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수용에 대한 이야기
“우와 맛있다. 또 사 먹어야지!"
‘00 슈퍼마켇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어떤 가게가 새로 들어오느냐’를 두고 동네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들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에 새로 이사한 노부부는 슈퍼마켇이 있던 자리에 ‘훼미리 마트’라는 처음 보는 이름의 가게를 열었다.
‘오픈빨’이 잘 받았던 그 일주일 동안 나는 동생과 함께 거길 뻔질나게 들어갔었다. 처음 보는 삼각형 모양을 한 그 김밥은 까는 방법은 둘째치고, 맛은 얼마나 신기하던지. 지금이야 쳐다보지도 않지만, 그 당시에는 세모난 모양 때문이었는지 호주머니 동전을 모두 그걸 사 먹는데 써버렸던 기억이 있다.
"오, 진짜요? 이건 왜 이렇게 싸요?"
‘기성복’이라고 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양복 하나 쯤 있어야 한다는 말에 친구들과 처음으로 양복 아울렛 매장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거기엔 사이즈별로 여러 가지 색깔에, 패턴으로 수놓아진 재킷과 바지들이 있었다. 맘에 드는 넥타이에, 양복가방까지 챙겨주는 사장님이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교복을 맞추려면 여기저기 사이즈를 재고 기다려야 했는데, 무슨 음식점에서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주문을 하면 금방 내 앞에 나오는 햄버거처럼, ‘뚝딱 나와서 바로 들고 갈 수 있는 양복이 신기하다’고 가게를 나와 감자튀김을 친구들과 집어먹으며 우리는 떠들었다.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을까?'
그게 누구의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위인전을 읽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혹시 정말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도 뭔가 정해진 미래가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좀 속 편하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결말이 다 정해져 있다니. 기성복처럼, 이미 만들어져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햄버거처럼 인생도 ‘레디-메이드’라면 얼마나 웃기고 비참할까?
진짜 그런 인생이 있을까? 처음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서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레디-메이드 인생’ 말이다. 아마 당신은 무언가를 떠올릴지 모른다.
신탁을 받고, 그 신탁에 따라 그저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던 수많은 신화 속 영웅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들의 삶은 '레디-메이드' 였을까? 이제 일리아스의 가장 긴 부분, 전투 셋째 날을 이야기하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제우스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잔혹한 전쟁의 병기를 들고 그리스 인들의 함선에서 날뛸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여신은 함선들 한가운데 섰다. 여신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굼벵이 마냥 굼뜨지 말고 어서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여신 뿐 만이 아니었다. 총사령관 아가멤논 역시 진지를 돌아다니며 ‘어서 무장을 하라’며 고함치고 다녔다. 자신 역시 청동 갑옷을 입고 무장한 상태였다.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청동은 햇볕에 빛나 섬광이 하늘을 뚫을 듯이 번쩍거렸다.
'아킬레우스, 네가 끝까지 그렇게 나온다면 남아 있는 자들과 고군분투라도 하는 수밖에...'
왕중왕은 달리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결전의 태세를 갖추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다행히도 헤라와 아레나가 천둥소리로 그들에게 도울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기에 병사들은 생각보다 겁을 먹지 않고 자기 대장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겁쟁이 트로이 인들아, 덤벼라!"
아가멤논은 말 그대로 칼춤을 추는 것 같았다. 엄청난 기세로 트로이 인들을 도륙했다. 어느 새 트로이 성의 스카이아 문이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낄 새도 없이 와낙스는 흥분할 대로 흥분한 상태였다.
"어리석은 왕이여, 조금 더, 조금 더 오너라."
사실 트로이 군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동안, 헥토르는 조용히 그리스 군사들과 아가멤논이 깊이 들어올 것을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왕중왕이 계속해서 들어오면서 부상을 당하는 순간을 호시탐탐 노렸던 것이다.
"잘 들으시오, 용맹한 자여. 내일이 되면 그리스 인들과 아가멤논이 아침부터 물 밀듯 들어올 거요. 그러면, 그들이 스카이아이 성문 앞까지 오게 그냥 두시오. 곧 아가멤논은 상처를 입을 테니, 그때 공격하시오."
그렇다. 이미 제우스는 이리스를 보내 헥토르에게 그리스 인들의 동태와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일일이 전략을 전달했던 것이다. 마침내, 아가멤논은 지혜로운 안테노르의 두 아들과 싸우다 팔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왕이여, 크게 다치셨으니 돌아가셔야 합니다!"
