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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 인간 Sep 28. 2020

‘이불 킥을 한 뒤엔 반드시 개어 놓고 나갈 것’

후회를 넘어서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아, 공부 좀 더 할 걸."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읽고 나서야 번뜩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었어요’ 말하기엔 빈둥댔던 시간이 떠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준비 기간을 ‘다른 일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날려버린 뒤 시험일을 일주일 남겨둔 채 나는 거의 울며 예제를 풀었다.


  물론, 시험 결과는 믿을 수 없이 좋았지만, 나는 그때를 계기로 ‘적어도 시험공부 만큼은 미리미리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소는 커녕 외양간조차 없는 현대인들도 이 말에는 모두 공감할 것이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유독 우리의 시간은 빨리 흐르고, 선택할 것은 도처에 널려있다. 어떤 일에 대해 하거나, 하지 않거나 후회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때 로또를 샀어야 했어!"



"아, 왜 걔 말을 들어서 내가 이 고생이지?"



"그냥 자퇴하지 말고 계속 다닐걸..."



 한 치 앞도 모르는 사람이기에, 어쩌면 후회는 인류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진득하게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후회라는 것은 늘 그렇게 부정적이고, 떼어내야 하는 무언가일까? 계속해서 다루는 일리아스 속 한 사내의 후회를 읽어보자.



후회는 늘 나쁜 것이기만 할까?



제우스의 금지령




“어휴 정말...”



 아침이 되자 제우스는 신들을 소집했다. 그는 전지전능한 신들의 아버지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스와 트로이의 편으로 나뉘어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을 자청한 신들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신들의 아버지는 말을 꺼냈다.



 “어찌 되었든,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군. 그러니, 모두 내 말을 들어라. 이제부터 이후로 트로이나 혹은 그리스를 도우려는 신이 있다면 이유를 막론하고 번개로 내리칠 테니 알아서 해라. 아니면 타르타로스(무간지옥)로 내려보낼 테니 번개를 피할 수 있다고 우쭐댈 생각마라. 하지만, 혹여나.”



 아무도 아버지에게 감히 대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너희들 중 누가 내 힘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대들 모두 하늘에 황금 밧줄을 걸어 놓고 내게 매달려도 좋다. 그렇게 해도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는데, 아테나가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에게 묻는다.



 "크로노스의 아들, 우리의 통치자이신 아버지. 누가 당신의 강력한 힘에 대항하겠습니까? 그저 죽음의 구렁텅이에 처박힐 저 그리스인들의 운명이 안쓰러울 뿐이지요. 그러니 작은 조각만 한 전략이라도 그들에게 가르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로 대답했다.



 "사랑스러운 내 딸 아테나여, 나는 너의 그 마음을 다 알고 있다. 나를 믿거라."



  제우스는 청동 말굽을 한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황금전차에 올라탔다. 하늘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이다 산의 가르가론이었다. 짙은 안개 속에 말들을 섬긴 후 산꼭대기로 올라간 제우스는 조용히 트로이의 성벽과 그리스의 함선들을 바라보았다.



황금전차에 오른 제우스.



운명의 저울




 "용사들아, 적들을 해치우자!"



 아침이 되었다. 새날이 시작되자 양군은 일어나 다시 격렬한 전투를 시작했다. 무기들이 서로의 몸을 찢고, 베며 붉은 피가 쏟아졌다.


 


 땅에 누워있던 먼지들은 대지를 뒤흔드는 용사들의 격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병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성은 가득한데, 먼지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묘한 풍경이었다.



 "어디보자, 너희들의 운명을 한번 달아보지."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부분까지 솟아오르자, 제우스는 황금 저울에 두 개의 죽음의 운명을 달아보았다. 하나는 그리스, 하나는 트로이의 것이었다.



 

 신들의 아버지가 저울의 중앙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리스 인의 저울이 대지 쪽으로 내려앉았다. (땅은 인간과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때 제우스는 이다 산에서 그리스 인들의 진영에 벼락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그리스 병사들은 두려움에 싸였다.



