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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Aug 28. 2020

‘영웅의 다른 이름은 반골이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시도하라.

“와, 눈이다!”

 밤새 수북하게 쌓인 눈 때문에 설렜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을 밟으면 ‘뽀드득’이라는 표현으로 미쳐 다 담을 수 없었던 소리가 났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는다는 오묘한 희열이 담겼기 때문이었을까.


미국과 소련이 ‘달나라’에 집착했던 이유는 ‘최초’가 대중의 이목을 끌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최초’라는 타이틀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슴을 뛰게 한다. 1960년대 미디어를 도배했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경쟁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바보들이라서 우주에 돈을 뿌렸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누구나 가진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대한 로망을 이용했다. 그들이 ‘달나라’에 집착했던 이유는 사람들이 ‘최초’라는 이름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여기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우루크’라는 이름은 생경하지만, ‘길가메시’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허름하고 낡아빠진 간판을 달고 있는 국밥집. 신화 속 영웅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풀어내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 아는 맛, 그러나 알면서도 계속 오고 싶은 그런 맛을 지닌 원조 맛집. 영웅 이야기의 시작은 최초의 영웅, 길가메시 이야기다.

 영웅 이야기는 어떤 모습이든 비범함을 강조하고 싶어 한다. 영웅은 필부가 아니다. 여신과 왕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길가메시는 2/3가 신이었다. 이는 그가 완전한 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일반적인 사람보다는 월등했음을 말해준다. 사실이냐 거짓이냐를 떠나 이렇듯 신화 속 영웅은 평범한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


오른쪽이 주인공 ‘길가메시’다. 왼쪽은 ‘엔키두’의 모습. 길가메시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사자는 권력을 상징한다.


 그는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었고, 미남이었다. 동시에 독재자였다. 가진 능력을 이용해 도시 ‘우루크’의 모든 처녀들을 독차지하는 일을 정당화했다. 사람들은 신에게 불평했고, 우루크를 담당했던 신 ‘아누’는 어머니 신 ‘아루루’에게 찾아갔다. 그녀는 물 속에 손을 집어 넣어 흙덩이 하나를 떼어냈다. 그리고 휙 집어던지니 ‘침묵의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 ‘엔키두’가 되었다.

 엔키두는 길고 헝클어진 털로 뒤덮인 짐승 같은 모습이었다. 영양을 잡아먹고, 소 떼와 함께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야성’ 자체였다. 어느 날 한 사냥꾼이 엔키두를 발견한다. 그는 너무 겁을 먹어 벙어리가 되었다. 심장은 떨렸고, 얼굴은 창백했다.

 집으로 돌아온 사냥꾼은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당시에도 지도자의 의무는 자기 백성을 돌보는 일이었나보다. 아버지는 “가서 길가메시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길가메시는 사냥꾼에게 신전 창녀 ‘샴하트’를 주었다. 둘은 우물가 근처에 숨어 엔키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사흘째 되던 날, 엔키두는 짐승과 함께 나왔다. 사냥꾼은 샴하트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저 괴물을 매혹한다면, 야성이 사라져서 야수들과 더 이상 가깝게 지내지 못할 거요.”

 샴하트는 옷을 벗고 엔키두에게 접근했다. 6일 날, 7일 밤이 지나는 동안 엔키두는 샴하트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다. 그리고 사냥꾼이 예상했던 것처럼 더 이상 짐승들은 엔키두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마주쳤다. 하늘까지 진동하고, 땅의 먼지는 일어나 뿌옇게 눈을 가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가슴 뛰는 소리만이 적막 사이로 들릴 때 사람들은 승자를 보고 탄식했다. 엔키두는 길가메시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싸움. 이후 둘은 절친이 된다.


 이후 둘은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가슴을 턱 막히게 하는 이상한 꿈 이야기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때문에 길가메시는 엔키두에게 그날 밤 꾼 꿈 이야기 역시 쉽게 할 수 있었다.

 ‘불멸은 자네의 운명이 아니야.’ 친구가 꾼 꿈에 대해 들은 엔키두가 무거운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와 당신이 길가메시였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의 원조 역시 그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음에 대한 걱정 대신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좋은 일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초원과 산지로 이루어진 지금의 이란 고원에 해당하는 곳에 아름드리 삼나무가 빽빽한 숲이 있었다. 신들 중 실권자였던 '엔릴'은 숲을 지키기 위해 ‘훔바바’를 산지기로 임명했다.


‘훔바바’의 얼굴. 험상궃은 이미지는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의 원형이다.



 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산지기에게는 숲속에 들어온 누구라도 깊게 잠에 빠뜨리는 능력이 있었다. 이 능력을 갖추고 벌목꾼들로부터 숲을 안전히 지켰다. 문제는 숲속 '삼나무'를 인간들만 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욕심 많았던 태양의 신 '샤마슈'는 신전을 세울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훔바바'가 악마라며 소문을 퍼트렸다. 실제로 삼나무를 베러 들어갔던 사람들이 실종되자, 이는 실제처럼 여겨졌다. 길가메시는 '산에 들어가 훔바바를 처치하자'고 말한다. 그러자 엔키두를 그런 친구를 말린다.

