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인간 Sep 16. 2020

‘그 남자가 치킨 앞에서 울던 날’

우리는 모두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다.


“00아, 뭐 먹고 싶은 것 있니? 치킨 먹을래?”

 가끔, 아주 가끔 아버지는 늦은 저녁 집으로 전화를 걸어 그렇게 묻곤 했다. 당신은 별로 즐기지도 않으시던 ‘치킨’이라는 단어가 수화기 넘어 들릴 때면 남매는 “반반이요!”를 외치고 전화를 끊었다.

‘철컹!‘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나와 동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현관으로 달려갔다. “아빠 왔다!” 아버지는 씨익 웃으며 치킨을 건넸고, 우리는 누가 쫓아오는 것 마냥 급하게 포장을 뜯고, 치킨을 먹었다.

 아직 ‘아빠’라고 불러주는 아이들은 없지만, 나도 어른이 되니 그때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치킨을 사 오셨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아버지는 그날 유독 고단했으리라. 그래서 ‘치킨 따위’에 기뻐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왜 아버지는 치킨을 사오셨을까?




 어렸을 적 보았던 만화책 속 관우, 장비,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남자들 뿐 아니라, 내 앞에 치킨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열쇠를 돌렸던 그 남자가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왜 이제야 알았을까?



 어쩌면 역사에 기록되거나 대중의 인정을 받을 만큼 큰 업적이 아니더라도,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매일 모험 떠나기를 주저 않았던 모든 이들이 사실은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다.  

 그러나, 어떤 영웅은 비극적이다. ‘모두가 치킨을 먹는 자식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내용은 ‘또 한 명의 프로메테우스가 식은 치킨 앞에서 오열하던 날’의 기록이다.



헤라클레스가 짐승을 돌봤다고 하는 ‘키타이론 산’의 전경




“어라? 왜 모자라지?”

 그가 무식하거나, 숫자를 잘못 센 것이 아니었다. 키타이론 산에서 소를 돌보던 헤라클레스는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하루가 다르게 돌보는 소들이 줄어들었던 것. 알고 보니 근처 들에 사는 사자들이 소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헤라클레스는 홧김에 주변에 보이던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사자들에게 휘둘렀다.


 

 필부였다면 모를까, 상대는 헤라클레스였다. 사자들은 하룻강아지 마냥 소리도 못내고 전부 다 사냥당했다. 헤라클레스는 그렇게 첫 사냥을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고향 테베로 돌아왔다.

“약속된 날이 됐는데, 왜 안 내놓는거냐고!!”



 시끄러운 소리가 헤라클레스의 귀를 때린다. 당시 테베는 ‘오르코메노스‘에 조공을 바치는 힘없는 나라였다. 때가 되면 흉작이든 풍년이든 상관없이 사신들이 찾아와 일수꾼 마냥 행패를 부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꼴을 사자를 격퇴한 젊은 영웅에게 들키고 말았다.



 헤라클레스는 별말도 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사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너, 두고 보자!” 세상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 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오르코메노스의 왕은 사신이 당한 수모를 듣고서는 군대를 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그 헤라클레스’ 아니었던가? 군대는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다.



광기에 휩싸여 아내 ‘메가라’와 두 아들을 죽이는 헤라클레스




“오, 헤라클레스! 그대는 우리의 영웅이자, 보물이오!”

 테베의 왕 크레온은 감사의 표시로 그의 딸 ‘메가라’를 아내로 주었다. 아들 둘을 낳고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하지만, 헤라클레스가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결코 못 보는 한 여신이 있었다. 헤라였다.



 그녀는 헤라클레스를 미치게 만들었다. 헤라클레스의 눈에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식들은 사자와 하이에나로 보였다. “이 짐승들이 어딜 감히!”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내와 자식들은 그렇게 겁에 질려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해당했다.

“아니, 이게 뭐야?!”

 그야말로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경악하며 스스로 테베를 떠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의 신전으로 찾아갔다. 여사제 ‘피티아’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죗값을 치를 수 있을지 물었다.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오스의 노예로 12년 동안 봉사하시오.” 꼼짝없이 그는 노예로 전락했다. 이 속죄의 기간 동안 티린스의 왕은 그에게 이른바 ‘12가지 노역’으로 알려진 과업을 헤라클레스에게 내렸다.