 이도메네우스는 물론 왕중왕 아가멤논조차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장 네스토르만은 버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타고 있는 말이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뒤로 물러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헥토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쏜살같이 달려오는 헥토르를 디오메네스가 발견하고 오디세우스에게 외쳤다.



 "오디세우스, 나는 그대가 누구보다 뛰어난 전략가인 줄 알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그대는 겁쟁이처럼 달아나고 있군! 자, 우리 함께 네스토르를 향해 달려오는 저 맹수 같은 놈을 맞서봅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디오메네스는 할 수 없이 혼자가 가야 했다. 네스토르를 자기 전차에 태우고 헥토르를 향해 달려간다.



 "죽어라!"



 디오메데스가 헥토르를 향해 창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집중이 부족했다. 헥토르의 시종이자 마부인 에니오페우스의 가슴을 뚫었기 때문이다. 마부가 없어진 말들은 통제를 벗어나 미친 듯 날뛰었다. 마침 다른 이가 보이지 않았다면, 헥토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이때 산 위에서 모든 장면을 내려보던 제우스가 다시 벼락을 내렸다. 그것은 디오메데스의 전차 바로 앞에 떨어졌다. 네스토르의 손에서 말의 고삐가 미끄러졌다. 이미 겁을 먹은 노병은 말했다.



 "아아, 제우스가 당신에게 승리를 주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차라리 말을 돌려 달아납시다!"



 그러나, 함성의 전사 데오메데스가 그것을 좋아할 리 없었다.



 "노장이여, 그대의 말씀은 늘 옳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허용할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헥토르가 저 트로이 인들에게 ‘디오메데스가 도망쳤다’고 말하며 조롱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대지의 품속에 숨는 것 외에 달리 다른 것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스토르는 ‘절대 그럴 일 없다’며 젊은이를 회유했다. 이내 말머리를 돌리며 둘은 헥토르와 트로이 인들의 큰 함성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헥토르는 이때를 놓쳐서는 안된다며 자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그 광경을 본 새하얀 팔의 헤라는 분노하며 이를 갈 수 밖에 없었다.



아가멤논의 모습이 묘사된 그림.




헥토르의 영광




 한편, 그리스 인들의 방벽과 함선 사이에는 수많은 말들과 방패를 들고 선 군사들로 가득했다. 이때 헤라는 아가멤논을 충동질해서 부하들을 격려하도록 했다. 왕중왕은 그 위엄에 맞는 붉은 망토를 그의 우악스러운 손으로 잡아채며 병사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 그리스 병사들아, 정말 수치스럽다! 우리 군사 한 명이 백명이나 2백명은 거뜬히 상대하리라 생각했건만, 지금은 헥토르 한 사람 조차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다. 아, 아버지 제우스여!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당신께 훌륭한 제물들을 바쳤습니다. 오로지 하나, 트로이를 멸망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소원을 빌어야 할 듯합니다. 우리를 무사히 고향으로 보내주십시오."



 수많은 병사들의 눈물을 보니 제우스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죽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의 표시로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독수리는 제우스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독수리가 암사슴을 그리스 인들의 제단에 떨어뜨리고 가자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가슴 속에서 다시 용기가 피어올랐다.



 "승리와 명예를 위하여 싸우자!"



 튀데우스의 아들 디오메데스가 소리를 치며 뛰쳐나갔다. 뒤이어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 그리고 두 아이아스(아이아스는 형제다.)가 달려 나갔다. 활의 명수 데우크로스는 트로이 인들에게 화살 비를 날려 앞장 선 사나이들을 도왔다. 트로이의 사내들이 화살과 칼에 맞아 쓰러졌지만, 여전히 헥토르는 건재했다. 아폴론이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들의 가호를 받은 트로이는 망설임 없이 그리스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헥토르는 선두에서 대열을 이끌고 그리스 인들을 쫓았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헥토르가 휘두르는 창칼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헤라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만 쳤으며, 아테나는 ‘제우스가 드디어 테티스의 간청을 들어주려고 행동하는구나’ 생각했다.