와낙스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하필 상처를 입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왕중왕의 용맹함은 고통을 이기기엔 지금 너무 초라해 보였다.
"어쩔 수 없군. 자, 다시 돌아가자!"
부상당하는 그리스 전사들
그때였다. 타이밍을 재고 있던 헥토르는 수풀에서 튀어나온 호랑이처럼 맹렬한 기세로 그리스 군사들을 학살하며 와낙스와 그의 군사들을 물고기를 몰 듯 함선 쪽으로 몰았다.
비석 뒤에 숨어 활을 겨누던 미남자 파리스의 화살이 빛을 내며 날아갔다. 그것은 용맹한 디오메데스의 오른쪽 발을 맞췄다.
"하하, 이거 보라지. 내 화살은 빗나가는 일이 없다고!"
기세등등한 파리스는 자신의 활 솜씨를 뽐내며 으스댔다. 하지만, 디오메데스의 투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활쏘기 정도에, 계집이나 쫓아다니는 멍청아. 겨우 발바닥에 조그마한 상처를 내고 우쭐대는 꼴이 우습구나!"
다친 동료를 보고 다가와 앞을 방패로 가려주는 오디세우스 덕분에 그는 화살을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격렬한 통증은 디오메데스가 다시 함선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오디세우스는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했다. 이제 그 외에 다른 그리스 남자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 잠시만 기다리시오!"
혼자 남은 오디세우스를 트로이 인들이 둘러싸고 공격할 때 오디세우스의 용감한 고함을 들은 아이아스와 메넬라오스는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오디세우스는 살고자 창을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합세한 두 사람이 오디세우스를 돕고자 무기를 휘둘렀다. 트로이 인들이 쓰러진다. 그렇게 오디세우스는 상처를 입긴 했지만, 다시 함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운명
한편, 네스토르는 전력을 다해 전차를 몰아 마카온을 말에 태우고 함선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스 인들의 뛰어난 의사 마카온 역시 파리스의 화살에 어깨를 맞고야 만 것이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테티스의 아들, 빨리 달리는 자 아킬레우스였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말했다.
"메노이티오스의 아들이여, 나의 사랑하는 전우여. 우리 동료들이 이제 곧 내 무릎을 잡고 오열하겠구나. 이제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저들을 찾아왔으니, 이제 저들은 나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야. 자, 그러면 이제 자네가 네스토르에게 가서 물어보게나. 혹시 다친 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 마카온이 아닌지 말이야."
파트로클로스가 노장의 막사 안으로 들어간다. 벌떡 일어난 노장은 기품도 잊은 듯 그의 손을 덥석 잡고는 앉을 것을 권했다. 방문자는 ‘다친 병사가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마카온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네스토르는 그에게 말을 늘어놓는다.
"아킬레우스의 친우인 당신이 그를 설득해주시오. 우리는 지금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 아킬레우스 뿐이오.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의 간곡한 부탁에 파트로클로스는 가슴이 뛰었다. ‘다시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노인의 말을 친구에게 전달하기 위해 돌아가야 하는 곳으로 급히 뛰어갔다. 바로 그때 화살을 맞고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에우리필로스가 보인다. 그는 말했다.
"파트로클로스여, 이제 우리에겐 아무 희망이 없소. 트로이 인들은 더욱 강해지는데, 우리는 모두 다쳤소. 아, 나를 구해주시오. 치료 약으로 고통을 없애주오."
파트로클로스는 그를 부축하여 막사까지 데려갔다. 화살을 뽑아내고 피를 닦아냈다. 풀뿌리 잘 비벼 상처에 붙였다. 이내 신음이 잦아들었다.
파트로클로스가 막사에서 에우리필로스를 치료하는 동안에도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 아이아스와 데우크로스는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에 맞서야 했다. 세 명의 사내는 끝까지 방벽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제우스의 지지를 받는 헥토르가 나타났다.
"어디 나까지 한번 막아보시지!"
큰 소리를 내며 헥토르가 큰 돌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결국 문짝은 돌 때문에 박살 났다. 이내 방벽이 뚫리고 수많은 트로이의 병사들이 쏟아져나왔다. 마치 댐이 무너지고, 물이 쏟아져나와 근처의 모든 것을 휩쓰는 장면과도 같았다.
"전군, 모두 달아나라! 함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그리스 군은 모두 함선으로 쫓겨 달아나야 했다.
