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할 수 있는,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러니까, 잘 들어. 절대 해야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고."
벌써 10년쯤 된 이야기다. 고등학생 티를 아직 벗지도 못한 일명 ‘고등학교 4학년’ 나는 신입생 동기들과 함께 신입생 O.T를 갔다. 첫째 날이었나? 우리 조랑 같이 놀아주던 선배가 그렇게 말하더라. 대학 생활하면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서.
"다른 건 몰라도 절대 이건 하지 마. ‘조장’ 말이지. 너네들이 고등학교에서 했던 그런 조별 과제랑은 다르다고. 별놈이 다 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형 말이 구구절절 다 맞았다. 다른 건 몰라도 ‘조장 하지 마라’는 그 말은 정확했다. 별로 크게 데인 적은 없지만, 한번 크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거든.
"누가 조장 하실래요?"
커리큘럼 특성상 ‘일반 선택’으로 들어야 할 과목들이 있었다. 보통은 다른 과의 선택 과목으로 열린 과목이었는데, 보통 나는 내가 자신 있는 내용의 과목만 쏙쏙 뽑아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피켓ㅌ... 아니, 수강신청에서 실패한 탓에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하나만 남은 일반선택 과목을 들어야 했다.
‘조별 과제가 있다’는 교수님의 말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실라부스(강의계획서)에 이미 다 나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놀란 건 우리 조가 다 모였을 때였다. 아무도 조장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 이해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본인들에겐 전공 선택이었고, 나만 타과생인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내가 조장을 할 일은 만들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나... 하고 분노로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두들기면서 생각을 한다.
결국 어쩌다 내가 해버렸다. 아, 그런데 정말 그 선배가 말해준 이야기랑 별로 다르지 않더라. 정말 조별 프로젝트를 내가 다 했다. 아, 아니다. 한 두 명 정도? 도와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분에 나는 학기 말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그 친구들의 이름을 전부 애니메이션 효과로 지우는 것을 보여줬고, 실시간으로 그 악ㅁ... 아니 학우들의 표정이 썩는 것을 리얼하게 3D로 볼 수 있었다.
그래, 맞다. 대학생들에게 있어서 조별 과제 있는 과목은 정말 부담된다. 거기에 묘하게 흐르는 조원들 사이의 분위기 안에서 ‘왠지 내가 조장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기분이 더 싸해진다. 꼭 필요하지만, 그래서 누구나 ‘우리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지만, 정작 내가 하기에 부담되는 그런 것이 조장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꼭 있어야 하는, 그러나 누구나 선뜻 ‘제가 할게요’ 말할 수 없는 그것을 묵묵히 지고 갔던 남자가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속에서 혹시 당신은 그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본 글에서 찾지 못하면 아마 다시 못 찾을 수도 있다. 사람은 의외로 아침 이슬 같은 존재라서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지니까.
"자, 여기 있다 얘야."
아직 새벽의 여신이 곤히 자고 있는 인간들에게 빛을 전해주기도 전이었다. 테티스는 대장간에서 받은 선물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 그리스 함선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도착했다.
아들은 아직도 친구의 시체를 껴안은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마도 슬픔에 밤잠을 다 설쳤는지도 모른다. 아픔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심을 했으니 전장에 다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준 갑옷이며, 투구와 방패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서로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 어머니. 분명 이것들은 영원불멸의 신이 아니고서는 만들 수 없는 것들이로군요. 이제 저는 이것으로 무장을 한 뒤 전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아, 그런데 내가 혹시 나가 있는 동안 가여운 이 친구의 시신이 모욕당하면 어떻게 할지...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그러자 테티스는 시신을 잘 돌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신의 음식 암브로시아와 음료 넥타르를 콧구멍에 부어 시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하고 난 것을 보고서야 아킬레우스는 큰 함성을 지르며 그리스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모두가 여전히 상처 때문에 아픈 몸을 끌고 나왔지만, 그들의 눈에는 분명 생기가 돌았다.
병사들이 모두 모이자 아킬레우스는 말했다.