네메아의 사자를 목 졸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



첫 번째 과업. ‘네메아의 사자‘


 첫 번째 과업은 ‘네메아’ 지방의 사자를 잡아 오는 일이었다. 네메아의 사자는 티폰의 아들 ‘오르트로스’와 괴물 뱀 ‘에키드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괴물 뱀이 어떻게 사자를 낳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사자는 네메아에서 큰 골치 덩어리였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뚜벅이‘로 떠난 헤라클레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몰로르코스’라는 가난한 농부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갑자기 자신의 집에 찾아온 영웅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필부의 가슴은 두근댔다. “당신 같이 대단한 영웅을 만난 일은 내 일생에 둘도 없는 영광입니다. 당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싶습니다.”

 당장이라도 소를 잡아 바칠 것 같이 떨리는 농부의 손을 바라보며 헤라클레스는 말했다. “30일만 기다리시오. 내가 3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죽은 것으로 생각하시오. 나를 추모하며 제물을 바쳐 주시오. 하지만 그전에 내가 돌아온다면 그 제물은 나를 지키시는 제우스에게 돌려주시오.”

 영웅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농부의 집 옆에 서 있는 튼실한 올리브 나무였다. 하늘로 뻗어 있는 수많은 가지 중 가장 굵고 튼튼해 보이는 것을 꺾었다. 영웅의 손에 딱 맞는 단단한 몽둥이가 되었다.


 

 네메아에 도착한 헤라클레스가 사자를 찾는 데에는 큰 수고가 필요하지 않았다. 제집 안방인 듯 편하게 돌아다니는 사자를 발견하고 잽싸게 화살을 날렸다.

“아니, 이게 튕겨 나간다고?!”

 화살은 단단한 사자의 가죽을 뚫지 못했다. 사자는 덤비지도 않고 가소롭다는 듯 유유히 사자 굴로 사라졌다. “무기로는 저 녀석을 죽일 수 없겠구나.” 영웅은 금방 알아차렸다.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가만 보니 금방 꼬리를 감춘 그쪽 말고 또 다른 입구가 있었다. “좋아, 저기를 막아놔야겠다.”

 헤라클레스는 입구 하나를 바위로 막았다. 그리고 올리브 나무 몽둥이를 호기롭게 휘두르며 굴속으로 들어갔다. 사자가 보였다. 녀석은 영웅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헤라클레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몸뚱이를 던졌다. 맨손으로 사자의 목을 졸랐다. 한참을 몸부림치던 맹수는 축 늘어졌다.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가죽을 가진 사자’는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거친 손에 의해 죽었다.

 한편 몰로르코스는 영웅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라도 될 참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지 않자 헤라클레스를 추모하기 위한 제물을 고르려 자기가 기르는 짐승들을 둘러보려 했다. “네가 좋겠구나.” 한 마리 양을 골라 목을 따려는 순간 헤라클레스가 죽은 사자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양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제우스를 위해 바쳐졌다.



네메아의 사자를 무찌른 후 그 가죽은 헤라클레스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가 첫 번째 과업부터 절대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식이 들린다면 ‘그가 실패했다’ 거나 혹은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겠지 상상했다. 그러나, 그에게 들린 소식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지금 헤라클레스가 네메아의 사자를 메고 왕궁으로 걸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서 궁전까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왕은 궁정 마당에 묻혀 있던 청동 항아리 속으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헤라클레스! 앞으로는 그냥 보고는 궁정 밖에서 해라. 명령도 앞으로 내가 직접 내리지 않겠다. 전령을 통해 들어라. 그리고, 그 끔찍한 사자를 가지고 어서 궁정에서 나가!”

 헤라클레스는 말없이 사자를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도 뚫을 수 없던 가죽을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을 이용해 벗겨냈다. 사자의 머리는 처음부터 영웅의 모자였던 것처럼 딱 맞았다. 누구도 뚫을 수 없었던 사자의 피부는 이제 헤라클레스의 몸을 보호하는 훌륭한 갑옷이 되었다.

