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없다. 이해관계만 있을 뿐.
‘빰빰빰! 굿모닝!’
‘굿모닝은 무슨 얼어 죽을...’
알람을 끈다. 맞추지도 않은 또 다른 알람이 들린다.
"아들, 일어나!"
어머니다. 아들이 늦기라도 할까 방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노심초사하셨다. 매번 정성스레 아침을 차려주셨던 어머니께 죄송하지만, 사실 아침밥 먹는 시간이 싫었다. 정확히는 학교 가는 아침이 싫었다.
고등학교 때는 더 그랬다. 학교가 워낙 먼 탓에 야자를 끝까지 안 해도 된다는 점은 좋았지만, 새벽 여섯 시 반 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아, 학생 때가 좋았다 진짜...’
사회에 나와 일을 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명찰을 달고 머리를 박박 밀고, 자유란 없어 보였던 그 시절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구가 있었다.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 행복했다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회사엔 친구가 없다. 다만 상사와 부하 직원(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료라고 부르는 누군가가 있을 뿐이다.
‘사정이 다 있구나’
이쯤 되니 그런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은 학생대로, 월급쟁이는 직장인대로 각자의 사정이 있다.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는 각자의 입장이 있다. 물론, 현대인에게만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 지금 꽁지가 빠지게 달리고 있는 어떤 남자처럼.
30년 첫째 계절, 세 번째 달 일곱번째 날, 신이 그의 지평선에 올랐다. 무슨 말이냐고? 파라오가 ‘하늘로 올라갔다’ 이 말이다. 상하 이집트의 왕 ‘세헤텝이브레’는 하늘로 올려져 태양 원반과 연합되었다. 왕이 죽었다.
온 도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애도했다. 신하들은 모두 머리를 무릎에 대고 엎드렸다.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비아인들의 땅에 보낸 군대와 그 지휘관, 왕자 세누세르트는 포로들을 잔뜩 잡아다가 한껏 높아진 어깨로 귀향 중이었다.
왕궁에서는 왕자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도록 돌아오는 서쪽 경계 지역으로 사람을 보냈다. 사신들은 저녁 시간에 그를 만났고, 왕자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 자기 군대에도 알리지 않은 채 그는 아주 비밀스럽게 새로운 파라오가 되려고 했다.
비밀은 없는 법이다. 병사들 사이에 이야기는 스며들었고, 다른 왕자들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하러 나갔던 사람들 중에 ‘시누헤’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귀족, 재판관이자 파라오와 진정한 친분이 있는, 그가 사랑하는 자였다. 눈치가 빨랐던 그는 다른 왕자들이 승하에 대해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곧 피바람이 불 거야! 도망쳐야 한다'
본능은 소리쳤다. 마음은 심란했고 팔은 펼쳐졌다. 곧 사지에 전율이 엄습했다. 숨을 곳을 찾아 빨리 떠나야 했다. 덤불 사이에 숨었다. 시누헤는 어떻게든 도로와 사람 다니는 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사방이 고요해지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쪽으로 달렸다. 단풍나무 숲 근처 ‘마아티 호수’를 지났고, ‘스네프루 섬’이 보였다. 그는 들의 끝자락에서 하루를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태양이 자애로운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침이다.
도망자는 정신없이 경외심을 표하는 남자를 가볍게 지났고, 황소의 마을도 뛰어넘었다. 키 없는 배를 탔지만 서풍이 도와주어 무사히 강을 건넜다. 황량한 채석장을 지나자 ‘통치자의 벽’이 보였다. 아시아인들을 막고 ‘모래를 건너는 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벽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멀리도 왔구나.’ 생각했다.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경비병들이 그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꼼짝하지 않고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걷기 시작한 시누헤는 ‘페텐’에 도착했다. 다시 해가 떴다. 갑자기 죽을 것 같았다. ‘목마름’이 그를 덮쳤다. 갈증이 비로소 느껴졌고, 목에 모래 먼지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것이 죽음의 맛이구나!”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직 죽음의 맛을 볼 때가 아니었나보다. 가까운 곳에서 ‘소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시아인들이었다.
"아니, 어르신! 시누헤 어르신이 아니십니까?"
이집트에 온 적이 있는 그들의 지도자는 놀랍게도 그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시누헤를 알아보았다. 덕분에 물과 우유를 얻어 마셨다. 부족촌으로 함께 들어간 도망자는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자리에 들었다.