"아가멤논이여, 당신과 내가 한 여자를 두고 서로 노여워했습니다. 아, 차라리 아르테미스가 그녀를 화살로 쏘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형제들이 대지에 쓰러졌습니까? 이제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병사들과 싸움터로 나섭시다. 나는 트로이 진영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진정 용감한지 시험해 볼 것입니다. 장담하는데, 내 창을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무릎을 구부리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병사들은 그가 이미 노여움을 풀었음을 깨닫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가멤논이 돌아서서 그들에게 답한다.
"자, 용맹한 다나오스의 전우들아, 아레스의 용사들아. 이제 내가 아킬레우스에게 내 의중을 말하려고 하니 모두 잘 듣도록 하시오. 제우스와 운명의 신, 그리고 분노의 여신이 나에게 분노의 광기를 불어넣은 탓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소. 인간인 내가 신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을 올바르게 돌려놓으려고 하니 잘 보시오. 먼저 화해의 대가로 금은보화를 내놓겠소. 자, 아킬레우스. 그대는 싸움터로 가라. 내가 약속한 선물들 모두를 그대에게 반드시 주겠다!"
아킬레우스는 그저 트로이 인들을 한시라도 빨리 응징하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아가멤논은 병사들과 아킬레우스를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 것을 명령했다.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음식을 입에 댈 수 없다며 차라리 지금 나가서 헥토르를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오디세우스 역시 전장으로 당장 뛰쳐나가려는 아킬레우스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킬레우스여, 내 말을 들어보시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은 하루면 충분하오. 끔찍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먹고 마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소? 그대가 청동 갑옷을 입고 쉴새 없이 싸우기 전, 먼저 그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오디세우스는 이렇게 말하고 아가멤논의 막사 안에 들어갔다. 아킬레우스가 받을 선물들을 챙겼다. 일곱 개의 세발솥, 윤이 나는 스무 개의 가마솥, 그리고 말 열두 필이었다. 옷감 짜는 일곱 명의 여인들과 브리세이스 역시 잊지 않았다. 미의 여신같이 아름다운 브리세이스는 따라온 여인들과 함께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한편, 그리스 군의 원로들이 아킬레우스에게로 왔다. 그들 역시 같은 간청을 했다. 슬퍼하는 아킬레우스가 안타까운 것은 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를 가련하게 생각한 제우스는 아테나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전우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아킬레우스가 불쌍하구나. 어서 달려가라. 저 사내의 가슴에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넣어주어라."
아테나는 순식간에 아버지의 명대로 한 뒤에 올림포스의 궁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그리스의 반격이 시작된다. 함선에서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아킬레우스가 있었다. 헤파이스토스가 그를 위해 만들어준 갑옷과 방패, 투구에서 나오는 광채는 마치 하늘에서 별이 내려온 것은 아닌지 착각하게 할 정도였다.
"아주 잘 맞는군, 역시 신의 솜씨야..."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몸에 꼭 맞는 갑옷에 감탄했다. 이윽고 아버지의 창을 빼 들었다. 아킬레우스가 아니면 감히 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하고 무겁고 단단한 창이었다. 마부 아우토메돈이 말을 전차에 매달았다. 반짝이는 채찍을 휘어잡고 전차에 뛰어올랐다. 아킬레우스가 뒤를 따라 전차에 올랐다. 전의를 불태우며 투구를 고쳐 썼다. 그리고 자기 준마들에게 소리 질렀다.
"자, 이번에는 더욱 힘차게 달려야 한다! 파트로클로스에게 한 것처럼 나를 그곳에 그냥 두고 오는 일은 없어야 하니 말이야."
그때 갑자기 가장 선두에 있는 말 한 마리가 머리를 돌려 말을 한다. 헤라가 말의 입을 빌려 할 말을 전한 것이다.
"아, 이번에는 반드시 당신의 생명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영웅이여,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신과 강력한 운명의 힘이지요."
그 말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여기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트로이 인들을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소리치며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앞서 달려갔다.
저 앞 맞은편 언덕에는 트로이 병사들이 전열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한다. 싸우려는 열망으로 다시 가득해진 아킬레우스 주위로 그리스 병사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올림포스 산꼭대기에는 제우스의 부름을 받고 신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몰래 인간의 전쟁에 개입했던 바다의 신도 있었다.