 "자, 들어라. 그대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벼락을 내려 다시 수레를 끌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면 자네들은 우리의 안식처 올림포스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아테나는 두려움에 아무 말도 못 했지만, 헤라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대꾸했다.



 "알아요! 우리는 당신이 얼마나 강력한지 이미 잘 알고 있다고요. 그저 저들이 가엽고, 불쌍할 뿐입니다. (여신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어요. 다만, 불쌍한 그리스 인들이 당신의 맹렬한 분노 때문에 절망하지 않도록 전략만이라도 알려주게, 그것만 좀 허락해주세요."



 그러나, 제우스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하, 전략? 그런 건 다 소용 없을 거요. 헥토르는 결코 전쟁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고,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리스 인들은 계속 저렇게 절망 속에 처박혀 있을 테니 말이오. 오직 한 구의 시체만이 이 모든 것을 끝낼 격렬한 싸움의 시작일 거요."



 그리고 마침내 태양이 오케아노스 강으로 다시 저물자 대지 위로 또 다시 어둠이 밀려왔다. 트로이 인들은 이 날이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 그리스 인들은 ‘이제야 하루가 끝나는구나’ 생각하며 안도했다.



 제 아무리 용맹한 헥토르라도 밤이 오자 싸움을 그칠 수 밖에 없었다. 병사들과 말들을 쉬게 했다. 빵과 포도주를 마음껏 먹게 했다. 그리고 ‘장작들을 모아 새벽이 올 때까지 수많은 불을 피워두라’고 명령했다.




아가멤논의 선물




 완전히 역전된 전세에 그리스 인들은 두려워하며 슬픔에 잠겼다. 이를 가만히 볼 수 없었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언제는 트로이를 멸망시키도록 도와주겠다더니, 제우스는 마음을 바꾼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배를 돌려 고향으로 돌아가자."



 아무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침묵이 이어졌다. 그때 병사들을 밀치며 디오메데스가 나왔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제일 먼저 내가 해야 할 말은 이거요. 당신 참 바보 같은 생각으로 멍청이다운 말을 하는군. 제우스가 당신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깜빡한 모양이지? 왕중왕이여, 우리를 아주 겁쟁이로 생각하는 거요? 고향으로 가자고? 혼자 가시오. 우리 그리스 병사들은 저 트로이를 불태우기 전까지는 이곳에 있을 것이오. 아, 만약 이들도 내뺀다면, 그때 스테넬로스와 나만 남아서라도 끝까지 싸울 거요."



 동의한다는 듯 그리스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윽고 네스토르가 일어났다. 그는 덧붙이며 말했다.



 “아, 디오메데스. 그대는 싸움터에서만 빛나는 줄 알았더니 토론장에서 지혜롭기까지 하구나. 자, 내가 노병으로서 그대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하겠다. 일단 밤이 되었다. 저녁을 준비할 병사들과 방어벽 바깥을 경계해야 할 병사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가멤논, 당신은 원로들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훌륭한 전략을 만드시오. 저기 코앞에서 불을 피우고 파수를 보고 있는 적들이 보이지 않소? 저들이 저렇게 있는 한 편하게 마음 놓고 있을 수 없소이다!”



 병사들은 그의 말에 따라 파수를 위해 달려 나갔다. 아가멤논은 원로들을 자기 막사로 불러보았다. 네스토르의 경험은 여기에서도 빛이 났다.



 "제우스는 당신에게 수많은 병사들, 군대를 다스릴 통치권을 주었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의 지휘에 따라야 함이 마땅하지요. 하지만, 동시에 조언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말하겠소. 당신이 이전에 했던 일, 아킬레우스의 막사에서 브리세이스를 뺏어갔던 일을 아직 기억하시오? 그때 당신에게 박수를 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에게서 전리품을 빼앗고, 명예조차 짓밟았지요. 지금, 많이 늦긴 했지만 그에게 선물을 보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노장의 말이 맞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킬레우스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필요했으니 말이다.



