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는 인간 Sep 05. 2020

‘대왕님은 이웃집에 안 계셔’

영웅의 비범함은 ‘비범할 수 있음’이다.

 한 시골 마을에 가족이 이사 왔다. 11살과 4살 먹은 딸들과 시골로 들어온 부부에게는 사연이 있다. 몸이 아픈 아내는 도시를 떠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요양해야 했다. 사랑하는 엄마의 건강을 위해 가족은 숲 한복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낡은 집에 새 둥지를 틀었다.



 동생은 외롭다. 언니야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있지만, 동생은 오롯이 혼자 버텨야 한다. 아직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탓에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바로 그때였다. 꼬마의 눈이 조그맣고 이상한 동물에게 홀린 것은.



 ‘저게 뭐지?’



 처음 보는 동물을 따라가는 것은 어쩌면 동화 속 소녀만의 운명은 아니었는지 작은 소녀는 뒤를 쫓아 숲속으로 빨려가듯 들어간다. 숲속에 평탄하고 걸을만한 ‘길’은 없었다. 마치 꿈에서 그러는 것처럼 소녀는 뚝 떨어졌다.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휙 지나갔던 그 동물이 얌전히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신기한 동물을 만났다’ 자랑하는 동생의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아빠가 우산을 미리 챙겼다면 끝까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쏟아지던 날, 자매는 ‘토토로’를 만난다.



 아이들의 순수함은 ‘두려움’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다. ‘저게 해코지를 하면 어쩌지?’ 생각은 둘째 치고, 비를 맞고 있는 이름 모를 짐승에게 언니는 우산을 빌려주었다. 사람은 아니지만, 동물들에게도 ‘기브 앤 테이크’의 원리는 흔한 것이었을까? 우산을 건넨 작은 손바닥에 더 작은 씨앗, 도토리나무 씨앗을 쥐여줬다.



 이상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더불어 애니메이션 시장의 쌍벽을 이루는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의 작품 '이웃집 토토로' 이야기 중 일부다. 필자도 재미있게 감상했던 이 작품은 ‘도대체 토토로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과 얽힌 몇 가지 괴담이 있다. 하지만, 공식 표명한 것처럼 이 작품은 특정 범죄 사건과 연관 없다.



 지브리의 작품뿐만 아니라, 일본은 애니메이션 안에 자국의 문화를 자연스레 녹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작품 역시 그렇다. 토토로는 일본의 민간 신앙 속 숲의 주인이다. ‘모노노케 히메’와 다르게 ‘이웃집’이란 친근함을 가지고 ‘숲의 주인’을 표현했다.

영웅은 비범함을 가지고 일반인과 자신을 분리한다.




 영웅은 사람들 사이에서 분리되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탄생부터 신비롭다. 비범함이 하늘을 찌른다. 분명 다른 점이 있다. 평범하지 않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왕족이다. 혹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엄친아였다. 그것도 모자라 ‘2/3이 신’이란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숲의 주인’이었지만 아이들이 서슴없이 다가갔던 ‘이웃집’ 토토로의 모습을 닮은, 그런 영웅도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 왕 위의 왕. ‘제국과 황제’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은 감히 쳐다보지 못할 위엄을 가진 ‘황제’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니 ‘이웃집’도 모자라 보통 이하라고 부를만한 환경에서 시작했다면, 그런 이야기가 진짜 있다면 당신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자유로운 모두의 어머니, 강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비옥한 초승달 모양의 땅을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강은 그 때도 짙은 하늘빛을 머금고 흘러가고 있었다. 이집트에 나일강이 그런 것처럼 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강물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젖줄과 같았다.



 ‘어머니 강’을 중심으로 모인 '형제' 도시 국가 중 가장 강력했던 '키시'가 있었다. 거기 왕의 정원사로 요즘 같았으면 ‘금손’이라고 불렸을 ‘아키’라는 사내가 있었다. ‘아침 일찍 어머니 강에서 정원을 가꿀 물이나 떠와야지’ 생각했을 그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무성한 갈대밭 사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무시할까?’ 잠시 생각했다.