"포세이돈, 내 마음을 다 짐작하고 있겠지. 인간들의 죽음은 모두 내 일이다. 그러니 난 여기에서 혼자 싸움을 즐길 것이다. 그대와 다른 신들 모두는 전부 그리스, 아니면 트로이로 달려가라. 그대들 마음 내키는 쪽을 도와라."
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신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달려갔다. 헤라와 아테나, 포세이돈, 헤르메스는 그리스의 검은 함선 쪽으로 갔다. 헤파이스토스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아레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레토와 크산토스, 아프로디테는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신들은 모두 전쟁을 부추기기에 정신을 쏟았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들도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제우스는 마침 벼락을 내리쳤고, 포세이돈은 바다 밑을 뒤흔들어 대지와 산들이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올림포스의 입주자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폴론은 아이네이아스를 격려하며 아킬레우스와 싸우라고 부추겼다.
“아, 그대는 제우스의 딸 아프로디테에게서 태어났다. 이에 반해 저 아킬레우스는 훨씬 천한 여신, 테티스와 바다 노인의 아들일 뿐이다. 그러니 단단한 무기를 들고 나가라. 아킬레우스와 맞서라.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뒤돌아보지 말아라!”
아이네이아스는 청동으로 빛나는 투구를 쓰고 앞으로 나갔다. 이를 본 헤라는 포세이돈과 아테나를 불렀다. 아킬레우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신들이 그 곁에 있다는 것을 알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로이와 그리스에서 가장 용맹한 두 남자가 마주쳤다. 아이네이아스가 먼저 가슴에 방패를 두르고 청동 창을 휘둘렀다. 아킬레우스도 눈에 불을 켜고 돌진하는 사자처럼 맞섰다. 그는 소리쳤다.
"아이네이아스여, 왜 나와 싸우려는 것이지? 아, 프리아모스의 왕권을 물려받기 위해서로군! 하지만 왕에겐 아들들도 많고 아직 노쇠하지 않았으니 그런 일은 꿈도 꾸지 말게나! 자, 그냥 나와 싸울 생각은 접어두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그러나 아이네이아스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하, 내가 누구의 후손인지 아느냐? 바로 그 제우스의 자손이 나다! 나의 자랑스러운 혈통을 두고 맹세하는데, 청동 창으로 겨루기 전까진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야!"
아이네이아스의 창이 긴 그림자를 지면에 만들며 빠르게 날아간다. 아킬레우스는 이에 놀라 방패로 막아선다. 창은 신의 선물을 뚫지 못했다. 다음으로 아킬레우스 쪽에서 창이 날아간다. 창은 방패를 찢고 한참을 더 날아가 등 뒤 지면에 꽂혔다.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던 포세이돈이 황급히 달려가 그를 싸움터 바깥으로 내던지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이네이아스여, 하데스의 집으로 자네가 그렇게 빨리 들어가고 싶어 하는 줄 몰랐군. 자, 잘 듣게. 지금 아킬레우스와 싸우면 안 돼. 물러서라.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죽음의 운명을 맞는 그 순간이 오면 대열 맨 앞에 가서 싸워도 된다."
한편 헥토르 역시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을 생각하며 트로이 인들을 격려했다.
“용맹한 전사들아!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앞장 서 그를 맞설 것이다!”
그때 아폴론이 황급히 헥토르에게 나타나 말했다.
"절대 아킬레우스에게 먼저 결투를 청해서는 안된다. 그가 제 발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 사자가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킬레우스가 함성을 내지르며 트로이 병사들을 덮친 것이다. 그의 창에 오트륀테우스의 머리가 부서졌고, 안테노르이 아들 데몰레온의 이마가 찢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 전차에서 뛰어내려 도망가던 힙포다마스는 등이 찔려 비명을 지르며 유명을 달리했다.
뿐만 아니라 프리아모스가 귀하게 여기는 막내아들 폴뤼도로스 역시 아킬레우스의 창에 죽었다. 동생이 죽는 꼴을 보자 그는 더 참을 수 없었다. 창을 거세게 휘두르며 아킬레우스에게 향한다. 그런 헥토르를 알아본 아킬레우스는 달려 나와 외쳤다.