 "맞습니다. 아,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무모했는지 일깨워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악한 분노는 내 분별력을 가렸습니다. 아킬레우스와의 우정이 회복된다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세발 솥 7개, 황금덩이 10개, 가마솥 20개, 12필의 말을 보내겠습니다. 아, 이게 다가 아닙니다. 천을 아름답게 짤 수 있는 여인 일곱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여인들이지요. 거기다 신께서 프리아모스의 도성을 함락하게 해주시는 그 날, 전리품을 분배할 때 우리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배에 청동과 황금을 가득 싣게 할 것입니다. 헬레네 다음으로 아름다운 트로이의 여인 20명을 먼저 고르게 할 생각입니다. 무사히 고향에 도착한 뒤에는 내 궁전에 있는 아름다운 딸 한 명을 골라 그를 내 사위로 삼을 예정입니다. 아, 지참금으로 그에게 풍요로운 도시 7개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가멤논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의 거절





 "아, 대지의 신이여, 우리가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와 에우뤼바테스를 아킬레우스에게 보냈다. 그들이 아킬레우스의 배와 막사가 있는 곳에 가까이 갔을 때 아름다운 수금 소리가 들렸다. 아킬레우스의 솜씨였다. 그 맞은편에는 아킬레우스의 절친 파트로클로스가 앉아 있었다. 아가멤논이 보낸 두 사람이 아킬레우스 앞까지 가자 그는 예상치 못한 방문에 놀라 일어났다.



 아킬레우스는 생각보다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막사 안에 들어가니 곱게 짜인 자줏빛 양탄자가 깔려 있다. 파트로클로스는 술과 술잔을 금방 내어왔다. 구운 빵과 고기의 냄새가 전령들의 코를 자극했다. 이때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을 높이 들었다.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를 위해 건배합시다!"



  분위기가 술과 고기와 더불어 익어갈 때 오디세우스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영웅이여, 그대가 지금이라도 노여운 마음을 거두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가멤논이 당신에게 값진 선물들을 준비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는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무장을 하고 나서지 않으시면 우리가 타고 온 배들은 모두 저 헥토르에 의해 박살이 날 것입니다. 제우스는 마음을 돌려 트로이를 향해 승리를 안기려 하고 있어요. 그걸 믿고 헥토르는 날뛰는 겁니다. 그러니... 제ㅂ..."



 "아니, 그럴 일은 없소."



 갑자기 막사 안의 공기가 차가워진 듯한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지혜로운 오디세우스의 말을 끊고 자기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하데스만큼 아가멤논을 향해 이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모르는군. 어떤 말도 나를 설득할 순 없소. 아가멤논이 내 명예를 빼앗고 짓밟았소. 그러니 당신들이 다른 용사들과 함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리스의 함선들을 구해야 할 것이오. 내가 왜 헥토르와 싸워야 하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나는 신께 기도를 올린 뒤 내 배들을 돌려 고향으로 갈 거요. 나의 어머니 테티스는 나에게 ‘트로이를 멸망시키면 영원불멸의 명예를 얻을 운명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명예는 얻지 못하겠지만, 죽음의 운명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했지. 잘 들으시오. 소와 가축은 약탈 할 수 있소. 세발솥과 말들은 돈을 주고 사 올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한번 벗어나면 빼앗을 수도, 사 올 수도 없지요. 자, 그대들이여. 밤이 깊었소. 이제 다시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리스 용사들에게 나의 이 말들 모두를 남김없이 전하시오."



 단호한 아킬레우스의 태도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 두 사내와 함께 따라온 포이닉스 노인이 자신이 타고 온 배들이 모두 불태워질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는 한때 아킬레우스의 스승이었다.



 "아, 아킬레우스. 지금은 그대의 그 분노를 삼켜야 할 때요.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은 사람도 신께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고 뉘우치면 신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소? 지금 아가멤논은 그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보물들을 줄려고 하지. 그러니 진심을 전하는 그 마음을 모욕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라오. 그리스 함선들이 불태워지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오. 자, 지금 무장을 하고 나오시오. 그리스 병사들 모두가 그대를 신처럼 존경할 테니 말이오."