"자, 끝까지 싸워라! 포기하지 마라!"
방벽이 뚫렸으니, 이제 함선들 옆까지 그리스 인들은 밀려났다. 제우스는 함선까지 밀고 들어가는 헥토르와 트로이의 군사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다른 곳을 둘러보려던 차였다. 그때, 그리스 병사들이 가을날 낙엽처럼 스러지는 모습을 마음 아파했던 신이 기회를 노렸다. 포세이돈이었다.
"아이아스여, 아이아스여!"
신은 그나마 싸우려는 의욕이 남들보다 더 남아있었던 두 아이아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대들 두 사람이 그리스 군대를 구할 수 있다. 그러니 굴하면 안된다! 용기를 내라!"
그렇게 말한 뒤 포세이돈이 지팡이로 두 사람을 건들자, 그들의 가슴은 힘과 용기로 다시 가득 차게 되었다. 그제야 그들은 신을 알아보았다.
“올림포스의 신들 중 하나가 예언자의 모습으로 우리 옆에서 격려하는구나! 아, 우리의 가슴이 용기로 가득 찼으니, 적진 한복판으로 돌진하고 싶은 마음은 당연하겠지.”
전의에 다시 불타는 두 사람을 보고 절망과 좌절의 눈물을 흘리던 그리스 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다시 거대한 방벽을 만들었다. 창과 창, 방패와 방패, 투구와 투구, 사람과 사람이 잇대어 바싹 붙어 섰다.
곧 헥토르와 트로이 인들이 몰려왔지만, 그들은 촘촘히 붙어 칼과 창을 휘두르는 그리스 병사들의 대형을 어찌하지 못했다. 헥토르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소리쳤다.
"군사들아! 물러서지 마라. 제우스가 나를 이끄는 것이 사실이라면, 저들이 우리를 감히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군사들은 만만하지 않았다. 많은 트로이 인들과 동맹군이 죽거나 다쳤다. 그때 헥토르의 눈에 멀쩡한 모습으로 뒤에 물러나 있는 파리스가 띄었다.
"파리스여, 너는 분명 우리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자로구나! 아, 트로이의 성벽이 곧 무너지면 너 역시 죽음의 구렁텅이에 뒹굴게 되겠지!"
"아닙니다! 나도 줄곧 싸우고 있었다고요! 형님이 찾는 그 전사들은 다 죽어 없지만, 그래도 다른 병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는 저 군사들과 함께 형님이 이끄시는 데로 따르겠습니다. 약속합니다!"
헥토르는 더 대꾸하지 않고 파리스와 남은 군사들과 함께 치열한 전투의 한 가운데로 뛰어 들어갔다. 청동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함성, 찌르고, 베이며 죽어가는 자들의 소리가 가득했다.
"아,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마카온을 돌보며 막사에 머물던 노장 네스토르는 함성을 듣고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에 그제야 허물어진 방벽과 그 사이로 두려워 떨며 뒷걸음질 치는 동포들의 모습과 기세등등한 트로이 군사들의 모습이 비쳤다.
"아가멤논, 와낙스여! 어디 있습니까!"
네스토르가 막 아가멤논을 찾기 위해 나서는데 욱신거리는 상처를 싸맨 채로 올라오는 오디세우스와 아가멤논, 그리고 디오메데스가 보였다. 용감하게 선두에서 적들을 도륙하던 와낙스의 모습은 어디 가고, 그는 지금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달아날 궁리로 가득해 보였다.
"밤이 이제 곧 올 거요. 그때 모든 함선을 끌어내립시다. 바다에 배들을 모두 띄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밤이 되면 돌아가자고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강하게 반발했다. 제우스 몰래 나온 포세이돈 역시 아가멤논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가멤논이여, 그대는 신들의 노여움을 받지 않은 자이다. 그러니, 트로이의 왕들과 장군들이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그대의 눈이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땅에서 포세이돈이 그리스 인들을 격려하고 있는 와중에 헤라는 올림포스의 황금 옥좌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으로 전쟁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포세이돈의 행동을 보고 내심 뿌듯해했다.
"아, 나는 제우스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그녀 역시 전쟁터에 번개를 내리는 제우스를 어떻게 속일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한 가지 계책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솟아났다. 제우스가 있는 이다 산에 아름다운 복장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헤라를 본 제우스는 반드시 그녀를 안고 영원한 사랑을 나누려고 할 것이며, 이후 제우스는 달콤한 잠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헤라는 아프로디테를 꾀어 그녀의 허리띠를 손에 넣었다. 거기에는 애정과 욕망, 그리고 사랑의 밀어와 설득이 들어 있었다.