“아, 이게 누군가? 내 사랑하는 전우를 죽여 내 가슴을 찢어놓으신 분 아닌가! 자, 이제 네가 피할 길은 없다. 너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보고 싶구나. 어서 덤벼라!”
헥토르도 용기 있게 대꾸했다.
“그까짓 말로 나를 겁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나도 그대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지. 하지만, 운명은 신의 의지에 달린 것! 내 창이 그대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라!“
이내 헥토르의 창이 아킬레우스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아테나가 입김을 살짝 불었다. 창은 아킬레우스를 찌를 듯 날아가더니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헥토르의 발아래 떨어졌다. 이때 아킬레우스가 빛과 같은 속도로 헥토르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아폴론이 헥토르를 번쩍 들어 감싸버렸다. 아킬레우스의 청동 창은 세 번이나 짙은 안개만 찌를 뿐이었다.
"네놈들이라도 죽어라!"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지 못한 분풀이로 사방을 달리며 트로이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검은 대지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아킬레우스는 두 손을 피로 물들이며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헉, 헉!"
트로이의 군사들은 세차게 흐르는 청명한 크산토스 강까지 도착했다. 아킬레우스는 여유 있게 그들을 둘로 갈랐다. 일부는 도시를 향해 다시 후퇴했지만, 일부는 강물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아킬레우스는 12명을 끌어내어 손을 뒤로 묶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피의 대가로 강물에 빠뜨렸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뤼키온 역시 목이 잘리고 강물로 던져졌다. 아킬레우스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곳에 누워 있으면 물고기들이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누구도 너를 구해주지 못하겠지. 강의 신조차 말이다. 내가 없는 동안 죽은 그리스의 병사들과 가여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보상받기 전까지 나는 너희들 모두를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강의 신은 분노했다. 때마침 악시오스강의 아들 아스트로파이오스가 두 개의 긴 창을 들고 아킬레우스에게 맞섰다. 그는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 할 수 있었기에 기다란 창 두 개를 동시에 던졌다. 창 하나는 방패에 꽂혔으나, 뚫고 나가지는 못했다. 또 하나의 창은 아킬레우스의 오른쪽 팔꿈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이번에는 아킬레우스가 창을 던졌다. 그러나 창이 강둑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그는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아킬레우스가 던진 창을 뽑아 쓰려던 아스트로파이오스는 결국 죽었다. 아킬레우스는 그의 가슴을 짓밟고 갑옷과 투구를 벗겨내며 말했다.
"강의 신의 후예라고 해도 크로노스의 후손과 대적할 수는 없다. 제우스는 강의 신보다 위대하시니 말이다."
파이오니아 인들은 자기들 중 가장 용맹한 전사가 힘없이 죽은 것을 보고 달아났다. 그때였다. 강의 신은 더 참지 못하고 사람의 모습으로 아킬레우스의 앞에 나타났다.
"그만해라, 제우스가 모든 트로이 인들을 죽이도록 허락했다고 해도, 여기 깊은 강물이 아니라 들판 아니던가? 강의 흐름을 네가 죽인 병사들이 막고 있다!"
신의 고함에 아킬레우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난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들을 트로이 성벽 안에 몰아넣고, 헥토르와 대결할 것이다. 그가 나를 죽이든, 아니면 내가 그들을 죽일 때까지 말이야..."
그러자 강의 신은 이제 아폴론에게 항변한다.
"제우스의 아들, 은빛 화살의 신이시여. 제우스께서 당신에게 명하지 않던가요? 태양이 떠오를 때부터 곡식으로 풍성한 대지가 어둠에 사라질 때까지 트로이 인들 모두를 보호하라고 말입니다!"
이때 아킬레우스가 강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강은 아킬레우스에게 덤벼들었다. 병사들의 시체를 토해냈다. 세찬 물결이 아킬레우스의 어깨와 방패를 후려쳤다. 아킬레우스는 제대로 서 있기 위해 눈앞에 보인 느릅나무를 잡았다. 강이 나무를 흔들어 뿌리째 쓰러뜨렸다. 아킬레우스는 겨우 강에서 나와 달렸다. 하지만, 강은 분노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강물이 아킬레우스가 디디고 있는 땅을 계속해서 집어삼킨다. 인간은 비명을 내지르며 말했다.