편하다고 해서 거기서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다시 일어나 다른 나라를 향해 움직였다. 시누헤는 지금의 시리아에 해당하는 ‘레테누’의 통치자인 ‘암미엔시’를 만나 그의 나라로 갔다. 암미엔시는 그를 자기 장녀와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서 가장 좋은 땅을 선택해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무화과와 포도가 가득했다. 거기에는 포도주와 꿀, 올리브가 넘쳐났다. 나무에는 각종 과일들이 열렸고, 소들이 끝도 없이 있었다. 시누헤는 그 나라 최고 부족의 족장이 되었다.(왕이 아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시누헤의 아이들은 각자 자기 부족의 지배자가 되었다. 북으로 가는 사람이든 남으로 가는 이든 누구나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길 잃은 자에게 길을 안내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를 만나 살게 되었다. 아시아인들은 이방인에게 적대심을 품었지만, 시누헤는 전략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레테누 땅의 통치자는 수년간 시누헤를 군대의 지휘자로 삼았다.
적들이 그 앞에서 맥을 못추는 것을 보고 레테누의 강한 자는 시기심을 품었다. 그는 나라 안에서 견줄 자가 없는 사람이었고, 만인을 무찌른 자였다. 시누헤가 가진 재산을 빼앗기 위해 이 불한당은 그에게 결투를 하자고 말했다. 아침이 되자 시누헤를 향해 전투 도끼와 한 아름의 창이 날아왔다. 그는 시누헤를 공격했지만, 시누헤의 활이 그 망나니의 목에 꽂혔고, 울부짖는 것도 잠시, 그는 엎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통치자 암미엔시는 시누헤를 안아주었다. 레테누의 강한 자가 갖고 있던 소유물과 모든 소들은 이제 시누헤의 것이 되었다. 그는 더욱 위대해졌고, 거부가 되었으며, 수많은 소들이 그의 것이 되었다.

한편, 이집트 땅의 통치자가 된 세누세르트는 먼 땅에 그의 신하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의 왕자들을 보내 시누헤에게 온갖 왕궁의 선물을 주고 그를 위로했다. 그뿐 아니었다. 왕이 자신을 고향 땅으로 부른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왕이 나를 부르신다니!’
잊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재산을 자녀들에게 모두 물려주고, 장남에게 부족의 책임을 맡겼다. 이제껏 지내온 날들이 한여름 밤의 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들아, 이제 이 모든 것들은 너의 것이다. 이제 나는 왕의 부르심을 받고 나의 고향으로 간다.”
이제 시누헤는 남쪽으로 향한다. 도망쳐 왔던 길을 이제 당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파라오는 능력 있는 왕궁 농부들의 감독관과 물건을 가득 실은 배를 그를 위해 보냈다. 모든 집사들은 일을 하느라 분주하다.
날이 다시 밝았다. 사람들이 시누헤를 부른다. 열 명이 마중 나와 그를 왕궁으로 안내했다. 저 멀리 스핑크스가 보였다. 다시 고향에 왔다는 감격이 그를 휘감은 탓이었을까? 시누헤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렸다. 일어난 자리에 비가 내린 것도 아닌데 모래가 흥건히 젖었다.
왕자들이 보인다. 그들은 돌아온 이를 안내하기 위해 기다렸다. 알현실로 안내하는 신하들은 시누헤를 밀실로 안내했다. 눈부셨다. 그 안에 있는 순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누헤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도망쳤을 때보다 더 위엄 있는 모습으로 왕이 되어 왕자는 앉아있었다.
“시누헤, 네가 왔구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시누헤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에 바짝 엎드렸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연로함이 너를 덮쳤구나. 아, 무엇보다 너의 시신이 합당하게 매장되는 것이 중요하다.”(고대 이집트는 다른 근동의 나라들과는 달리 내세에 대한 믿음의 뚜렷했기에 잘 사는 것과 더불어 죽어 ‘잘 장사되는 것’ 역시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짝 엎드린 채로 시누헤는 대답했다.
"보소서, 제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생명은 당신의 것입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하옵소서."
그때 왕자들이 들어왔다. 왕궁의 신하가 아시아인의 모습으로, 베두인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을 본 모두 함께 소리 내 울었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시누헤는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귀족이 되어 내 곁에 있을 것이다. 아침 세면실의 안쪽 방으로 가라. 가서 그의 지위에 맞도록 준비해라.”
