웃으며 건넨 옷과 왕관을 착용하자 글라우케와 크레온은 불에 타 죽어버렸다. 결혼식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잔칫집이 아수라장이 된 꼴이다. 더 나아가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사랑하여 태어난 자기 자식들까지 죽여버린다. 오뉴월에 누가 한을 품으면 그렇게 무섭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증명된다. 이 모든 광기에 휩싸인 메데이아는 전차를 타고 달아난다. 아테네까지 도망친 그녀는 아이게우스 왕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후 장성한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의 왕위를 계승할 자라며 나타난다.
자기 자식이 왕위에서 밀려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갑자기 나타난 테세우스를 독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테세우스의 편이었다. 다시 도망쳐 페르시아까지 닿은 그녀는 그곳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다. 아, 이아손? 아르고 호 밑에서 ‘왕년이와 라떼‘를 찾으시다가 뱃머리가 떨어져 진한 키스를 하셨다. 그게 아마 그의 마지막이었다지.
결국 이 엄청난 이야기가 다 흐르는 동안 이아손이 보여준 것은 렘노스 섬에서 힙시필레 여왕을 꼬드긴 정도였다. 아이에테스의 시험을 맞닥뜨리기 전까지 그는 첨단 내비게이션이 달린 배에, 온갖 영웅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콜키스에 도착해서 그는 결국 황금 양털을 얻는 것에 성공하지만, 그것 역시 왕의 딸 메데아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는 페르세우스처럼 과업 이후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험의 동기를 달성하는 것에도 실패한다. 왕좌에 앉기는커녕 낯선 땅으로 추방된다. 어딘가 당혹스러운 이 일곱 번째 영웅, 이아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일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의 신화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 중 하나이다. 어렸을 적 동화로 읽었던 자매의 이야기에서 콩쥐는 개울에 꽃신 한 짝을 빠트린 바람에 원님과 만나게 된다. 신데렐라는 무도회에 다녀오다 흘린 구두 때문에 왕자와 결혼한다. ‘잃어버린 신’이라는 키워드로 본 글의 영웅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 뭔가 다른 것이 보인다. 이아손의 모험담을 읽으며 보통 ‘황금 양털’과 그것을 찾아오는 여정에 우리는 주목한다. 화려한 보물과 그것을 찾는 모험을 하는 영웅들에게 홀려 정작 주인공에게는 여전히 한 개의 신발만이 신겨져 있음을 잊는 것이다. 모노산달로스, ‘외짝 신발을 신은 남자’라는 별명처럼 이아손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것들의 연속이다. 다른 설화나 전설들처럼 그의 이야기 역시 계속해서 결핍이 선사되고, 그것이 해소하는 쪽으로 서사는 진행된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영웅 역시 완벽하다기엔 신발 하나쯤 잃어버린 신데렐라다. 영웅은 잃어버린 무엇을 메우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마침내 그것이 해결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모든 것이 전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찾아 헤매는 중이다. 영웅은 완벽하지 않다. 무엇인가 결핍되었고, 잃어버렸다. 어쩌면 우리가 계속해서 영웅에 탐닉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