"아아, 아버지 제우스여. 강의 신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신은 없습니까? 지금 나는 이렇게 강에 휩쓸려 죽을 운명이란 말입니까?"
그때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인간의 모습으로 재빨리 달려왔다. 그의 곁에 서서 말했다.
"아킬레우스, 무서워 할 필요 없다. 강의 신은 곧 물러날 거야. 넌 강의 신에게 죽을 운명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말을 잘 들어라. 트로이 병사들을 도성 안으로 다 밀어붙이기 전에는 이 전쟁에서 물러나지 마라. 하지만, 트로이의 왕자. 저 헥토르를 죽인 다음에는 곧바로 너의 함선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너의 명예를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강의 신은 자기 동생 시모에이스를 불러 함께 덤볐다. 불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헤라의 명령을 받고 크산토스 강변에 불을 보내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강의 신은 헤라에게 트로이 인들을 돕지 않을 테니 멈춰달라고 애걸했고, 그제야 강물은 다시 흘러갔다.
한편, 계속 전진했던 아킬레우스는 끊임없이 살육을 이어갔다. 프리아모스 왕이 탑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트로이 인들은 아킬레우스 앞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한 왕은 문지기들에게 외쳤다.
"트로이의 전사들이 성안에 들어올 때까지 성벽 문을 꼭 잡고 있어라. 그리고 저 망나니가 성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성문을 닫는 것을 잊지 말아라!"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자, 갈증 때문에 허덕이던 트로이의 병사들이 먼저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저기 아킬레우스가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이때 아폴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단숨에 트로이는 함락되었을 것이다. 신은 용사 아게노르에게 힘을 주었다. 그가 용기를 가지고 아킬레우스와 맞설 수 있도록 도왔다.
"아킬레우스여, 그대가 오늘 반드시 트로이를 함락시키려 하겠지만,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없구나. 트로이의 용맹한 전사들은 분명 가족들 앞에서 반드시 성을 지켜낼 테니 말이다!"
날카로운 창이 아킬레우스의 무릎 아래, 정강이를 찔렀다. 그러나, 주석으로 만들어진 정강이받이는 창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오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아킬레우스의 차례였다. 그는 아게노르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게노르가 아니었다. 아폴론이 그를 안개로 감싸 싸움터 밖으로 나온 것이다.
"서라, 겁쟁아!"
그리고 아폴론은 아게노르의 모습을 하고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났다. 그는 도망쳤다. 아킬레우스는 ‘이제 다 잡았다’ 생각하며 추격했다. 그동안 트로이 인들은 성벽에 도착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갔다. 아킬레우스의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성벽 바깥에 남아있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성으로 들어와 땀을 닦고 갈증을 달래는 동안 그리스의 병사들은 방패를 어깨에 매고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스카이아이 성문 앞에 홀연히 서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닌 운명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나, 사실 아폴론이다!"
한편 자신을 지치지도 않고 쫓아오는 아킬레우스에게 아폴론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폴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아챈 아킬레우스는 걸음을 멈추며 화를 냈다.
"왜 나를 방해한 것입니까?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미 저들이 성문에 닿기 전에 먼지 속으로 트로이 인들을 처박았을 텐데! 아, 할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복수하고 싶군요."
프리아모스 왕은 하얀 머리를 드리며 성벽 앞에 서 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간청했다.
"아들아, 그곳에 혼자 그렇게 서서 저자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아킬레우스는 너보다 강하다. 그가 너를 쓰러뜨릴지 몰라. 트로이의 남은 백성들과 나를 위해 너만은 쓰러져서는 안된다!"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간청한다.
"내 아들 헥토르야! 네 어미를 불쌍히 여겨다오. 맨 앞에서 적을 맞지 말고 성안으로 들어와야 해!"