 여신 헤라의 자비로움 때문에 네메아 출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하늘에서 이 사자를 구경할 수 있다. 봄철 하늘에서 목동자리, 처녀자리와 더불어 봄철 대삼각형을 이루는 사자자리가 바로 그것이다.

‘팀플엔 팀플로’ 히드라에게 게들이 있었다면, 헤라클레스에게는 ‘이올라오스’가 있었다.




두 번째 과업. ‘레르나의 히드라‘

 모든 과업들이 다 그렇겠지만, 헤라클레스에게 내려진 두 번째 과업은 첫 번째 것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였다. 괴물 ‘히드라’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뱀으로, 네메아의 사자와는 아버지만 같은 ‘이복형제‘이었다. 혹자는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골탕 먹이려고 히드라를 키웠다 ‘고 말하곤 한다.

 히드라는 ‘아르골리스의 레르나’ 옆 ‘아미모네’ 샘 근처에서 살았다. 네메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영웅은 저돌적으로 히드라의 은신처를 향해 돌진했다. 마치 물고기를 모는 것처럼 불화살을 날려서 넓은 평지로 유인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너도 금방 끝내줄게!” 헤라클레스는 자신만만하게 머리 하나를 움켜쥐었다. 뱀은 뱀인 모양이다. 히드라는 몸통으로 영웅의 발을 휘감았다.

“얜 또?!”

 칼로 머리 하나를 베어버린 후 그는 ‘쓸모없는 일을 했구나 ‘ 생각했다. 아홉 개의 머리 중 한가운데 있는 머리는 죽지 않았고, 다른 머리는 자르면 그 자리에서 금방 두 개가 새로 나왔던 것이다. 거기다 히드라의 친구들인 큰 게들은 튀어나와 헤라클레스의 발을 집게로 괴롭혔다.

“아, 사자와는 다르구나!”

 혼자서 이 괴물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곧바로 ‘이올라오스’를 불렀다. 그는 이피클레스의 아들이었다. 조카였지만, 헤라클레스는 이올라오스를 친구처럼 생각했다. 그는 불쏘시개를 가지고 헤라클레스에게 왔다. “내가 목을 자를 테니 너는 잘린 머리를 불로 지져라!”

 팀플에는 팀플로 맞서는 것이 정정당당한 승부 아니겠는가? 이제 불사의 머리 하나만 남았다. 헤라클레스는 그것을 재빠르게 잘랐다. 그리고 다시 붙지 못하도록 큰 바위 밑에 묻어버렸다. 무식해 보일지 모르지만, 확실한 대처였다.

 네메아의 사자처럼, 이 괴물 역시 헤라클레스의 좋은 무기가 되었다. 죽은 뱀의 몸통을 가르고 그 피를 화살촉에 적셨다. 이후로 히드라의 치명적인 독은 헤라클레스의 적들을 쓰러뜨리는 좋은 무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독이 자신까지 쓰러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헤라클레스는 피를 무기로 삼는 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와 ‘케리네이아의 암사슴’ 워낙 빠른 탓에 영웅은 1년 동안이나 사슴을 쫓아 다녔다.




세 번째 과업. ‘케리네이아의 암사슴‘


 이후 전령은 세 번째 과업을 영웅에게 전달했다. ‘케리네이아의 암사슴을 산채로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사슴은 황금 뿔을 지니고 있었다.(순록이냐?) 빛나는 뿔은 사냥꾼들의 눈을 사로잡기 충분했지만, 쉽게 사슴을 잡을 생각을 하진 못했다. 이 사슴들은 모두 여신 ‘아르테미스’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헤라클레스가 잡은 ‘네메아의 사자’만큼 이 사슴들도 골칫덩이였다. ‘아르골리스의 오이노에’ 지역을 휘젓고 다니면서 농작물을 못 쓰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슴이 누구의 소유이건 영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업을 수행하러 떠났다. 문제는 이것들이 워낙 재빠른 탓에 무려 1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추격해야 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아르테미시오 산’을 넘어 ‘아르카디아의 라돈 강’ 근처에서 사슴 한 마리를 겨우 생포한다. 과정은 전승에 따라 다른데, 그물로 사슴을 생포했다는 설도 있고, 사슴이 잠들었을 때를 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제는 사슴을 어깨에 메고 지나가는 이 남자를 ‘사슴 주인’이 발견했을 때 일어났다. 여신은 당연히 ‘자기 사슴을 감히 어디로 데려가냐’며 불 같이 화를 냈다. 헤라클레스는 ‘모든 책임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이 과업을 준 에우리스테우스에게 있다’며 여신을 진정시켰다.



