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저히 안 되겠어. 졸려서 집중이 안되. 그냥 내일 쓸래.”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머리는 ‘졸리다’며 칭얼댔다.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글“쓰기’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달콤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잠이 달아나기는 커녕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글 친구에게 “나 오늘 빡세게 글 딱 쓰고 잔다.” 호언장담을 한지 한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키보드 대신 베개와 이불을 잡고 눕는 것을 선택했다. 글은 윈도우 업데이트와는 다르다. 저절로 쓰이는 법이 없다. 자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글은 완성되기는 커녕,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냉? 비냉? 아니면 짬뽕? 짜장면?
그것도 아니면 볶음밥?”
“이번엔 누굴 뽑아야 하나...”
“야,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잘 생겼냐?”
인간은 괴로운 존재다.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난제들 때문에 그렇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속 왕자 ‘햄릿’만 결정을 하지 못해 끙끙대는 것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다. 차라리 남을 따라가거나 혹은 선택을 아예 미뤄 버린다.
무엇을 선택하는 일은 왜 그렇게 우리를 멈칫하게 하는 것일까? 인간은 어쩌다가 ‘결정장애’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었을까? ‘선택은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 그것이 무엇이냐는 차치하고, 우리의 선택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다’ 따위의 생각들이 우리의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가벼운‘ 한 번의 선택이 가져오는 ‘무거운’ 결과의 무게 때문에 쉽사리 결정을 못하는 것은 아닐지.
‘어느 것을 고를지 척척 박사님께 물어본다’는 명목하에 오늘도 우리는 손가락을 세우고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휘젓는다. 오늘은 그런 우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어떤 이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보려고 한다.
한 때 코흘리개였던 영웅, 페르세우스가 세웠다고 알려진 ‘미케네’의 세 번째 왕 ‘엘렉트리온’에게는 대단한 미모와 지성을 갖춘 큰 딸 ‘알크메네’가 있었다. 이런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 '암픽트리온'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엘렉트리온은 암픽트리온에게 ‘소를 되찾아오라’고 요구했다. 소를 팔았다는 ‘테살리아’ 왕을 찾아가 소 300마리를 되찾아 온 암픽트리온에게 엘렉트리온은 불 같이 화를 냈다. 왜냐고? 그걸 현금을 주고 사 온 거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한 거냐’며 질책하는 왕 앞에서 불쾌한 감정을 차마 숨기지 못했던 이 남자는 원반을 무심코 땅에 던진다. 하필 그 행동이 암픽트리온을 살인자로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원반은 튀어 올라 왕의 이마를 가격했고, 엘렉트리온은 죽었다.
왕의 동생 ‘스데넬로스’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암피트리온을 ‘살해범’으로 몰았다. (아니, 이건 당연한건데?) 그리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앉는다. 알크메네는 암피트리온과 함께 테베로 망명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달이라도 따주겠소‘ 어쨌든 말이라도 뱉는 것이 남자의 불타는 가슴 아니던가? “결혼 전 타포스인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오빠들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당신과 사랑을 나눌 수 없어요“ 말하는 알크메네를 위해 남편은 길을 떠난다.
손톱을 먹고 사람 행세를 한다는 쥐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알크메네가 손톱을 깎고 함부로 버리진 않았다. 그런데 왠지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금방 돌아왔소’ 이야기하는 남편은 쥐가 변한 것이라기엔 너무도 잘생긴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그건 쥐가 아니라 올림포스에서 내려온 제우스였거든. 암픽트리온이 승리를 하고 돌아오기 ‘바로 전날’ 알크메네를 찾아왔던 것이다.