"자네에게 황금 보좌를 주겠네. 내가 제우스를 자빠뜨릴 테니, 그때 그를 잠에 빠뜨리면 되네.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잠의 신은 제우스의 보복이 두렵다며 주저했다. 그런 잠의 신에게 헤라는 여신 파시테에를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잠의 신은 그녀의 계획에 동조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포세이돈은 이제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을 넘어 직접 전투에 나섰다.
"용맹한 포세이돈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큰 아이아스가 고함과 함께 돌덩이를 던졌다. 헥토르는 돌에 맞고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어 작은 아이아스도 이때 급하게 달아나는 트로이 군사들을 끝까지 쫓아가 모조리 죽였다.
"음?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제우스가 침을 닦으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끔찍한 광경을 마주쳤다. 헥토르가 전차에 실려 나가 트로이 성 가까운 들판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던 것이다. 제우스는 헤라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대는 내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소! 나는 트로이를 완전히 멸망시킬 작정이오. 다만, 저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전까지 올림포스의 그 누구도 나를 막거나, 나서면 안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그 말을 들은 헤라는 급히 올림포스로 날아갔다. 모든 신들에게 아버지의 계획을 알리고는 포세이돈에게 여신 이리스를 보냈다. ‘전장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제우스가 정신을 차렸음을 알고 포세이돈은 황급히 자기 자리로 떠났다. 이제 제우스의 명령을 받고 아폴론이 헥토르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것을 본 트로이 인들은 다시 그리스 인들의 방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큰일났구나!"
에우필로스의 막사에서 가를 돌보던 파트로클로스는 이 모든 광경을 생생하게 다 목격했다. 부상자를 돌보는 일도 중요했지만, 어서 아킬레우스에게 돌아가 자기가 본 것을 말해야 했다.
한편, 그리스 군은 함선을 둘러싸고 밀고 들어오는 트로이 군에 끝까지 팽팽하게 맞서려고 애를 썼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서려는 동료들을 보며 안드라이몬의 아들 토아스는 외쳤다.
"아이아스의 손에 죽기를 바랐던 헥토르는 다시 기적처럼 살아났다는 것을 그대들도 알 것이다! 아, 제우스가 그의 곁에 있는 것은 눈을 감고 봐도 뻔하다. 자, 함선을 지킬 군사들은 조용히 물러나라. 그리고 가장 용맹한 전사들아, 우리는 여기 남아야 한다! 여기 끝까지 버티고 남아 헥토르와 맞붙어 싸우자!"
이제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킬레우스는 일전에 ‘전쟁터에 다시는 나오지 않겠노라’ 맹세했지만, 인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위대한 번개의 신,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가 계획한 그 시간이 이제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그대가 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라도 해주게. 그대의 빛나는 무구들을 나에게 빌려줄 수는 없겠나? 그대의 투구와 갑옷, 창칼과 방패를 가지고서라도 나는 저기 가야겠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애걸했다. 네스토르가 이야기한 대로 자신이라도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장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래, 자네라도 가지 않는다면, 이제 트로이 놈들은 여기까지 들이닥칠 테니 말이야."
아킬레우스는 그의 간청을 듣고 무기와 갑옷을 친구에게 기꺼이 건넸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당부를 잊지 말라며 말을 보탠다.
"함선까지네. 함선에서 트로이 인들을 몰아내면, 그들을 쫓아가선 안되. 바로 돌아와 나에게 그것들을 모두 돌려주게. 자네 혼자 그리스 군사들을 데리고 트로이의 성벽을 공격하는 일은 너무 무모한 일이니까 말이야."
"아니? 저자는 아킬레우스가 아닌가? 큰일이다! 아킬레우스가 나타났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걸치고 전장에 뛰어든 파트로클로스를 본 트로이 인들은 아킬레우스가 드디어 나왔다고 생각하고 겁에 질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헥토르 역시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빠른 말을 몰아 달아났다.
"자, 그리스 인들아! 이때다. 적을 모조리 무찌르자!"
아킬레우스의 투구에서 그의 친구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더욱 용기를 냈다. 제우스의 자손 사르페돈 역시 창에 맞아 죽었다. 이때 제우스는 잠시 또 고민한다.
