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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Sep 06. 2020

‘다시 보니 영웅 같다'

모험, 그리고 성장.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꾸준히 해.”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다른 일들을 하느라 잠시 쉬고 있지만, 늘 한결같이 생각하고, 목표했던 것이 있다.


 “선생님, 저 이번에 등급 엄청 올랐어요. 담임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던데요?”


 '아무 것도 몰라요' 얼굴을 붉히며 이야기했던 학생과 수업을 하다 보면 어느 새 함께 몰입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내 모습도 좋지만, 수업에 몰입하는 학생들을 마주하며 참 행복했다. 등급이 오르고, 원하는 점수를 얻고, 대학에 합격하는 일을 보는 것은 덤이었다.



몰입은 꾸준함을 낳는다. 꾸준하면 변한다.



 몰입하면 꾸준히 하게 된다. 꾸준히 하면 달라진다. 몰입하도록 돕는 것, 꾸준히 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스스로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는 일, 그것이 ‘선생’으로서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바뀐다. 몰입의 스위치만 올려주었을 뿐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분명 몰입을 통해 우리는 바뀐다. 완전히 바뀐다. 이제 부모님과 선생님, 친구들은 이 아이를 ‘괄목상대’ 해야 할 것이다.


 괄목상대.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대한다’는 사자성어다. 눈을 비비고 상대방을 다시 봐야 할 정도면 분명 모르긴 해도 뭔가가 갑자기 달라졌음에 분명하다. 대체 누가, 어떤 변화를 이루었길래 이런 말이 생긴 것일까?


 삼국지의 여러 호걸들 중 오나라의 왕이었던 손권에게는 ‘여몽’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장군으로서 무력이 뛰어났지만, 학식은 없었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여겼던 손권은 여몽을 조용히 불러 “그대가 나라의 큰일을 앞으로 도맡아야 할 텐데, 그러려면 글을 읽고 공부를 하여 지식을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권했다. 여몽은 이때를 계기로 학문에 정진했다.



오나라의 장수 여몽. 괄목상대의 원조다.



 여몽이 공부를 뒷전으로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집안이 공부를 뒷바라지 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여몽은 주군의 권유를 따라 학문을 가까이 했다. 얼마나 지난 후였을까? 그를 무시했던 재상 ‘노숙’은 여몽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실 여몽은 진수가 ‘정사 삼국지’에서 평가하듯 ‘힘이 넘쳐 툭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다반사로 하는 무장‘에 불과했다.



 그랬던 여몽이 학문을 접한 뒤 딴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는 ‘싸움꾼’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그릇’이 된 것이다. 자신을 보고 놀라는 노식을 보고 말했듯 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대할 만큼, ‘괄목상대‘의 성장을 이뤘다.



왕은 죽음이 두려워 딸을 가두었다. 황금 소나기가 내리던 날, 딸은 엄마가 되었다.



 여기 다른 한 남자가 있다. 앞서 나온 사르곤 1세가 무색할 만큼 그 역시 흔한 영웅의 비범한 탄생 이야기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가히 충격적이다. 그는 ‘잠재적 패륜아’로 태어났거든. 이게 무슨 말이냐고? 그가 잉태도 되기 전에 그의 외조부 ‘아크리시오스’는 손자의 손에 죽을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아무리 모두가 죽는다고 해도 ‘손자에게 살해 당하는’ 죽음이라니. 그는 운명을 피하고 싶었다. 딸 ‘다나에’를 높은 탑에 감금했다. 황금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날 딸은 엄마가 되었다. 제우스가 황금 소나기가 되어 몰래 다나에를 임신시킨 것이다.


 아버지는 잔혹하게도 손자가 태어나자 마자 딸과 손자 모두를 나무 궤에 가뒀다. 죽음을 피하겠다는 강한 열망만큼 세차게 그것을 바다에 던졌다. 나무 궤는 '세리포스 섬' 해안에 닿았다. '딕티스'라는 어부가 나무 궤를 거뒀다.



나무 궤는 ‘세리포스 섬’에 닿았다. ‘딕티스’라는 어부가 나무 궤를 거뒀다



 “안된다고 했잖아요!”


 딕티스는 아이와 어머니에게 친절했다. 문제는 그의 형제 ‘폴리덱테스’였다. 어부의 형제는 그 땅을 다스리는 왕이었다. 모든 것을 가졌던 그는 나무 궤에서 나온 여인의 마음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계속해서 다나에는 거절했지만, 왕은 끊임없이 추파를 던졌다. 어느덧 소년의 티를 벗을만한 모습이 된 아들은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를 지키겠다고? 좋아, ‘메두사의 머리’를 가져와라. 그러면 나도 더 결혼하자고 하지 않으마.”


 메두사가 누구인지 소년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르곤 자매 중 하나였다. 한때 미모를 뽐냈지만, 아테나 신전에서 포세이돈과 동침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아테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메두사를 괴물로 만들었다. 찰랑거리던 머리카락은 독을 품은 독사의 머리가 되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원했던 그녀의 눈빛은 이제 모든 것을 돌로 만드는 죽음의 광선이 되었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이슈타르’의 도움을 받았던 사르곤처럼, 소년 역시 신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소년을 ‘아틀라스의 산’으로 인도했다. “메두사는 어디에 있죠?”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소년은 ‘그라이아이’라고 불리는 마녀 세 자매에게 물었다. “글쎄? 어디에 있을까?” 한껏 위축된 소년을 조롱하듯 그들은 답을 주지 않았다.