 옛 스승의 말은 용사의 분노를 더욱 일으킬 뿐이었다.



 "명예요? 이제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더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내 대답은 저들이 전할 테니, 포이닉스. 당신은 여기에 남아 함께 있어 주면 좋겠습니다."



 체념한 사내들이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아이아스는 말했다.



 "오디세우스여,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자를 자랑스러워했건만, 우리가 보인 우정에 조금도 마음을 고쳐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군요."



 그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아킬레우스는 잠자리에 누웠다.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디오메데가 누웠다. 맞은편에는 파트로클로스가, 그리고 이피스가 함께 있었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의 염탐





 "하아, 내가 왜 그랬지..."



 아킬레우스의 단호한 말을 전해 들은 아가멤논은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한숨은 솟구치며 마음은 부들부들 떨렸다. 수많은 불빛들과 피리 소리, 저 시끄러운 트로이의 병사들이 득실대는 벌판을 바라볼 때, 총사령관의 무릎은 진정하지 못하고 힘을 잃었다.



 "아, 제우스여..."



 머리를 쥐어뜯으며 탄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기도를 올린 뒤 그는 네스토르의 막사로 찾아갔다. 거기 메넬라오스도 있었다. 그 역시 형과 같은 생각으로(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형제다.) 노장을 찾은 것이다.



 "으음, 아, 와낙스."



 네스토르는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방패와 창, 투구, 허리띠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미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한 번도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 용사는 늘 전투태세를 하고 있었다.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장군들을 모두 불러 깨우기 시작했다.



 “트로이 진지로 몰래 들어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자가 혹시 있소? 저들의 계획을 은밀히 캐낼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명성이 높아질 거요. 물론 보상 역시 충분히 받을 것이오.”



 이번에도 디오메데스는 자신이 그 일에 적임자라며 나섰다. 그가 제일 먼저 앞장서자 다른 장수들도 함께 가겠다며 지원했다.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 역시 그중 하나였다. 디오메데스는 오디세우스를 선택했다. 둘은 갑옷을 챙겨 입었다. 아직 어두운 밤, 길을 나서며 둘은 아테나에게 기도를 올린다.



 "여신이여, 트로이 인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우리가 명예를 얻어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우소서!"



트로이 진영에 잠입하는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




 한편, 반대편 진영도 잠에 빠지지 않은 것은 똑같았다. 헥토르 역시 장군들과 전략을 논의하던 참이었다. 그는 그리스 진지로 숨어들어 염탐할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돌론이란 사내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그는 에우메데스의 아들로, 매우 부유했다.



 "헥토르여, 내가 가겠소. 대신 그대는 아킬레우스의 빛나는 전차와 말들을 내게 주겠다고 맹세하시오."



 헥토르가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자, 돌론은 거침없이 행동했다. 물론, 그의 운명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은 생각보다 더 무모한 행동이었다.





돌론의 배신





 "잠깐, 저기 누가!"



 트로이 진영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먼저 본 것은 오디세우스였다. 그는 디오메데스를 잠시 멈추게 하고 시신들 옆에서 잠시 숨어있다가 자기들이 나온 진영 쪽으로 달려가는 돌론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돌론은 뒤따르는 누군가의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헥토르가 보낸 호위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염탐을 보내는 자에게 호위병을 붙이는 멍청이가 있던가?’ 생각이 들자 오싹함이 밀려왔다. 그는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리스 진영의 두 남자는 빨랐다.



"ㅅ... 살려주십시오!"



 오디세우스는 돌론 앞에 창을 던져 멈춰세웠다. 그는 창을 맞지 않을 것에 안도하기는 커녕 울음을 터뜨리며 호소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 아시면 제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보물은 물론이고 몸값을 수없이 주실 겁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여러 가지 것을 물었다. 헥토르의 행방과 그의 말들의 위치, 그리고 파수꾼은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 등이었다. 돌론은 모든 것을 다 숨김없이 다 말해주었다.



