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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Aug 28. 2020

‘영웅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웅 낯설게 읽기

“밥 먹어라!!“ 어느새 땅거미가 진 산골동네에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재촉하는 어머니들의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 시절의 우리는 그랬다. 386 컴퓨터도, 동물의 숲은 커녕 슈퍼 마리오도 없었던 시절, 더운 여름이건 추운 겨울에건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현관문이 열리기 무섭게 가방을 집어던지고 동네 골목으로 모였다. “야, 오늘은 내가 먼저 타기로 한 거 안 까먹었지? “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세발자전거 안장에 앉아 마치 백마를 탄 장군처럼 주위를 살핀다. 살펴 볼대로 살펴봤다고 생각했을 그때, 운동화는 땅을 박차고 페달에 자신을 맡긴다. 나만 그랬을까? 꽤 오래 언덕에서 기다린 것 같은데 내려오는 일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아쉬웠다. 시골이라고 해서 뭐 이렇게만 놀았을 거란 생각은 오산이다. 꼬마들은 텔레비전에서 봤던 영웅 흉내를 꽤 잘 내곤 했다. 웃긴 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나쁜 놈 할래! “ 이야기했던 친구들이 꼭 그중에 두어 명 정도는 있었다는 거다.



컴퓨터는 커녕 게임팩 하나 없었는데, 우리는 잘도 놀았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글을 쓰다 보니 얼굴만 동동 천장에 어렴풋이 떠다니는 ‘그 친구는 대체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유독 ‘나쁜 놈’을 자처했던 그 친구가 생각나는 건 ‘혹시 진짜 나쁜 놈이 된 거 아냐?‘라는 걱정보단 유년시절 우리의 마음을 묘하게 사로잡았던 그 ‘나쁜 놈의 묘한 매력’이 떠올라서가 아닐까?

유년 시절 신발이 다 닳도록 뻔질나게 돌아다녔던 골목길에서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맘 놓고 놀 순 없다. 하지만 ‘나쁜 놈의 끊을 수 없는 매력‘은 주민등록증 잉크가 이제는 조금 마른 것 같은 나와 당신의 가슴을 살랑살랑 간지럽히곤 한다. 로보캅도 아닌 것이 시커먼 기계 몸에다 헬멧, 무슨 산소 호흡기를 달고 나와서는 ‘내가 니 애비다’ 친부 확인을 시켜주었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스 베이더’가 그랬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건 나를 더 이상하게 만들거든 “ 니체의 명언을 자기 멋대로 뒤틀어 뱉은 다크 나이트의 ‘조커’ 또한 둘째라면 서럽다.


 아, 한 명을 빼놓을 뻔했다. 레고를 닮은 머리 스타일에 새하얀 얼굴, 그리고 소 잡는 ‘캐틀 건’을 가지고 눈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인간 백정 안톤 쉬거를 혹시 당신은 아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안톤 쉬거. 다른 악당들 못지 않은 존재감을 뽐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이 묘한 영화의 제목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구절에서 따왔다. 시의 앞부분만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하의 인용문은 필자의 사역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서로 팔짱을 낀 젊은이들, 나무속 새들은 서로의 노래를 부르고, 연어가 힘차게 거슬러 오르는 폭포, 또 고등어가 가득한 바다. 물고기나 짐승들, 또 새들은 긴 여름 내내 찬미한다. 무엇이고 잉태되고 태어나서 죽는 것을. 모두가 저 관능적인 음악에 빠져서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경시한다. 늙은이란 다만 보잘것없는 것,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 옷일 뿐이지.‘



 보통 문학 작품에서 노인은 ‘현자‘ 혹은 ‘베테랑’ 쯤으로 묘사되곤 한다. 인생의 풍파는 그의 얼굴에서 젊음을 빼앗아 갔지만, 그가 풍파를 맞으며 얻은 ‘경험’은 새파란 병아리들에게는 ‘지혜’라는 이름으로 빛난다. 하지만, 예이츠의 시에서는 조금 다르다. 어쩌면 시인은 눈 깜짝할 새 변하는 세상, 갈수록 선함을 잃고 험악해지며 노인이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로 변한 문명의 발전이라는 얼굴 뒤편의 이면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굳이 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세월의 무상함과 변화의 물결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새로 등장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삶이라는 무대 앞에서 쓸쓸히 뒤로 누군가 터벅터벅 걸어갔다는 의미일 테니.


여기 신화가 있었다. 영웅이 있었다.


여기 신화가 있었다. 영웅이 자신의 잘남을 뽐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가 입었던 갑옷은 눈부시게 빛이 났다. 비껴 든 창은 무엇이든 꿰뚫을 기세였고, 투구의 장식은 적들이 흘린 피보다 붉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성벽이 무너지고, 그가 함성을 지를 때엔 온 관중들이 함께 열광했다. 어쩌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누구나 의심 없이 믿을 만큼 빼어난 자, 그는 영웅이었다. 어느 날 태양은 그를 외면한다. 빛은 근육은커녕 툭 튀어나온 배에 걸걸한 목소리, 매부리코에 빛나는 민머리를 가진 늙은이를 비춘다. 금방이라도 바다로 돌아갈 것만 같은 거북목을 가진 그의 입이 열리기를 사람들은 열망한다. “말해주시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 “아니, 인간은 둘째 치고, 세계에 대해 말해주시오. 그래, 도대체 이 우주 만물은 어디서부터 왔단 말입니까? “ 존경이 담긴 시선과 기대가 담겨 한껏 고조된 목소리는 이제 영웅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제 가만히 앉아 생각하거나, 혹은 한껏 궤변에 가까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 우리가 ‘철학자’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주목한다.