소년은 하나 뿐인 그라이아이의 눈을 낚아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느 새 땀이 흐르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때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세 자매가 하나의 이빨과 하나의 눈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년은 하나 뿐인 그라이아이의 눈을 낚아챘다. 시장에서 사과 한알 쯤 우습게 슬쩍할 만한 민첩함이었다.


 “아악!! 이리 내놔!! 내놔!!”


 눈이 없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무시당했던 코흘리개가 이겼다. “자, 너에게 줄 것들이 있단다.” 신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었다. 헤르메스는 다이아몬드로 만든 날카로운 낫과 날개 달린 신발을, 하데스는 쓰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모자를, 미의 3여신은 마법의 자루를, 아테나는 거울로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번쩍이는 방패를 빌려주었다. 모든 선물들이 다 그랬지만, 마지막 선물이 가장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었다. 메두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접근하려면 ‘거울’이 필수였으니까.


 고르곤의 거처에 도착하자 수 많은 돌덩어리들이 소년을 환영해주었다. ‘나도 방심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차마 혼잣말조차 뱉을 수 없이 긴장하며 그는 속으로 말했다. 조심스럽게 방패를 꺼냈다. 얼마나 닦았을까? 거울처럼 주변의 광경이 비치기 시작했다. 방패를 거울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떨며 메두사를 찾기 시작한다.



고르곤 자매의 그림으로 장식된 항아리.



'아니 이게 무슨...'


  청동 손과 황금 날개를 갖고 주둥아리에는 어금니처럼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 날름대는 혀. 거기에 흐느적거리는 실뱀들까지. 메두사 뿐만 아니라 고르곤 세 자매 모두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비명을 억지로 참고 그들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미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메두사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어머니를 위해 어쩔 수 없습니다.” 낫이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여자 메두사는 결국 그렇게 죽었다. 메두사의 비명을 듣고 자매들이 일어났지만, 이미 범인은 솟구친 핏속에서 나온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를 타고 도주한 뒤였다. 얼굴도 모르는 적과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그저 목 잘린 자매의 곁에 내려 앉아 통곡하며 죽음을 애도 할 뿐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돌이 될 위협도 무릎 쓴 효자는 이제 세리포스로 돌아간다. 그런데 정말 남자가 되었던 것일까? 우연히 바위에 사슬로 묶인 여인이 귀향하는 효자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케페우스’와 ‘카시오페이아’의 딸 ‘안드로메다’였다.


 가련한 공주는 바다괴물 ‘케투스’의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 주저하는 기색 없이 마법의 자루에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어 자랑이라도 하듯 바다괴물 앞에 휘두르자 괴물은 처음부터 돌덩어리였던 것처럼 굳어버렸다. 누가 청춘을 막을 수 있을까? 둘은 부부가 되었다.



무엇이 청춘을 막을 수 있을까? 둘은 부부가 되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겁 없는 코흘리개는 이제 날개 달린 말을 타고 괴물을 무찌른 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찬 용사는 다시 돌아와 어머니에게 치근덕댔던 불한당에게 “자, 이제 약속대로 했으니 그만두시오.” 말하는 대신 조용히 자신이 어떤 괴물을 잡았는지 눈앞에 보여주었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 폴리덱테스는 더 욕심을 부리다 결국 돌이 되었다.  


 모든 모험에는 목적이 있다. 무엇을 상실했거나, 얻어야 하는 사람. 무엇인가를 반드시 얻어야 하는 자가 일상에서 모험에 뛰어든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고난을 겪으며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그의 책 <신화의 힘>에서 영웅이 이루는 행적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이다.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든 것들이다.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이다. 캠벨은 이 행적을 통해 영웅이 인간의 일반적 삶의 범주를 벗어난 ‘이상한 체험’을 하고 귀환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모험은 고대의 성인식‘이다.


 코흘리개들이 성인식을 통해 어린 시절의 생각과 습관을 내던지고 어른이 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얻은 것처럼, 영웅 역시 처음부터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소년은 모험을 통해 미성숙한 모습을 극복하고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을 책임질 수 있는 ‘영웅’의 모습으로 성숙한다



미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하는 것은 아니다.



 미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모험을 마친 꼬마가 돌아왔을 때, 그에게 황금갑옷이나 날개 달린 말 따위가 없어도 반드시 그를 ‘괄목상대’ 해야 한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분명 코흘리개였던 아이는 어느 새 ‘영웅 같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한 남자가 되어있을 것이다.


 아, 깜빡 잊고 주인공의 이름을 빼먹었다. 소년에서 영웅이 된 사나이, 티린스의 통치자이자 미케네의 건설자, ‘페르세우스’ 이것이 ‘다시 보니 영웅 같은 남자’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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