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성장으로 만들고 싶다면
‘딩동! 딩동!’
"누구세요?"
인터폰 화면 너머로 알 듯 말 듯 한 얼굴이 보인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아래 집인데요,
아이들 뛰어 다니는 소리가 좀... 커서요.”
“어머, 그러셨구나...
죄송해요. 아이들 주의 시키겠습니다.”
“감사해요. 이해 부탁드릴게요.”
단독주택이 아니라면 ‘층간소음’ 때문에 이웃과 이야기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방음이 되지 않는 환경을 만든 시공사 탓인지, 저희 집 거실을 몽골 초원쯤으로 여긴 아이들이 문제인지, 아니면 이 모든 소리에 너무도 예민한 내 탓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도 길가메시가 살았던 시절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때였을 것이다.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유프라테스의 도시 ‘슈루팍’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이 떠나갈' 요란한 소리를 날마다 냈다. 잔치를 벌였는지, 싸움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확실한 한 가지는 소리가 누군가에겐 분명 참을 수 없는 소음이었다는 사실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애초에 신이 인간처럼 ‘잠을 잔다’는 것이 우습지만, 화는 이미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문제는 이 층간 소음의 피해자가 수메르 신화 안에서 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력한 힘을 가진 대기와 폭풍의 신 ‘엔릴’이었다는 점이다.
‘모두 다 쓸어버려야겠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그야말로 ‘신의 스케일’에 걸맞은 이 계획을 들은 다른 신이 있었다. 바로 지혜와 물의 신 ‘에아’였다.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바로 수메르의 왕 ‘우트나피슈팀’에게 경고를 하기로 했다.
“우바르투투의 아들, 슈르팍의 인간아! 너는 갈대집을 부숴라. 그것으로 배를 지어라! 재물을 버려라! 생명을 구하렴! 재산을 부정하고 영혼을 구원해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씨와 함께 배를 타거라!”
꿈에서 지혜와 물의 신은 수메르의 왕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분명히 말해주었다. 만약 누군가 이런 그의 행동을 의심한다면, ‘엔릴이 나에게 몹시 화가 나서 에아와 함께 멀리 떠나 살 생각이오’라고 말할 것 역시 알려주었다.
‘집을 허물고 배를 만들자’는 아버지이자 남편의 말을 들으며 가족들은 무어라 생각했을까? 가족들은 7층 높이의 배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주전자를 날랐고, 사내들은 용광로에 불을 때고, 용골을 놓고, 배의 늑재에 못질로 널빤지를 깔았다. 갑판을 칸막이로 나누고, 삿대를 제 위치에 올려놓고, 모든 틈을 틀어 막았다. 꼬박 일을 한지 7일째 되던 날 배가 완성되었다.
우트나피슈팀의 친척들과 장인들, 그리고 온갖 동물들이 순서대로 배에 탔다. 앞으로 이 배가 어떤 일을 당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우트나피슈팀은 배를 완전히 밀폐했다. “밤에 불안함을 명한 자가 비를 마름병처럼 쏟아붓는다!” 샤마슈의 외침 그대로였다.
새벽빛과 함께 검은 구름이 수평선으로부터 올라왔다. 하늘의 빛나는 것들은 모두 흑암으로 변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풍우가 쏟아졌다. 하늘에서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들 역시 홍수 때문에 겁에 질렸다. 여섯 낮과 여섯 밤 동안 폭우와 강풍, 홍수가 땅을 휩쓸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날, 전쟁하는 군대처럼 요란하게 홍수를 가져오던 강풍은 잦아들었다. 바다가 조용해졌다. 폭풍이 잠잠해졌다. 홍수가 멈추었다.
우트나피슈팀은 조용히 날씨를 살폈다. 고요한 날씨가 시작되었다. 모든 인류는 진흙으로 돌아갔다. (수메르 신화에서 인간은 진흙과 물을 재료로 지어졌다) 땅은 평면 지붕처럼 평평해졌다. 우트나피슈팀이 해치를 열자 그의 얼굴에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큰절을 했다. 이내 주저앉았다. 쏟아져 내리는 것은 비가 아니다. 두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배가 걸린 작은 암초는 거대했던 산, ‘니시르’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쏟아졌단 말인가..." 높은 산이 그저 작은 암초처럼 보일 만큼 비는 7일 동안 퍼부은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땅이 분명 마를 거야.’ 그는 생각했다.
7일 동안 날개를 접고 있었던 새하얀 비둘기가 눈에 띄었다. 푸른 하늘에 날개를 펼치도록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날개는 갈대 배로 다시 돌아왔다. ‘아직 땅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구나.’
다음으로 보낸 까만 제비 역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날개를 편 까마귀가 ‘깍’ 소리 지르며 돌아오지 않았을 때, 갈대 배를 탄 생존자들은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땅이 충분히 고개를 들었다.