그러나 헥토르의 굳은 결심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독기를 품고 사람을 기다리는 뱀처럼, 그는 빛나는 방패를 기대어놓고 이제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적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성벽 안으로 들어간다면 폴뤼다마스가 나를 제일 먼저 비난할 거야. 지난밤 후퇴하라고 재촉했던 그의 말을 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하지 않아 병사들을 죽였으니, 나는 저들을 볼 낯이 없다. 만약 내가 저 놈에게 먼저 가서 헬레네와 보물들을 돌려주고 트로이의 모든 재물들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면 무어라 할까? 아, 저 놈은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사자 같은 아킬레우스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헥토르는 그를 보자 떨리는 가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차라리 성문을 뒤로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는 비둘기를 낚아채려는 매처럼 그를 뒤쫓았다. 어느덧 세 바퀴 째 프리아모스의 도시를 돌고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신호를 내려 부하들에게 헥토르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끝장내는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네 바퀴째 돌았을 바로 그때 제우스의 황금 저울은 헥토르의 운명이 하데스의 집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테나가 아킬레우스에게 바짝 붙어 말했다.
"아킬레우스여, 마침내 우리의 뜻은 이루어졌다. 지칠 줄 모르고 싸우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리스 인의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다. 헥토르는 이제 더 도망칠 수 없다. 아폴론이 제우스 앞에서 헥토르를 살려달라고 말해도 이제는 소용이 없지!"
그리고 아테나는 헥토르를 따라잡았다. 데이포보스(헥토르의 동생)의 모습을 하고는 말했다.
"형님, 우리 저자를 치도록 합시다!"
헥토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온 동생이 대견했다. 마침내 헥토르와 아킬레우스가 가까워지자, 헥토르가 먼저 소리쳤다.
"아킬레우스여, 만약 제우스가 마지막까지 나를 살아남도록 허락하여 네 목숨을 빼앗을 수 있게 된다면, 너의 아름다운 갑옷만 벗겨내고 너의 시신은 그대로 동료들에게 돌려 보내마.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 말을 받아쳤다. 적과의 사이에 어떻게 신의나 약속이 있겠냐고 외쳤다. 그리고 창을 날렸다. 헥토르는 자리에 주저앉아 창을 피해야 했다. 그리고 아테나는 헥토르 뒤로 날아갔다. 창을 집어 들고 헥토르가 보지 못한 사이 아킬레우스에게 쥐여주었다.
헥토르가 다시 창을 날렸다. 방패를 정확히 맞추었지만, 퉁겨져 나왔다. 헥토르는 방패를 들고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아, 어서 더 무거운 창을 다오!"
순간 헥토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자리에 데이포보스는 없었다. 그제야 진실을 깨닫고 그는 외쳤다.
"헥토르의 시간이 다 되었다! 아테나가 나를 속였구나. 신들이 나를 죽음으로 부른다! 아, 이것이 신의 뜻인가?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겠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도 칭송할 전투를 마쳐야겠다!"
아킬레우스는 어디를 찌르면 좋을지 생각하며 헥토르를 훑었다. 그의 몸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빼앗은 갑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목만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을 본 아킬레우스는 급소에 창을 찔러넣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용맹한 전사 헥토르는 먼지 속으로 쓰러졌다. 헥토르를 내려다보며 아킬레우스는 말했다.
"헥토르여, 그대가 파트로클로스의 갑옷을 벗겼을 때, 다 끝났다고 생각했겠지. 그리스의 가장 강력한 복수자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자가 누군가? 바로 나, 아킬레우스다! 이제 너는 개들과 새들에게 물어뜯길 것이다!"
헥토르는 거의 마지막 숨을 쉬며 말했다.
"아, 제발 애원하니 나를 그렇게 두지 말게.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는 청동과 금을 받고 내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주게."
그러나, 죽음은 그를 덮쳤다. 그의 영혼은 이제 하데스의 집으로 날아갔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에서 말 없이 창을 빼내고 갑옷을 벗겨냈다. 그리스 병사들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이제야 헥토르가 좀 고분고분해졌구나. 아, 동지들아 이제 신께서 우리를 고통에 빠뜨렸던 자를 죽게 만들었다. 이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함선으로 돌아가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자기 전차에 매달았다. 그리고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았다. 아름다웠던 헥토르의 머리는 온통 먼지투성이 되어 끌려다녔다.
그 모든 광경을 보기만 해야 하는 어머니는 머리를 쥐어뜯었으며, 아버지 왕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 트로이 전체가 비탄과 연기, 화염에 휩싸인 것 같았다. 프라이모스는 말했다.
