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보자... '맥도날드'.”
나는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편이다. 수면욕이 더 강한 탓일까? 그런데 일 때문에 가끔 외박을 한 다음 날 아침에는 꼭 아침 식사를 한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맥도날드가 있는지부터 찾는다. 맥도날드 매장은 대부분 24시간 영업이라 꼭두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날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호사를 누리는구나’
맥머핀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지만 잘 씻고, 먹고 다니니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이 정도면 호사지?'
'집밥'은 못 먹지만, 굶고 있지는 않다. 꽤 멀리 왔다 갔다 하지만, 에어컨 바람을 쐬며 기차 안 의자에 앉아 책을 보다가 졸 여유가 있다. 자기 성 밖으로 뛰쳐나간 왕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영웅은 왜 자신의 도시를 버리고 광야를 방황하는가? 무엇이 왕을 권좌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는가? 영웅들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길가메시는 워낙 ‘잘난 맛’에 살았다. 왕과 여신 사이에 태어났고, 외모나 힘은 물론이고, 자기가 다스리는 ‘우루크’에서 더 잘난 사람은 없었다.
오만한 왕을 저지하기 위해 태어난 ‘엔키두’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신들이 보낸 하늘 황소는 뿔이 부러진 채로 내동댕이쳐졌다. 삼나무 숲 산지기는 물론 무엇도 영웅을 굴복시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죽음의 공포’가 그를 덮쳤다. 영웅은 의외의 일 때문에 무너졌다.
“내가 죽으면, 엔키두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근심이 내 뱃속까지 들어왔구나! 죽음을 두려워한 나는 들을 방황한다. ‘우바르투투의 아들 우트나피쉬팀’에게 가기 위해 나는 급히 길을 떠난다. 밤에 산길을 지날 때, 나는 사자들을 보고 두려워졌다. 그때 신(Sin/달의 신이다.)에게 내 머리를 들어 기도했다. 신들의 ‘광명’으로 나의 간구가 나아갔다. 신(Sin)이여, 나를 살려주소서!”
헤맴 끝에 길가메시는 ‘전갈인들’이 지키는 쌍둥이산 ‘마슈’에 도착했다. ‘우트나피슈팀’에게 질문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우트나피슈팀, 그는 누구인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자, 영생을 얻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영웅은 영생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지금껏 누구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전갈인들은 말했다. ‘생존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칠흑 같이 어두운 산 아래 깊은 굴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암흑도 영웅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굴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경험했던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함이 그를 감쌌다. 청금석 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적철광, 마노, 홍옥수, 온갖 보석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거기 있었다. 여기까지 온 목적도 잊어버리고 낙원을 거닐 때, 벼락같은 소리가 난데없이 울려 퍼졌다.
“길가메시여, 너는 어디로 방랑하는가? 네가 추구하는 생명을 너는 얻지 못할 것이다!”
태양신 ‘샤마슈’였다. 그는 때가 되어 저녁이 되면 서녘 산의 문을 열고, 땅속으로 들어가 밤이 다 지날 때까지 저승의 재판관 노릇을 했다. 그러니 이때가 아마도 길가메시의 땅에서는 한참 밤이었던 모양이다. 신의 으름장이 무서웠다면, 영웅은 제 발로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보석의 찬란한 빛에 홀려 잊었던 영생을 찾아 다시 전진한다.
달콤한 향이 영웅의 코를 간지럽힌다. '포도밭이구나.' 길가메시는 우루크의 포도가 떠올랐다. 고향의 맛을 그리는 것도 잠시, 시선을 사로잡는 여인이 포도나무들 사이로 보인다. 황금사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탐스러운 포도를 따는 그녀의 이름은 '시두리'였다.
'지나가야 한다.'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며 길가메시는 자기 뺨을 세게 후렸다. '아차!' 달리지 말고 풀숲 속 사자처럼 조용히 접근해야 했나? 시두리는 직감적으로 문에 빗장을 질렀다. 그러나, 길가메시가 생각보다 빨랐다. 자기 발로 시두리를 저지하면서 사정을 쏟아놓는다.
“내 친구 엔키두가 운명의 길로 떠났소. 나는 밤낮으로 그를 위해 울었지. 내 곡소리를 듣고 그가 일어날까 생각했소. 나는 생명을 찾지 못하고 사냥꾼처럼 들 가운데 헤맸다오. 이제 내가 그대의 얼굴을 보았으니 내가 늘 두려워했던 죽음을 보지 않게 해주오!”