"아, 지금 파트로클로스를 헥토르의 손에 죽이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친구의 갑주를 뒤집어쓴 저자가 트로이를 조금 더 유린하게 두어야 할까?"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를 추격했으니, 결국 제우스는 트로이 인들을 조금 더 고생시키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스카이아이 문 안으로 들어간 헥토르를 잡기 위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이놈! 이 도시는 그럴 운명이 아니다! 너와 아킬레우스는 절대 트로이를 함락할 수 없어!"
성 위에서 아폴론이 큰 소리로 일갈하자 파트로클로스는 질겁하며 성벽 오르는 일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물러나는 파트로클로스를 보자 헥토르는 성 밖으로 나왔다. 둘은 접전을 벌였다. 눈앞의 헥토르를 그의 친구 아킬레우스 못지않게 끝장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파트로클로스는 아폴론은 깜빡 잊어버렸다.
"어리석은 인간아!"
아폴론이 그의 등과 머리를 내리치자 투구가 떨어지고, 창이 부러진다. 이윽고 갑옷과 방패도 다 풀어졌다. 이제 파트로클로스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에우포르보스가 던진 창에 맞고서야 파트로클로스는 전우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 기회를 헥토르가 놓칠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헥토르의 파멸을 예언했다.
"나뿐만 아니다. 그대 역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미 죽음과 강력한 운명은 그대 곁에 있다. 결국 아이아코스의 손자 아킬레우스가 그대를 쓰러뜨리리라!"
아버지 메노이티오스는 아르고 호의 모험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들 파트로클로스는 그렇게 생을 마치지 못했다. 친구 아킬레우스의 조언을 잊은 이 젊은이는 헥토르의 손에 죽게 되고, 그의 죽음은 결국 이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낳는다.
“아니, 이게 뭐야! 다 어디 갔지?”
파트로클로스가 죽고 누군가는 그의 시신을 지켜야 했다. 용맹한 메넬라오스는 에우포르보스를 죽이고 분투했지만, 헥토르가 너무 막강했기에 아이아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를 부르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무기와 갑옷을 모두 챙겨버렸다. 이제 시신만은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헥토르는 펠레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받은 불사의 말들을 손에 어떻게든 얻고 싶어 난리를 쳤지만, 제우스는 단호했다. 그 사이 안틸로코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비보를 전하기 위해 그의 전함으로 달려갔다. 메리오네스와 메넬라오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전장을 벗어났다.
"자, 파트로클로스를 가져가려면 우리를 상대해야 할 거다!"
아아네이아스와 헥토르는 시신조차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둘을 막아선 두 아이아스는 만만하지 않았다. 한편, 아킬레우스는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승리했다면 저렇게 그리스 군사들이 도망쳐올 리 없었기 때문이다.
"왜 저들은 함선 쪽으로 도망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뮈르미도네스 족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 혹시 파트로클로스가 죽인 것인가?"
그리고 이내 발 빠른 안틸로코스가 도착해 ‘그대의 친구가 죽었습니다’ 말하자 머리를 쥐어 뜯고, 흙을 얼굴에 뿌리며 통곡했다.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은 테티스는 바다로부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들아, 너는 왜 슬퍼하고 있는 것이냐? 그리스의 아들들이 함선에 갇혀 너를 간절히 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제우스께서 너의 기도를 들어주셨는데, 왜 그리 괴로워하는 것이냐!"
그러자, 무적의 전사는 신음하며 대답했다.
"아, 어머니 맞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으니 이제 다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아아, 나는 동료들이 죽어가는데도 함선 옆에 앉아 아가멤논에 대해 노여워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이제, 나는 다 잊으렵니다! 헥토르와 싸우겠어요!"
그러자 테티스는 눈물을 흘리며 헥토르가 죽으면 그다음은 네가 죽을 운명이라고 말했다. 아킬레우스는 죽을 운명이라도 이제 고귀한 명성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서 갑옷을 만들어 올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참으라고 간청했다.
이 와중에도 그리스 인들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헥토르는 세 번이나 투지로 쫓아와 시신을 빼앗으려 했다. 그때 마다 두 아이아스가 없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우리는 모른다.
바람처럼 빠른 여신 이리스는 제우스와 그 외의 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헤라의 말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했다.
"펠레우스의 아들아, 일어나라! 트로이 인들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가져가려 하는구나! 네가 가서 구하여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어머니가 새로운 갑옷과 무기를 가져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 이리스는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트로이 인들은 그대의 모습만 보아도 겁을 내고 도망갈 테니 말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리스 전사들이 시간을 벌 수 있겠지요."