  역시 그냥 가기에는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나라에서 몰래 들어왔다면?’ 도망치고 싶었지만, ‘왕의’ 정원사라는 자신의 책무가 왠지 생각났다. ‘정원사’이지만, 그래도 높으신 왕을 보좌하는 일이 의무 아니던가? 칼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 남자는 죽을 각오로 덤벼보기로 한다.



 “야, 이 몹쓸 놈아! 어디 한번 매운 맛을 봐ㄹ...”

바구니였다. 거기 뽀얀 얼굴의 아기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신세에 무슨 무용담이람?’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뽀얀 얼굴에 포동포동한, 누가 봐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가 갈대 바구니에 담겨 어머니 강에게 떠밀려 온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였던 모양이다. 어디서부터 떠내려왔는지 몰라도 아기는 용케 여기까지 와서  사내를 만났으니 말이다.



 “어라? 이건...”



 아이의 목에는 ‘이슈타르’ 신전 표식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하늘의 집’(이슈타르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하늘의 여신’이다.)에서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정원사는 왕에게 자신이 ‘아기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말했다. 왕은 별 생각 없었다. 아이가 장차 어떤 모습이 될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당시 신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여사제와 동침하는 것으로 제의가 끝났기 때문에 여사제로부터 태어난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흔했다. 이런 이유에서 왕은 별 생각 없이 그를 궁으로 들였다. ‘흔하디 흔한 출생’ 최초의 제국을 만든 사르곤은 출생에 대해 토판은 그렇게 말한다.



 ‘나는 위대한 임금이자 아카드의 임금인 사르곤이다. 내 어머니는 여제사장이었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분명 다른 영웅들의 시작과는 다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은 편지를 갖고 대장간으로 간다.


 


 키운 정을 쏟은 아버지를 따라 사르곤은 정원사로 일했다. 그러다 키시 왕조의 ‘우르-자바바’왕의 치세에 왕의 술을 담당하는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다. 잘 생각해보라. 그만큼 왕의 신뢰를 잔뜩 받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사르곤은 꿈을 꾼다.



 “이슈타르가 왕을 피의 강에 빠뜨려 죽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슈타르’가 죽인다는 것은 이슈타르 신전 출신인 사르곤이 왕을 죽일 것에 대한 암시였기 때문이다. 왕은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을 대장간에 보낸다. 대장장이에게 ‘사르곤을 거푸집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한다. 기가 막히게 이슈타르는 사르곤에게 나타난다. ‘그곳에 가지 말아라’ 말한다. 사르곤은 목숨을 건졌다. ‘이슈타르께서 줄곧 나를 사랑하셨다’는 토판의 언급은 이런 점에서 어느 정도 납득할 만 하다.



 ‘신의 가호’가 정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소년에게만큼은 분명 뭔가 있었다. 왕은 다시 우루크의 ‘루갈-자게-시’ 왕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또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사르곤은 기적처럼 죽지 않았다.  ‘해치웠나?’라는 소리를 들은 주인공처럼.

사르곤 1세로 추정되는 청동 두상.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여사제의 아들은 왕이 되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주도권은 앞서 언급한 우루크의 왕 루갈-자게-시가 잡고 있었다. 사르곤은 그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루갈-자게-시는 50명의 총독을 거느리고 사르곤과 싸움을 했다. 패권을 건 전투였다.