시두리는 길가메시의 하소연을 듣고 어느 정도 공감 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기름진 음식으로 당신의 배를 채우세요. 밤낮으로 춤추고, 즐거워하고,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세요. 새 옷을 입고, 깨끗하게 목욕하고, 귀여운 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와 행복한 포옹을 하세요. 이 역시 인간의 운명이랍니다.”
왜 그를 돕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시두리는 신들이 자신만을 위해 불멸의 삶을 남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노력은 헛된 일이라 말해주려 했던 것이다.
작은 눈 뭉치를 비탈에서 굴려본 적이 있는가? 어느 시점이 되면 주먹만 했던 것이 머리만 해지고, 눈 ‘사람’이라고 부를 만큼 커진다. 너덜너덜해진 가슴 속엔 잔뜩 커진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영생에 대한 갈망은 커졌다. 그 사실을 알았는지, 시두리는 사공 ‘우르샤나비’를 찾아가라고 말해준다.
아마 길가메시는 뛰는 가슴만큼 전력질주 했을 터. 그러나, 그러지는 말았어야 했다. 시두리에게 했던 말처럼 자기가 왜 여기까지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할 수있었다. 대신 그는 사공 우르샤나비의 배를 다짜고짜 박살 내버린다. (인성?) 사공은 망나니를 쫓아내는 대신 ‘120그루의 나무를 베어 120개의 긴 장대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기다란 장대들을 가지고 둘은 바다를 건넜다. 드디어, 영웅은 생존자를 만났다.
“그대를 보건대, 우트나피쉬팀이여, 그대의 얼굴이 이상하지 않소. 그대도 나처럼 생겼소. 그대는 전혀 이상하지 않소. 그대도 나처럼 생겼소. 나는 속으로 당신을 전쟁의 각오로 가득 찬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당신은 한가로이 누워있잖소! 내게 말해주시오! 그대는 어떻게 신들의 회의로부터 생명을 받아냈소?”
짜기라도 한 듯 우트나피쉬팀 역시 ‘신들과 운명의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죽음의 날은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들이 나를 데리고 가서는 먼 곳에, 강들의 원천에 살도록 만들었소. 그러나 당신이 찾고 있는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그대를 위해 누가 신들을 회의로 소집하겠소? 일어나시오. 여섯 낮과 일곱 밤 동안 누워 잠자지 마시오.”
영웅인지 거지인지 행색을 도무지 알아보지 못할 이 사내가 궁둥이를 대고 앉자마자 잠은 파도처럼 감싸 안았다. 우트나피쉬팀은 그 꼴을 보고 자신의 아내에게 말한다.
“생명을 찾는 이 영웅을 보시오! 안개처럼 잠이 그에게 내리고 있소.”
아내는 그를 흔들어 깨워 안전히 돌아가도록 하라고 말했다. 남편은 단호하게 말했다.
“속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가 그대를 속이려 할 것이오. 그러므로, 그를 위해 빵을 구워, 그의 머리맡에 두시오. 그리고 그가 잠잔 날들을 벽에 표시하시오.”
첫 번째 빵이 말랐다. 두 번째 빵은 상했고, 세 번째 빵은 질척해졌다. 네 번째 것의 표면은 하얗게 변했다. 다섯 번째 빵은 곰팡이가 슬었고, 여섯 번째 빵은 여전히 신선한 색을 유지했다. 일곱 번째 빵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우트나피쉬팀이 가련한 영웅을 흔들었다.
“아, 막 잠이 오려고 했는데 그대가 흔들어 나를 깨웠습니다!”
우트나피쉬팀은 아마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실소를 터트리는 대신 곧 쫓겨날 영웅에게 차분히 말했다.
"길가메시여, 가서 그대의 빵을 세어보시오. 그대가 잠든 날들이 그대에게 명확해질 것이오. 그대의 첫 번째 빵은 말랐소. 두 번째 빵은 상했고, 세 번째 빵은 질척해졌네요. 네 번째 것의 표면을 봐요. 하얗게 변했지요. 다섯 번째 빵은 곰팡이가 슬었고, 여섯 번째 빵은, 아! 다행히 아직도 신선하지요. 그리고 일곱 번째 빵, 이건 아직 뜨거워서 잡을 수 없어요."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승사자가 내 사지를 붙잡았소. 내 침실에 죽음이 어슬렁거리는군요. 내 발이 닿는 곳에 죽음이 있소!”
사공은 말 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가련한 이를 목욕장으로 인도했다. 깨끗이 몸을 씻고 꾀죄죄한 모습이 아니라 멀끔한 모습으로 고향에 보내는 것이 시험에 탈락한 이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관용이었다.