"친구여,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삼나무 숲속으로 들어간단 말입니까? 그곳에 가서는 안됩니다. 또한 그를 봐서도 안됩니다. 그는 숲을 지키는 자입니다.


(중략)


엔릴 신이 일곱 후광이라는 무서운 갑옷을 그에게 주었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숲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느 누굴 막론하고 병으로 쓰러집니다!"

 실제로 훔바바를 만난 길가메시는 벌벌 떨며 엎드렸다. 거인의 몸에 소와 같이 뿔이 달려있고, 꼬리가 뱀인 그야말로 '괴물'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모습에 영웅도 주저앉고 만 것이다.

 다급해진 길가메시는 훔바바에게 자기 여동생과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공포의 산지기에게도 '여소'는 거절하지 못할 제안이었나 보다. 설렌 훔바바는 순간 '일곱 후광'을 거두는데, 그틈을 노려 협공한 길가메시와 엔키두에게 제압당한다.


훔바바가 일곱 후광을 거두자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그를 제압한다.


 훔바바는 '살려달라'며 간청했지만 엔키두는 '훔바바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된다'고 말했다. 결국 용맹한 산지기는 그렇게 유명을 달리한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빨리 신들에게 퍼졌다. 여신 ‘이슈타르’는 길가메시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만큼 그가 보여준 모습이 위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여신의 연인들이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애인 ‘타무즈’를  죽였지. ‘아라루’의 날개를 끌어당겨 찢은게 당신 아니던가? 아, 젊은 목자는 늑대로 만들어버렸다지? 양치기들의 개가 늑대를 찢어 죽이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여신이 던진 추파를 거절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이슈타르는 미칠 듯 화를 내며 아버지 신 ‘아누’에게 복수를 간청한다.

 “아버지시여, 하늘 황소를 만들어주세요. 길가메시를 때려 눕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명부의 죽은 사람들을 소생시켜서 그들에게 산 사람을 먹도록 하주세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많게 해달란 말입니다!”


뉴욕 월스트리트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인 황소상. 고대 근동 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권에서 황소는 힘을 상징했다.



 왜 하필 ‘황소’였을까? 그리스 신화 속 주신 제우스는 왜 ‘황소’로 모습을 바꾸어 처녀들을 임신 시켰을까? 이집트 신화 속 태양을 뿔 사이에 이고 있는 아피스는 왜 황소로 표현 되었을까? 가나안의 주신 ‘바알’이 타고 있는 동물이 황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 고대 세계에서 황소는 ‘강력한 힘’을 상징했다.

 이런 점에서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하늘 황소를 때려잡았다.’는 일의 결과는 서사 안에서 신들을 당황을 넘어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으리라. “감히 하늘 황소까지 죽여? 너희 둘 중 하나를 죽여버릴 테다!” 신들은 엔키두의 꿈에 나타나 으름장을 놓았다. 신들에 의해 살해당한 희생양은 누구였을까?

 ‘누군가의 전부가 되었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그 사람을 얼마나 쉽게 무너뜨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엔키두를 죽이기로 한 선택이 얼마나 잔혹하고 효과적인 복수였는지 생각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혹시 둘이 친구가 된 날 신들은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 대신 축배를 들었을지 모른다.

 ‘나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타인이 죽는 일’을 보는 것이다. 관망을 통해 우리는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김 씨도 죽었고, 이 씨도 죽어간다. 그래, 나 역시 어느 날 죽겠지!' 죽음이 공포라는 탈을 쓰고 우리를 덮치는 순간은 바로 이때다. 고대인들 역시 이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길가메시가 아니라 엔키두가 죽었기 때문이다.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고 영생을 찾아 떠나는 길가메시. 영웅은 상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에 입체적이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죽음이 두렵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영웅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삼나무 숲속 괴물도, 하늘에서 내려온 황소도 안기지 못했던 공포가 가슴 속에 걷잡을 수 없이 차오른다. 죽음은 저 너머 무언가가 아니라 코앞에 놓인 실제가 되었다. 물결에 무기력하게 잠겼다면 길가메시는 우리에게 영웅으로 기억되지 못했으리라. 그는 죽음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스로 영생을 찾아 권력과 안정이 보장된 자리를 떠난다.

 여전히 영웅 이야기를 읽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웅은 ‘입체적’이다. 모두에게 찾아오는 공평한 죽음을 앉아서 멀뚱멀뚱 기다리지 않는다. ‘당연한 일’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는 ‘추하다‘ ‘반골이다’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적어도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영웅, 그들은 사실 ‘반골’이다. ‘그냥 받아들여!’ 이야기하는 모든 일들을 ‘왜?’라고 질문하며 일어나는 반골은 영웅이 가진 다른 이름이다.

 모든 영웅의 시작은 반골이다. 비록 그가 죽음을 정복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본래 영웅은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짜 서사시는 남들은 '예'하는 일을 '아니오'로 받아들이는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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