 여신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아르테미스는 생각보다 이성적이었나 보다) ‘사슴을 절대 다치게 하지 말고 곱게 다시 풀어주라’고 말했다. 여신은 ‘이제 사슴들이 농작물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슴을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보여준 후 헤라클레스는 짐승을 얌전히 숨 속에 풀어주었다.


흉폭한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역시 헤라클레스에 의해 제압 당한다.



네 번째 과업.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아니, 이걸 잡았어?!”

 왕은 케리네이아의 사슴까지 잡아 온 헤라클레스를 보고 ‘이거 정말 무서운 놈이구나’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즉시 다음 과업을 던졌다. ‘에리만토스 산’ 기슭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오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사슴들처럼 이 멧돼지 역시 농지를 망가뜨리는 아주 골치 아픈 재앙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에리만토스로 향하는 도중에 ‘폴로에 산’을 거쳐 ‘폴로스’라는 켄타우로스족의 집에 들러 쉬었다. 폴로스는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셀레노스’와 물푸레나무 요정의 아둘이었다. 그는 괴팍한 다른 켄타우로스들과는 다르게(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의 종족으로, 말과 같이 거친 야성으로 유명했다) 온순했다.

‘목이 마르다’는 손님의 요구에 따라 창고에서 포도주를 가져와 대접했다. 문제는 포도주의 향을 손님뿐만 아니라 이웃들 역시 맡았다는 점이다. 이웃의 켄타우로스들은 포도주 향을 맡고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한잔만 주시오’ 말하는 대신 그의 집으로 몰려들어 포도주를 뺏으려 했다.

 헤라클레스는 집주인을 괴롭히는 이 못된 이웃들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대부분을 ‘말레아 산’으로 내쫓았다. 소란이 끝나고 난 뒤 영웅은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는 멧돼지를 에리만토스 산기슭에 쌓인 눈 속으로 몰았다. 이번에도 산채로 멧돼지를 묶어 어깨에 멘 채로 궁전 앞에 내려놓자 왕은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 벌벌 떨며 항아리 속으로 숨어 버린 것이다.

 이 과업을 완수한 직후 헤라클레스는 아주 흥미로운 소식을 들었다. ‘이올코스의 이아손’이 ‘콜키스’로 황금 양피를 가지러 가기 위해 그리스 전역에서 영웅들을 모은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영웅들이 자기를 쏙 뺴놓고 모험을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다음 과업을 받는 것을 잠시 미루고 원정대에 합류한다. 이 이야기 역시 흥미롭지만, 지금 필자는 ‘12가지 과업‘을 이야기하는 중이므로 원정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두도록 하겠다.



괘씸 죄에 걸린 영웅의 다음 과업은 지독히 냄새나는 외양간을 치우는 일이었다.



다섯 번째 과업.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


 에우리스테우스는 자기가 내리는 과업을 내팽개치고 모험을 떠난 영웅에게 매우 화가 났다. 다섯 번째 과업으로 아주 품위가 떨어지는 일을 시킨 것에는 이런 ‘괘씸죄’가 작용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모험에서 돌아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했다.

‘엘리스’의 왕 아우게이아스에게는 3000마리의 소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험담을 생각해보면, 괴물도 아니고 그냥 외양간 치우는 일이 영웅에게 별 것이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 외양간을 30년 동안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청소하지 않고 사용한 전기면도기 안에 먼지와 수염들이 들러붙으면 청소하기가 워낙 쉽지 않은데, 30년 동안 청소하지 않은 외양간이라니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헤라클레스는 왕에게 ‘하루 만에 오물을 치울 테니, 소의 10분의 1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왕은 흔쾌히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그가 미덥지 않았던 헤라클레스는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왕의 아들 ‘필레우스’를 증인으로 삼았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한담?”