난봉꾼으로 소문난 제우스였지만, 어쨌든 명분은 있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식들인 거인 ‘기간테스‘와의 싸움을 위해 신들의 편에서 싸워 줄 영웅이 필요했다. 그래서 최고 신인 제우스는 미모와 지식을 겸비한 알크메네를 통해 아들을 얻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혀 알리 없던 ‘인간‘ 알크메네는 ‘자신의 원수를 갚고 돌아왔다‘고 말하는 이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너무나 달콤한 탓이었을까? 아니었다. 분명 어제 돌아온 남편이 어제 보여줬던 표정,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보여주었던 탓이었다. ‘대체 어제 그 남자는 그럼 누구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갑자기 잔뜩 마신 것도 아니건만 알크메네의 머리는 시큰하다.
암피트리온도 아내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음은 분명했다. ‘원수만 갚으면’ 함께 뜨겁게 사랑할 줄 알았는데, 뜨겁기는 커녕 오히려 미적지근했다. 아니,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남편의 궁금증은 예언가 ‘메이레시아스’의 말을 듣고 해소되었다. 시원하기보다 머리가 뜨거워졌던 것은 물론 문제였다.
‘신의 뜻입니다’
고귀하신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땅의 사람들’이 알겠는가? 증오로 불타는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래, 뭐 내 잘못은 아니니까.’ 한편 제우스는 아들이 태어날 때가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들을 잔뜩 모아놓고서는 큰 소리로 선언했다. 앞으로 ‘페르세우스 일가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땅을 호령하는 왕이 될 것이다’는 말에 헤라는 깜짝 놀랐다. "정말입니까?" 제우스는 ‘스틱스강에 대고 맹세한다’고 말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이다) 곧 그 가문에서 태어날 아이는 헤라클레스 뿐이었으니까.
사실 헤라는 다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 역시 ‘신’ 아니던가? 즉시 산파의 여신 ‘에일레이티아’를 보내서 알크메네의 출산을 지연시켰다. 그 사이 헤라는 페르세우스 가문의 또 다른 남자 ‘스테넬로스’의 아내가 석 달이나 빨리 출산하도록 만들었다. ‘에우리스테우스‘의 탄생이었다.
속고 속이는 일이 인간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우스는 아내에게 속은 것이 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틱스강에 대고 한 맹세’는 제 아무리 신 중의 신이라도 무를 수 없었다. 에우리스테우스는 후에 제우스의 말대로 ‘티린스’의 왕이 되었다.
한편, 알크메네는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해산의 여신이 방 밖에서 도무지 자기를 돕지 않고 가만히 앉아 해산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알크메네의 하녀였던 ‘갈란티스’는 묘안을 떠올렸다. 갑자기 알크메네의 방에서 뛰쳐나가오면서 환호성을 질렀던 것이다. “아들입니다! 아들이 태어났어요! “에일레이테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알크메네가 몸을 풀었다. 출산의 여신은 생각보다 화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자신을 속인 ‘갈란티스’를 족제비로 만들어 버렸으니.
알크메네는 쌍둥이를 낳았다. 제우스와 암피트리온이 하루 간격으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신화는 고대인들의 사고와 인식의 한계 안에서 만들어졌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암피트리온은 둘의 이름을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로 지었다.
헤라의 분노는 두 쌍둥이 중 자신의 이름이 붙은 녀석에게 쏟아졌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출산 후 8개월이 지난 아기들의 요람 안에 독사 두 마리를 넣었다. 이피클레스는 놀라 큰 소리로 울었다. 당연하다. 아기였으니까. 그런데, 여신의 이름을 가진 다른 아기는 달랐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너무나 침착하게 독사의 목을 졸라 죽였다.