다시 나타난 아킬레우스를 보고 트로이 인들은 혼비백산했다. 마부들은 숨이 멎는 것 같이 두려워 전차를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그리스 인들은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가져왔다.
그제야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전사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킬레우스는 차가운 친구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말했다.
"아, 파트로클로스여, 이제 그대의 뒤를 따라 나도 가겠네. 그러나, 그대를 죽인 헥토르의 목과 갑옷을 가져오는 것이 먼저이네."
‘깡! 깡!’
올림포스의 대장간에서는 헤파이스토스가 망치를 두들기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새벽이 오기 전 테티스에게 무기와 갑옷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고결한 여신 테티스가 자신의 집에 방문한 이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테티스여, 당신의 마음을 말해주시오. 내가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리고 테티스는 눈물을 흘리며 또렷한 목소리로 그간의 이야기를 대장장이 신에게 전했다. 그는 눈물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이 가련한 여신에게 말했다.
"용기를 내시오. 갑옷이라면 난 누구보다 자신이 있으니 걱정 마시오. 아, 잔인한 운명이 그 아이에게 닥치는 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그 녀석을 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한 뒤 헤파이스토스는 풀무가 있는 곳으로 가 불 쪽으로 돌려놓았다. 작업이 시작되었다.
20개의 풀무는 용광로 아래쪽으로 여러 강도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단단하고 영원히 변형되지 않을 것 같은 청동을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주석도 넣고, 아주 값비싼 금과 은을 넣었다. 그는 크고 단단한 방패를 만들었다. 표면에는 훌륭한 상징을 문장으로 새겼다. 가장자리에는 반짝이는 세 겹의 테를 둘렀다. 다섯 겹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방패 속에는 세상을 구현해냈다.
거기에는 하늘과 대지, 바다, 영원한 태양과 달, 그리고 수많은 별자리를 아로새겼다.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사는 두 도시 역시 잊지 않았다. 이윽고 방패에 이어 불빛보다 더 밝은 가슴받이와 전사의 관자놀이에 딱 맞는 금빛 술의 투구를 만들었다.
유연한 주석으로 만든 무릎보호대까지 모든 것이 완성되자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것들을 모두 챙겨 올림포스산에서 매처럼 달려 뛰어 내렸다.
영웅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금방 책을 집어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몇 가지 있겠지만, 그중에는 ‘진부하다’는 착각이 한몫하리라 생각한다. 왜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일까? 바로 ‘운명의 흐름’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작품의 전체 흐름을 주도하는 아킬레우스는 ‘죽을 운명’으로 이미 그의 끝이 예고되어 있다. 그가 트로이 원정에 참가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그에게는 신탁이 주어진다.
'트로이에 가면 큰 명예를 얻고 이름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단명할 것이다. 그 곳에 가지 않는다면 오래는 살겠지만,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신화와 영웅 이야기를 읽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반감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왜 고대인들은 이런 장치를 넣어서 자기들의 작품을 진부하다는 오명 속에 처박히게 만든 것일까? 일리아스와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선택은 매우 독특한 문학 장치이다.
신탁이 내려지고, 인간은 신의 손가락에 따라 움직이는 마치 체스 판의 검고 흰말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고대 문학의 저자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영웅과 수많은 인간들이 신들의 뜻이 아니라 자유의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는 태도를 통해 우리가 운명을 어떻게 사랑하고, 필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제시한다.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뿐만이 아니다. 무한한 신과 비교했을 때 한 없이 열등해 보이고, 유한한. 그래서 초라해 보이는 인간의 삶이 보여주는 진가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서사시에서 영웅은 자신을 제한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약점은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택하는 용기를 스스로 보여줌을 통해 강점이 된다. 이것을 눈치챈 사람은 영웅이 체스 판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경기를 주도하는 플레이어임을 알게 된다.
비록 판이 다 짜여 있다고 해도, 영웅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존재이다. ‘신의 뜻과 개입’은 이들을 그저 장기 말, ‘레디-메이드‘로 착각하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웅, 그는 체스판에서도 멀고, 기성복은 커녕 삼각 김밥도 모른다. 신조차 감히 함부로 선택하지 못하는 죽음을 향한 선택지를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레디-메이드’를 거부하고 스스로 운명을 만들고 사랑하는 그들을 우리는 주저 없이 영웅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