"나라도 함선으로 찾아가 애원해봐야겠소. 그에게도 아버지가 있을 테니 노인을 불쌍하게 생각해주겠지. 아, 슬픔이 나를 하데스의 집으로 끌고 갈 것 같다!"
모두가 흐느꼈다. 하지만 헥토르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하녀에게 솥에 물을 끓이라고 시켰다. 남편이 돌아오면 고단한 몸을 따스한 물에 누이고 목욕할 수 있도록 해야 했으니 말이다.
성벽에서 터지는 비탄의 소리를 그녀도 들었을 때, 그만 온 몸을 떨며 북을 베틀에서 놓치고 말았다. 미친 여자처럼 올라간 성벽에서 그녀는 헥토르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그녀의 눈을 휘감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이제 하데스의 집으로 가고 나만 남았군요. 우리 아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인데, 아버지가 죽고 없으니 어떡하지요? 당신의 명예를 위해 모두가 보는 곳에서 옷가지를 불사르는 것이 좋겠어요.”
가엾은 안드로마케의 독백으로 전투의 마지막 날 이야기는 마친다. (일리아스가 끝난 것은 아니다) 본 글 역시 이전의 내용과 함께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는 영웅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문학작품을 중국의 삼국지나, 초한지, 혹은 수호지에 비교하곤 한다. 그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는 것이리라.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저자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본 글에서 그는 또 한 번 분노한다. 앞에서 나온 분노는 그를 전장에서 싸우지 않게 만들었지만, 두 번째 분노,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인한 비탄의 감정은 그를 다시 전쟁터로 몰아세웠다. 이처럼, 일리아스는 어떤 한 남자의 성장 드라마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라. 저자가 이 서사시에서 유독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인물이 한명 있다. ‘그리스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국 트로이의 헥토르에게 더 큰 애정을 보내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리스인이야기>의 저자 앙드레 보나르는 이렇게 말한다.
'호메로스에게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비중이 약간 다르다. 아킬레우스를 이전 서사시에 있던 모습 그대로 가져온 반면, 헥토르는 굳이 자기 손으로 다시 만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헥토르는 호메로스가 선택한 인물이다.'
사실, 호메로스와 독자인 우리 사이에는 몇천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물어보고 싶어도 ‘왜 헥토르와 트로이를 그리스와 아킬레우스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묘사했습니까?’라고 물어볼 수 없다. 혹시 우리의 생각조차 틀린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작가에게 물어볼 수 없다. 그와 우리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멀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일리아스라는 작품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아킬레우스는 천성적으로 용감했다. 그는 전투를 신바람 나게 할 줄 아는 사내였다. ‘인간 중에 가장 단명할 운명’이라는 신탁이 명예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아킬레우스로 만들었다.
반면, 헥토르는 용감함을 학습한 사람이다. 죽음을 두려워했기에 누구보다 전쟁을 싫어했고, 더욱이 이 전쟁의 원흉이었던 동생 파리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훈련을 통해 용감해지는 법을 배웠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기 위해 철저히 훈련 받은 왕자였다. 그가 전쟁에 기꺼이 다시 뛰어들었던 것은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족과 그의 공동체의 안위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그의 가족과 공동체를 위하는 용기와 맹목적인 충성과 명예를 혼돈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와 맞대결을 한다. 그의 죽음은 곧 트로이의 패배와 함락을 의미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죽음과 그 의미를 알면서도 마지막 전투에 호기롭게 뛰어든 것이다.
비록 아킬레우스가 없는 동안 거둔 그의 승리가 헥토르를 오만에 빠지게 만들어 성안에서 끝까지 버티는 대신 대결에 겁 없이 응하는 선택을 했지만, 그런데도 헥토르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건네주는 포도주를 거부하고, 성에서 끝까지 버티라는 아내의 조언도 거부한다. 결연하게 전장으로 나서며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죽음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보다 강한 적에 맞서는 용기, 손해 볼 것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 어쩌면 공동체가 원하는, 조별과제의 조장 같은 존재가 헥토르 아닐까?
하지만, 모두가 헥토르로 살기에는 그의 결정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마치 '조장하실 분?'이라는 말에 선뜻 손 들고 ‘저요’ 하지 못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