길가메시와 우르샤나비는 배에 올랐다. 배를 파도에 띄우고 다시 돌아가려 했다. 바로 그때, 우트나피쉬팀에게 아내는 말했다.
“길가메시가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어요.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데, 어떤 것을 선물로 주시렵니까?”
그 이야기를 슬쩍 들은 거ㅈ... 아니, 가련한 왕은 슬쩍 장대를 들어 배를 해안으로 다시 돌린다. 우트나피쉬팀은 말했다.
“길가메시여, 그대는 고생하며 여기까지 왔소.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는 당신에게 내게 무엇을 선물할까? 나는 숨겨진 일을 말할 것이오. 신들의 비밀을 그대에게 전할 것이오. 이 식물, 그것은 사슴뿔처럼 생겼소. 그것의 뿔은 장미처럼 그대의 손을 찌를 것이오. 그대의 손이 그 식물을 먹으면, 그대는 새 삶을 얻을 것이오.”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발에 돌들을 묶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다. 돌들은 영웅이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했다. 처음으로 보는 식물이 보인다. 힘껏 움켜쥔다. 무거운 돌을 맨 줄을 끊는다. 바다가 그를 뱉어냈다.
“우르샤나비여, 이 식물은 별난 식물이오. 이것으로 사람이 생명의 숨을 되찾을 수 잇다오. 나는 그것을 성루로 둘러싸인 우루크로 가져가서 노인들로 하여금 그 식물을 먹게 할 것이오! 이름을 ‘사람이 늙은 나이에 젊어지다’로 할 것이오. 내 자신도 그것을 먹어, 젊은 시절로 돌아갈 것이오!”
여행길에 둘은 식사도 하고,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길가메시는 물이 시원한 우물을 발견했다. 목욕을 하러 내려갔다. 그때 뱀 한 마리가 처음 맡는 식물의 오묘한 향을 맡아버렸다. 물에서 올라와 그 식물을 가져갔다. 뱀이 처음으로 허물을 벗은 날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환희로 가득 찼던 눈동자에서 통곡의 눈물이 흐른다. 사공의 손을 잡고 비탄을 뱉어낸다.
“누굴 위해 내 손이 수고했던가, 우르샤나비여? 누굴 위해 내 심장의 피를 흘렸던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얻지 못했네.“
둘은 성루로 둘러싸인 우루크에 도착했다. 왕은 사공에게 말했다.
"올라가라, 우르샤나비여. 우루크의 성루에서 걸어보렴. 밑의 테라스들을 조망해보고, 우루크의 건물들을 살펴보렴. 그것이 구운 벽돌로 되지 않았는가? 일곱의 현인들이 그것의 토대를 놓지 않았는가? 여기엔 도시도, 과수원, 들이며 이슈타르 신전도 있지."
토판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영웅이 빈손인 채로 권좌를 떠났다가 다시 빈손인 채로 돌아왔다'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영웅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영웅은 ‘이데아’이며, 결핍을 해소하는 ‘배출구’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최초의 영웅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그가 ‘자격 미달’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길가메시는 움켜잡은 이름 모를 풀처럼 따끔하고, 강렬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람은 죽는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복하고 싶은 하지만, 불가능하기에 애써 부정하고 싶은 이 가시를 손에 쥐여준다.
인간은 죽는다.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는다. 젊은이도 노인에게도 공평하다. 긴 연휴를 다 보내고 온 월요일 아침처럼, 세상에서 제일 눈치 없이 달려오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착각하지 마라. 길가메시가 쥐여주는 지혜는 영생의 약이 아니다. 그는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것처럼 다급하게 말한다. “죽음을 기억하라!”고.
죽음은 또 다른 자극이다. ‘죽는다’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오는가?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오늘을 살게 만드는 자극’이다. ‘오늘을 살아라!’ 우루크의 왕은 우리에게 목이 쉬어라 소리 지른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 이것은 ‘내일 어차피 죽으니까’라며 한탕 크게 저지르는 태도를 만들 수도 있지만, 오늘 남겨진 하루를 한 방울까지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자극이다.
길가메시, 이 원조맛집의 뚝배기는 씁쓸하다. 다 아는 맛이다. 그래서 더 강렬하다. 이 맛을 기억해야 한다.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만이 최초의 영웅이 우리에게 떠먹여 주는 인생의 맛이며, 오늘을 제대로 살 수 있는 신비의 묘약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