 "ㅈ... 전부 말하겠습니다. 우선, 헥토르는 지금 참모들과 이야기 중이고요, 트로이 인들 몇몇이 불을 피우고 파수를 보는 중입니다. 동맹군들은 모두 잠들었지요. 가장 바깥에는 트라케의 전사들이 자고 있는데, 대장 레소스의 말은 최고의 말이었습니다."



 옆에서 정보들을 다 들은 디오메데스는 목숨만 살려달라는 이 비굴한 애원을 뿌리치고 단칼에 목을 내리쳤다. 돌론의 시체에서 전리품들을 모두 벗겨 낸 뒤, 아테나에게 바치며 기도했다.



 "아테나여, 이 모든 것들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우리를 트라케 전사들과 말들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주십시오."



트로이의 첩자 돌론.



 그들은 바람처럼 달려 트라케 전사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피곤함에 절여진 그들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레소스의 말들은 매어진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디오메데스는 자고 있는 전사들을 칼로 베며 죽였다. 그동안 오디세우스는 말들을 풀어내어 끌어냈다.



 "어서 돌아가라! 트로이 인들을 깨우려는 신들이 가까이 왔다!"



 아테나의 귀띔이 아니었다면 둘은 돌론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물론, 트로이 편에 선 신들 역시 가만히 있진 않았다.




 아폴론은 아테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트로이 병사들 쪽으로 달려가 자고 있는 그들을 깨웠다. 하지만, 이미 죽어있는 전우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 외에 달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보아라, 두 영광스러운 사나이들이 도착했도다!"



 한편,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무사히 자기 진영으로 도착했다. 자기 말들 옆에 트라케 전사들로부터 빼앗아 온 말들을 잘 매어두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두 영웅은 깨끗하게 목욕을 한 뒤 식사를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 항아리에서 향기로운 포도주를 퍼냈다. 자기들을 보호한 여신을 위한 것이었다.





후회하는 아가멤논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 글에서 살펴본 이어진 서사에서 우리는 운명의 저울이 트로이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그리스 군사들을 땅으로 곤두박질하게 만든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이 날 가장 가슴이 쓰리고 불편했을 사나이는 아가멤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는 듯 모욕을 퍼부었던 대상, 아킬레우스를 향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그가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보냈다는 점에서 ‘설득의 기술을 모르는 오만한 왕’이라고 평한다. 물론 그런 평가가 정당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아가멤논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봐야 한다.



 그리스 진영에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아가멤논은 그중 ‘총사령관’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그는 노장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하니 그냥 돌아가자‘고 현실을 말하며 고집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왕중왕은 자기의 선택으로 일어난 상황에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하는 것으로 그의 모습은 끝나지 않는다. ‘설득이 실패했으니 무능하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고, 후회한 뒤 책임지려고 하는 모습은 ‘그가 왜 총사령관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후회는 늘 낭비일까?



 누구는 ‘낭비한 시간에 대한 후회는 더 큰 시간 낭비이다’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후회가 늘 그렇게 낭비이며, 부정적이라고 말하기엔 씁쓸하다. 그것은 ‘후회는 한 치 앞을 모르는 인간에게 늘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후회 없는 삶을 꿈꾼다. 이것은 당신이 아가멤논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후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후회하지 않을 순 없을까’ 생각한다. 왜 우리는 ‘후회하기’를 싫어할까? 그것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가슴이 무겁고, 한숨을 내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되겠는가? 후회 역시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후회만 해서는 나아질 수 없다.




 깊은 밤, 잠에서 잠시 깨어 생각나는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며 이불 킥을 날리기만 해서는 이불 위 먼지만 날아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불 킥 해도 괜찮다.



 이불 킥 해도 괜찮다. 후회하며 이불 킥을 세게 날려도 좋다. 후회한다는 것은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이고, 뒤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가진 여유는 아니니까.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세게 걷어찬 이불을 곱게 개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지난날의 후회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 킥을 기억한 채로 문밖으로 나가는 한 걸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기억하라. 이불 킥 세게 날린 밤이 지나면 곱게 개어 놓고 나가야 할 아침이 곧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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