아직 인간이 이성으로 세상을 탐닉하기 전, 거기 영웅이 있었다.



 아직 인간이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더듬어가며 세상을 탐닉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 거기에 신화가 있었고, 영웅이 있었다. 철학이 이성의 언어로 세계와 인간 자신의 기원,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반면, 고대인들은 ‘상상력’을 도구로 사용했다. ‘왜 하늘은 파랄까?‘ ‘왜 밤이 되면 깜깜해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가 또 떠오르는 걸까?‘와 같은 질문은 계몽주의 이전에도 사람들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대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화와 영웅 이야기들로 이런 질문을 해소하곤 했다. 신들과 인간, 그리고 영웅 이야기는 어디서나 널리 사랑받고 회자되는 너와 나, 우리의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났다. 꼬마에 불과했던 인간의 이성은 그가 올려다보던 상상력보다 키가 더 자랐다. 철학의 시대가 왔다. 소크라테스는 원형 극장 밖으로 헤라클레스를 쭈욱 차 내버렸다.


 세상에 대해 즐겁게 떠들었던 모험담은 이제 ‘페이크’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영웅과 신화에 대해 읽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들고 있는 이 이야기가 사실 고대인들에겐 ‘우월한’ 현대인들이 탐닉하는 철학 사조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는 사실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있다. 각자 다른 색 선글라스를 썼다. 파란 하늘이 둘에겐 다르게 보인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노란 선글라스를, 한 사람은 파란 선글라스를 썼다. “와, 진짜 좋다. “ 기지개를 켠다. 하늘을 본다. 한 사람은 노란 하늘을, 한 사람은 파란 하늘을 본다. 현대인과 고대인의 차이가 있다면 이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고민하며 탐닉한다. “인간은 뭐지?” “세상은 뭘로 이루어졌지? “ “제대로 산다는 건 도대체 뭐지?” 웃지 못할 사실은 그저 같은 곳을 ‘다른 렌즈’로 보았을 한 사람을 다른 한 사람이 ‘페이크’에 빠져 허우적대는 멍청이라고 치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철학을 통해 인간과 세계, 삶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면, 신화와 영웅 이야기를 통해서도 같은 것을, 아니 혹시 또 다른 이면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인이 했던 일들을 우리라고 또 못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무대 뒤로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가는 저 사나이의 어깨를 잡아 잠시 세우고 싶다.



 이런 이유로 나는 무대 뒤로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가는 저 사나이의 어깨를 잡아 잠시 세우고 싶다. 누구는 그렇게 야유할지도 모른다. “여긴 영웅을 위한 나라가 아냐! “ 그래, 맞다. 우리의 시대를 잘 말해주는 표현 중 하나는 ‘영웅이 없는 나라’ 혹은 ‘영웅을 위한 나라는 더 이상 없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인정한다. 어쩌면 먼지가 잔뜩 쌓인 렌즈를 닦고 한 번쯤 전장을 누비고 하늘을 지배했던 이 오래된 선글라스를 속는 셈 치고 써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그래서 그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이미 우리 집 책꽂이에 오이디푸스며 일리아스가 먼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는 건 아시나 몰라?‘ 비아냥댈 거라면 조금만 참아봐라. 나라고 왜 뻔한 ‘클리셰’를 들고 왔겠나?

골방에서 나는 노병들의 이야기를 사유의 끈으로 엮었다.


 ‘독서는 다만 지식의 재료를 줄 뿐이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타불라 라사로 유명한 철학자 ‘존 로크’의 말이다. 사실 영웅은 뻔하다. 신화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조금만 시간을 내면 된다. 거기에 조금의 말솜씨가 있다면 금상첨화다. 대중 앞에서 번지르르하게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사실 영웅, 신화 이야기’만’ 하는 글들은 널리고 널렸다. ‘영웅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나는 뒷방으로 쓸쓸히 들어가는 영웅을 불러 세웠다. 그래, 이제부터 영웅 이야기를 할 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당신이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둘씩 던져 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디서 들어 봤는데?’ 생각하며 ‘아, 이게

사실 이런 이야기였어?’ 하실테고, 또 다른 분은 ‘와, 이런게 영웅 이야기구나.’ 생각하실 것 같다. 어찌되었든 늘어놓는 글들을 모두 읽는 이 모든 일이 ‘낯선 읽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누군가에겐 다시 읽으며 발견하는 새로운 면이 있을테고, 다른이에겐 처음 읽으며 알게 되는 새로움이 있을 터. 그러면 성공이다.


 모두가 ‘누구야?’ 고개를 갸웃하며 읽으실 이 이야기의 끝에서 당신은 마지막에 무어라고 말하실까? 글쎄, 에필로그를 써두며 생각했던 그 말을 하실까? 아니라면 뭐 어떻겠나, 그저 읽어주심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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