제우스는 아들이 자신을 완전히 닮았으면 했다. 신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다. 그러기 위해서 아기는 헤라의 젖을 맛보아야 했다. 제우스는 아내가 잠든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헤라클레스를 데려와 젖을 물렸다. 문제는 헤라클레스가 그만 헤라의 살을 깨물었을 때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헤라는 자기도 모르게 아기를 뿌리쳤다. 순간 젖이 하늘에 뿌려졌다. 하얀 길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푸른 하늘 은하수를 영어로 ‘우유 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성장하면서 헤라클레스는 강남 8학군 지역의 아이들 만큼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암피트리온은 전차 모는 법을, 천부적인 도둑 ‘아우톨리코스’에게서 레슬링을, ‘오이칼리아의 왕 에우리토스’에게서 활을, ‘카스토르‘에게서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선조 페르세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헤라클레스 역시 신의 가호를 받았다. 헤르메스는 칼을, 아폴론은 활과 화살을, 헤파이스토스는 황금 갑옷을, 아테나는 외투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흥이 떨어졌으니 책임을 졌던’ 오르페우스의 동생 ‘리노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불행하게도 영웅은 음악에 소질이 없었다. 자꾸 실수를 하자 선생은 심하게 꾸짖었다. 하지만 매는 들지 말아야 했다. 순간 분노한 헤라클레스는 ‘리라’(현악기의 종류)로 스승의 머리를 쳐서 죽게 만들었다. 무죄방면 되었지만(예?) 암피트리온은 아들의 과오를 그냥 넘어 갈 수 없었다. 아들을 ‘키타이론’산으로 보내 거기에서 목장 일을 하며 반성하기를 바랐다.
할 일 없이 보내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깊은 생각에 빠진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이 강한 힘을 타고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고민하는 헤라클레스에게 갑자기 두 여인이 나타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제시하는 인생의 길을 따르라’고 말한다. 헤라클레스에 대한 전승 중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에 기록된 ‘헤라클레스의 선택’ 이야기다.
이 둘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미덕과 악덕’으로 불리기도 하고, 탁월함을 상징하는 ‘아레테’ 여신과 악덕을 상징하는 여신 ‘카키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헤라클레스의 선택’ 이야기는 미술사에서 많은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체로 악덕의 여신은 풍만하고 화려하며 요염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반면, 미덕의 여신은 고귀하고 정숙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악덕’은 세상의 온갖 즐거움,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제시한다. ‘악덕’이라는 이름이야 어찌 되었든 그런 것들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다. 헤라클레스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그때 ‘미덕’은 그에게 한 손으로 언덕을 가리킨다. 그곳은 멀리 있다. 아득하고 험준하다. 그녀는 말한다.
“그 길은 가시밭길처럼 험하고 고통스러울 거예요. 나는 감언이설로 당신을 현혹하지 않아요. 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아름다움은 오로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어요. 따라서 당신이 신의 은총을 받고 싶다면 신을 공경해야 하고, 친구의 믿음을 얻고 싶다면 먼저 친구에게 선을 베풀어야 해요.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하여야 하지요. 그것은 땅에서 풍요로운 결실을 얻기 위해 땀 흘려 경작하여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답니다.”
헤라클레스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영웅 이야기가 일종의 ‘클리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쾌락과 행복을 선택하는 대신 저 먼 언덕, 과업과 괴로움, 땀 흘리는 일을 가기로 한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오늘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몰라도 우리는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중국집에 가면 ‘짬짜면’이 있지만, 인생이라는 메뉴판에 그런 요리는 없다. 이것을 선택 하던지, 아니면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
‘무조건 미덕을 선택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고결한 것? 도대체 고결함이란 무엇인가? 미덕이란 무엇인가? 사실 그런 것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았던가?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럴듯한 포장지를 뜯어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귀한 것을 선택하라고? 아니, 차라리 믿어라. 믿어 버리라고! 네가 선택한 그 길을 고귀하다고 믿어라.’
글쎄,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야’ 말하며 당신의 어깨를 두드려야 할까? 아니, 미안하지만 헤라클레스는 “여기 짬짜면은 안 팔아요“ 라고 했다.
선택을 미루는 것도 선택이다. 선택을 넘기는 것 역시 선택이다. ‘인생에는 반반치킨은 둘째치고, 짬짜면은 없다’며 울지 마라. 차라리 선택을, 선택 해야 하는 삶 자체를 사랑하라.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면, 차라리 그 삶 자체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