 우루크의 왕은 패배했고, 사로잡혔다. 포로에게 영광은 없다. 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니푸르에 있는 ‘엔릴의 문’으로 끌려 나와 치욕을 당한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사르곤은 우르와 라가쉬, 움마 같은 도시국가를 차례대로 정복했다. ‘아가데의 사르곤’(아가데는 아카드의 다른 말이다) 속  표현 그대로 '이 모든 도시들의 성벽을 다 뜯어버렸다'



 페르시아 만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 ‘에닌키마르’까지 사르곤의 군대가 밟지 않은 땅은 없었다. 사르곤은 페르시아 만 앞까지 닿았다. 피로 흥건한 무기를 바닷물에 담근다. 파도가 오더니 빨갛던 칼날은 제빛을 찾았다. ‘여기까지 정복했다’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장군들과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토판은 이 일에 대해 ‘엔릴과 이쉬타르’가 키시 왕조와 우루크를 멸망시켰고, 왕권을 사르곤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경쟁자는 커녕 동등한 자 조차 없었다. 사르곤의 이름은 온 땅에 퍼졌다.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넜다. 서쪽으로는 땅끝까지(그들의 세계관 안에서의 땅끝이다) 정복했다. 위대한 왕의 동상이 세워졌다. 서쪽의 전리품들 모두를 배에 가득 실어 날랐다. 민족들은 하나가 되어 정당한 통치(사르곤은 ‘정당한’/‘정당한 왕’이라는 뜻이다)에 복종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와 진의 진시황. 둘 다 ‘최초’의 황제가 아니다.




 ‘황제’라는 개념은 본디 중국의 ‘삼황오제’에서 기원했다. 역사서 ‘십팔사략’에는 인간에게 사냥법과 불을 알려준 복희, 농경을 전파한 신농, 집과 옷을 만들고 수레를 발명하며, 글자를 알려주고 천문과 역산을 시작한 헌원이 ‘삼황’이며, 이들의 아들이 ‘오제’이다. 물론, 실존인물은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진시황’이, 지중해 문화권 안에서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최초로 자기를 부르는 칭호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고 해서 최초의 황제는 아니었다. 진과 로마 이전에 나라를 다스린 나라, 왕 위의 왕은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오늘 글 속 주인공 아카드의 사르곤 1세다.



 그의 통치는 메소포타미아, 현재 이란과 시리아, 아나톨리아(터키) 반도 일부와 아라비아반도 북부, 엘람에서 지중해까지 닿았다고 기록한다. 사르곤은 ‘아카드’라는 도시를 최초의 제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생아에서 황제까지, 그의 인생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대체 왜 평범하다 못해 비참한 그의 출생은 누락되거나 신화화 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기록되었을까?

대왕님은 이웃집에 안 계신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후세의 사람들의 몫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왕님은 더 이상 이웃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르곤은 아버지가 ‘미국’인지 어딘지 가버린, 평범 이하의 출신이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과거야 어찌 되었든’ 지금 그는 더 이상 ‘이웃집 토토로’가 아니라 ‘사르곤 대왕’이다.



 사람이 ‘수저’로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되었든, 필자는 '인간이 처음 무슨 색의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풍요로운 황금시대에 태어났어도 무의미하게 한량의 삶을 살다가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저주받았다’고 말하는 혼란의 시대에 태어났어도 기어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삶을 짜내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웅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시작은 토토로의 ‘이웃집’이었다. 평범했거나, 혹은 사르곤처럼 그 이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이 중요하다. 영웅은 ‘이웃집’에서 머물지 않는다. 환경을 탓하는 대신 자기가 가진 것들을 가지고 운명에 맞선다. 결국 그 성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어떤 이는 ‘신의 영역’까지 올라가 추앙받는다.




 비범함은 여기서 출발한다. 다음 이야기에 나올 어떤 남자처럼, 영웅은 운명에 맞서는 일을 통해 보잘것없는 소년에서 시작해서 ‘찐 으른’이 된다. 그들의 비범함은 사실 평범함, 혹은 그 이하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만 들여다 보면 곤란하다. 이웃집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제 무의미하다. 그 곳은 비었으니까.



대왕님은 이웃집에 계시지 않는다.



이전 05화 ‘나 다시 돌아갈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