 고민하는 그에게 두 개의 강이 보였다. 헤라클레스는 외양간 벽을 두 군데 뚫더니 ‘알페이오스와 페네이오스’ 강을 끌어왔다. 강줄기는 단숨에 외양간의 오물 모두를 말끔하게 씻어내 버렸다.

“아니, 과업 중이라며? 보수를 받으면 그게 과업인가? 안 그래?!”

 왕은 헤라클레스의 염려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다. 과업을 하면서 대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며 화를 내는 왕에게 헤라클레스는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는 말만 뱉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엘리스를 떠나야 했다.(다른 전승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왕을 때려죽이고 필레우스를 왕좌에 앉힌 뒤 억지로 소를 받아 왔다고 한다)



괴물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헤라클레스. 뒤쪽에 아테네 여신이 보인다.




여섯 번째 과업. ‘스팀팔로스 호수의 괴조‘

 아르카디아 지방 ‘스팀팔로스’ 호숫가에 울창한 나무 숲은 무리 지어 살고 있는 새들로 악명이 높았다. 거기 있는 새들은 인육을 먹고사는 새들이었다.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바쳐진 이 새들은 청동으로 된 부리와 발톱을 갖고 있어서 처리하기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가끔 새들은 보금자리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청동 깃털을 떨어뜨려 그들을 죽이곤 했다. 독성을 가진 배설물은 농사꾼들에게 큰 골치를 넘어 공포였다.

“잘 생각해봐. 왕은 ‘죽이라’고 하지 않았잖아? 그냥 내쫓으라고!”

 새똥을 잔뜩 맞고 돌아온 패잔병에게 지혜의 여신은 귀띔을 해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니 여신의 말대로였다. 그저 잠시 동안 호숫가에 있는 새들을 내쫓는 것이 조건이지, ‘그것들을 전부 다 죽이라 ‘고 말하진 않았다.

“고맙습니다. 그럼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 굳기 전에 똥을 털어내는 영웅에게 아테나는 한 스푼의 조언을 얹어준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시려고? 어림도 없지. 자, 이거면 충분할 거야.”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종이었다.



 신의 손으로 만든 종이 시끄럽게 호숫가를 가득 채우자 나무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괴물 새들은 참지 못했다. 영웅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 새들을 히드라의 독이 묻은 화살을 가지고 모조리 죽였다.



괴물들을 모조리 무찌른 영웅의 모습은 자연을 정복한 인간의 문명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함께 살펴본 헤라클레스의 12 과업 중 앞의 이야기는 인간이 건너온 옛날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들려준다. 어떤 사람들은 헤라클레스의 과업 완수를 ‘문명화의 알레고리이며 상징’이라고 말한다. 사자, 뱀, 멧돼지, 새 등이 괴물로 등장하는 것은 인간이 문명을 이루기 전 자연에게 가졌던 원시적 공포의 형상화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괴물의 퇴치는 곧 인류가 자연의 공포로부터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을 수 있다면, 곧 그는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인 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일을 ‘신들 중 인간을 유독 사랑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불을 몰래 건네 준 이야기’로 설명한다.


 

 불의 발견과 더불어 자연을 정복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선 순간을 인류사에 중요한 순간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힘만 셌다’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스 역시 ‘제2의 프로메테우스’, 혹은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웅들이 치킨 박스를 들고 웃을 순 없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프로메테우스가 자랑스럽게 들고 갈 치킨 박스‘는 이미 식어있다. 그것을 먹을 누군가가 이미 떠났기 때문이다.



 모든 영웅이 치킨 박스를 들고 웃을 순 없을까? ‘운명의 여신은 잔인하다’며 툴툴대기엔 인간 자체의 운명이 너무나 비참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쩌면 다 식은 치킨 앞에서 오열할 것을 알면서도 내 앞에 있는 문제와 싸울 수밖에 없는 비극을 타고난 것이 어쩌면 영웅, 그리고 모든 사람의 숙명 이리라.

이전 08화 ‘여기 짬짜면은 안 팔아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