땅을 다시 밟았을 때, 우트나피슈팀은 14개의 큰 솥의 등나무, 삼나무, 도금향을 태웠다. 신들을 위해 제사를 준비한 것이다. 하늘의 여왕 이슈타르는 자신의 청금석 목걸이를 꺼내며 신들을 제사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맛있는 것들을 먹을 생각에(수메르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들이 제사를 통해 올려주는 제물을 주식으로 삼는다.) 마치 홍수 전 그 동네 사람들처럼 왁자지껄 소리를 내며 신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이 꼴이 몹시 못마땅한 한 신만은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엔릴이었다. 모든 생명체를 다 싹쓸어 버려 했지만, 끝내 살아남은 그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범인(?) 에아는 그를 달래려고 애썼다. 그는 엔릴이 인간의 죄에 과민하게 반응했다면서 우트나피슈팀이 꿈을 통해 엔릴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들 중 가장 지혜 있는 그대, 그대는 영웅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 없이 대홍수를 일으켰단 말입니까? 죄인에게 그의 죄를 부과하시오. 범죄자에게 그의 범죄를 부과하시오. 그러나, 그가 멸절하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소? 그가 제거되지 않도록 인내해야 하지 않겠소?
(중략)
위대한 신들의 비밀을 밝힌 것은 내가 아니었소. 나는 그저 꿈을 꾸게 했소. 그 꿈속에서 그가 스스로 신들의 비밀을 알아낸 것이지. 자, 그럼 그에 관해 결정하시오.”
결국 엔릴은 그의 해명을 받아들였다. 화를 풀었다. 우트나피슈팀과 아내를 축복하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 그들이 태양이 떠오르는 강 입구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 우트나피쉬팀은 인간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는 우리처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자, 인간이여. 너는 이제 강들의 원천에, 먼 곳에 살게 될 것이다.”
최초의 서사시 속 길가메시가 마주쳤던 처음으로 영생을 얻은 사나이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대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영웅의 이야기’는 수메르 신화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분노한 제우스 이야기’에서, 우리나라와 가까운 중국의 ‘여와, 호리병박 소녀 이야기’는 물론이고, 멀리 남미 브라질의 ‘와인카우라를 구한 베누스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줄거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인류가 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필자는 ‘우트나피슈팀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에 대해 써보려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둘기는 예로부터 ‘평화, 안정’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도심에서 왕성하게 번식하면서 개체 수 증가로 인해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평화의 상징이 유해의 상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듯 ‘기표, 기호‘라고도 부르는 아이콘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을 상징했다.
가령 오늘 등장하는 ‘물’의 경우 기본적으로 고대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고마운 존재’로 인식 되었을 것이다.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변화한 이후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물이었으니 말이다. 수메르 신화에서 물의 신 ‘에아’가 동시에 ‘지혜’를 담당한 신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물은 고대인들에게 두려움이었다. 굳이 큰 홍수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큰 비가 내릴 때의 경험은 ‘비가 그치지 않는 날‘을 생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각 문화권이 공유하는 홍수 이야기는 그 당시 유행했던 ‘공포영화’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트나피쉬팀은 어떻게 공포를 뒤집어 전혀 다른 결론을 낼 수 있었을까?
그가 일련의 사건들 속에 휘말리며 겪었을 감정은 분명 공포와 절망 그 자체였을 것이다. 완전히 세상을 휩쓴 7일의 대홍수가 지난 뒤(고대 세계에서 숫자 7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그가 왜 비명을 질렀는지 생각해보라. 그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공포 자체였던 물이 세상을 휩쓴 뒤 자신과 가족들만 남았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환희보다는 절멸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은 그와 가족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마치고 있다. 그것도 단순히 ‘오래사는 것’을 넘어 ‘강 입구‘에서 영생을 누린다. 물이 귀했을 환경에서 ‘물의 근원에서의 영생’은 낙원에서의 영원한 기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물이 필요 없는데’ 생각하더라도 한번 잘 생각해보라. 무엇이 이 사나이로 하여금 역경을 이기고 ‘이상향’에 들어가게 만들었을까?
‘아 뭐야, 꿈자리가 오늘은 왜 이리 사나워?’ ‘개꿈이네’ 하고 말았다면, 혹시 ‘갈대 집을 부수는 일’을 망설였다면, 꿈이 아니라 직접 ‘에아’가 나타나서 말했어도 우트나피쉬팀과 가족들 모두는 물에 잠겼을 것이다. 길가메시의 얼굴조차 못 봤을 것이다. 그러나, 우트나피쉬팀은 갈대 집을 부쉈다. 삶의 기반을 뒤집어엎었다.
잘 생각해보라. ‘신의 계시’는 여기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벽이 말을 했을지라도’ 이 수메르의 왕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물에 휩쓸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장되었을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의 또 다른 이름은 ‘공포와 두려움’일지 모른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다. 우리는 때로 소원과는 무관하게 ‘가보지 못한 세계’를 마주하곤 한다. 굳이 무언가를 정복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이 때문에 우리의 삶은 ‘중대한 도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전에 보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는 일은 때론 삶의 기반을 드러내 송두리째 뽑아 다시 만드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마치 갈대 집을 부수고 배로 만든 우트나피쉬팀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가 겪은 것처럼, 현대인들 역시 홍수 앞에 있다. ‘정보의 홍수’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일들로 가득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람 우트나피쉬팀의 모습에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 집이었던 것은 내일 배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들리는가? '너의 갈대 집을 부숴’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