왕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의 자녀들은 시누헤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는 이제 ‘왕자의 집’에 살게 되었다. 시원한 방이 그 안에 있었고, 값비싼 보화들이 가득했다.
시누헤가 갖고 있었던 세월의 흔적은 다 사라졌다. 면도를 했고, 머리를 빗었다. 사막에서 나왔던 먼지들 모두를 털어냈다. 그가 입었던 옷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들의 것이 되었다. 이제 시누헤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최고급 기름을 머리에 발랐다. 더 이상 풀숲이 아니라 침대에서 잠을 잤다.
피라미드 무덤들 사이에 돌로 된 피라미드 무덤이 그를 위해 지어졌다. 왕들의 피라미드를 지은 석공들이 바닥을 맡았다. 수석 조각가가 바위를 조각했다. 감독관들은 여느 때와 같이 관심을 기울였다. 장례를 위한 사제들이 그에게 제공되었다. 마을까지 이어진 넓은 묘지 정원은 이제 시누헤의 것이 되었다.
그를 본뜬 석상은 금으로 입혀졌다. 위대한 파라오가 이 모든 것을 명령했다. 시누헤는 죽는 날까지 왕의 앞에서 은혜를 입은 것이다. 어쩌면 당신에게 더욱 생경한 이 사람, ‘시누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사정이 있어 고향을 버리고 도망쳤던 이 남자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여기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다. 조국을 등진 신하를 눈물 흘리며 받아들인 왕에게도, 반드시 다시 돌아가야 했던 신하에게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그래, 사실 영웅 이야기는 ‘으른들의 사정’이 얽혀있다.
외세의 침략이 잦아 하루 살기도 바빴던 메소포타미아와는 달리 이집트는 예전부터 딱히 별다른 위험 없이 평화롭게 지내왔다. ‘웰빙’의 다음은 ‘웰다잉’이라고 했던가? 평화로운 일상은 현재의 삶에 대한 생각을 넘어 ‘사후세계’를 상상하게 했고, ‘미라’를 만들게 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 변이 저승과 이승을 연결해 준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거기에서 ‘미라의 신’으로 알려진 '아누비스'의 가면을 쓴 전문 방부 처리사의 지휘하에 미라를 만들었다. 이 일은 생각보다 복잡해서 하나의 미라를 만드는데 70일이 걸렸다.
생전 모습과 똑같은 마스크를 만들어 씌웠다. 죽은 영혼이 부활 할 때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무덤 안에는 죽은 이가 저승을 여행할 때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사자의 서’와 다음 세상에서 그의 하인이 되어줄 인형 ‘샤브티’, 그가 먹을 음식, 입을 옷, 가구, 무기까지 전부 다 넣어서 완전히 ‘다음 생’을 대비했다.
만약 도망쳐 나온 시누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현생에서 잘나가는 관리였을지 모르지만, ‘다음 생’에선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거지가 될 것은 뻔했다. 이집트가 아니고는 이런 ‘다음 생의 비밀’에 대해 아는 나라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한편, 파라오는 왜 도망친 시누헤를 받아준 것일까? 앞선 이야기에서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도 통치자는 ‘군림’과 동시에 ‘보호의 의무’를 짊어졌다. 시누헤 이야기가 ‘문학’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당시 이집트 중왕국은 비옥한 땅을 주변국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 이상 '평화의 나라'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에게 위협 중 하나였던 ‘레테누’ 땅에서 유력자가 된 시누헤의 소문이 들린다.
‘좋아, 저 놈을 포섭해야 한다.’
도망자는 어차피 돌아와야 했다.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길이 없다. 유력자인 그가 들어오면 모르긴 몰라도 적국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문학 작품인 ‘시누헤 이야기’에서 이런 ‘으른들의 사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우리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이 들어 둘리 이야기를 다시 볼 때 고길동의 뒷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화려한 영웅의 모습 그 뒤를 볼 때 그들에게도 ‘으른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 속 결말 뒤 커튼을 들춰본 사람만이 '진짜 결말'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웅의 뒷모습에 주목하는 사람만이 '으른들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기계가 움직이듯, 영웅 이야기에서도 우연은 없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맞물려 이야기는 계속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