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끌리는 이유
'어제 봤는데, 대단하긴 했어요'
글을 쓰는 시점으로 추석 당일이다. SNS에 들어가니 온통 그 가수 이야기다. 아, 얼마 전에 빌보드 차트 1위를 한 방탄이 아니라 훨씬 나이가 드신 젊은 오빠, ‘나훈아’ 말이다.
그가 어제(9월 31일) 15년 만에 방송사를 통해 공연을 했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2시간 40분 동안 28곡의 노래를 열창하며 ‘코시국’에 힘든 국민들을 위로한 그의 콘서트는 40%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노래가 가진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분들, 그 시대 감성을 나는 잘 모르지만, 이제는 명곡만 남겨두고 떠난 김광석님이나, 김현식님을 좋아한다. (물론, 현재를 노래하는 아티스트들도 여럿 존경하고, 사랑한다)
어느 포털싸이트에 올라간 질문, ‘도대체 왜 이 사람의 노래가 지금까지도 사랑 받습니까?’라는 물음에 ‘내 마음을 읽습니다’라는 대답만큼 분명한 답변이 또 있을까? 나훈아님의 인기를 잘 살펴보면 아마 이런 점도 한몫 할 것이다.
'그치, 무슨 느낌인지 알지.'
노래 잘하는 사람만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가을밤 한강 둔치에 치킨 한 마리 시켜놓고 밤새 노닥거렸던 그 밤에 ‘함께’ 없었던 사람이라도, 그런 경험을 해봤다면.
수능 시험을 막 마치고 내리는 눈발 너머 손 흔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그 감정을 느껴 봤다면, ‘충성’ 전역신고를 하고 후임들의 경례를 뒤로 하고 위병소를 나와봤다면 .
굳이 지금 ‘내 얘기’를 장황하게 떠나는 사람의 그때 그곳에 없었어도 “아, 나 알아!” 친구의 등짝을 때리며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러면 이제 ‘니 얘기’는 ‘내 얘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 또 ‘니 얘기, 내 얘기!’를 외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누구는 사놓고 책장 깊이 꽂아놓은 다음 먼지가 쌓이든 말든 조용히 덮어 놓은 책이고, 또 다른 사람은 이름도 모르는 그런 책이다.
그래, 본 글은 '니 얘기, 내 얘기'라며 깜짝 놀랄 당신과 나의 이야기.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전 일리아스의 마지막 내용에 대한 이야기다.
트로이 성의 백성들이 슬픔에 빠져있던 그 순간 그리스 인들은 함선으로 돌아갔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병사들을 불렀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시신 주위를 돌았다. 통한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테티스도 그들과 함께 슬퍼했다. 아킬레우스는 수많은 트로이 인들은 죽인 그 손을 친구의 가슴에 얹었다.
"파트로클로스, 잘 가게! 내가 자네에게 한 약속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보이는가?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왔네. 나는 이것을 개떼들에게 던져 줄 거야. 그리고 트로이의 젊은이 12명을 그대가 화장될 때 함께 바칠 거라네."
밤이 되자 파도로 넘실대는 해안가에 누워 아킬레우스는 슬퍼했다. 친구를 잃은 설움이 다시 밀물처럼 그의 가슴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헥토르를 쫓느라 고생했던 그에게 졸음이 찾아왔다. 파트로클로스의 혼백이 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벌써 나를 잊었는가? 나를 화장해주게. 하데스의 집으로 나는 가야만 해. 이제 죽음의 운명이 나를 삼켰으니 그대와 함께 뭔가를 의논할 수 없지만, 부탁 하나만 하겠네. 그대 역시 트로이의 성벽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겠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온 자네의 뼈와 내 것을 따로 떼어 묻지 말아주게. 우리 두 사람의 뼈가 같은 항아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어머니에게 부탁해주게."
아킬레우스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친구를 한 번이라도 안고자 팔을 벌렸다. 하지만, 친구는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아킬레우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했다.
"아아, 나는 왜 몰랐는가?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이 울며 내 곁에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본 사람들은 가슴이 아파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들이 시신 주위에서 애도할 때 새로운 날의 새벽이 튼다.
"우리의 동료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해야 한다. 가서 나무를 해오도록 하라."
아가멤논은 병사들이 나무를 해올 수 있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이다 산에서 잎이 무성한 참나무를 베어서 노새에 싣고 바닷가로 돌아왔다.
이제 전차들이 움직이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동료들이 파트로클로스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아킬레우스의 지시에 따라 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시신을 내리고 적당한 높이로 나무를 쌓았다.
아킬레우스는 화장 제단에서 뒤로 잠시 물러나더니 자신의 흐르는 듯한 금발을 잘라냈다. 그리고 그것을 친구의 손에 얹었다. 병사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무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렸다. 희생제물도 함께 올린 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다. 아킬레우스는 말했다.
"친구여, 잘 가게. 여기 트로이의 고귀한 남자 12명도 그대와 함께 태워버릴 것이네. 그러나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는 불에 태우지 않을걸세. 사나운 개 떼들이 물어 뜯게 할 것이라네."
그러나, 헥토르는 개의 먹이가 되지 않았다. 아프로디테가 아침부터 밤까지 그를 지켰다. 게다가 신성한 장미 기름으로 그의 몸을 덮었기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그를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녀도 전혀 상처 입지 않았다. 또한 아폴론은 하늘에서 땅까지 검은 구름으로 감쌌기 때문에 시신이 전혀 시든 장미처럼 변하지 않았다.
"아니, 왜 타오르지 않는 거지?"
파트로클로스의 제단이 타오르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북풍과 서풍의 신에게 기도했다. 제물을 바칠 것이니 어서 나무가 타오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사나운 바람이 바다를 헤치고 화장 제단을 덮쳤다.
밤새도록 제단이 불타고 대낮처럼 환했다. 아킬레우스는 밤새 황금 항아리에서 포도주를 퍼내 땅에 부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을 이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다. 그는 한숨도 자지 않고 제단 주위를 돌며 눈물을 흘렸다.
새벽의 여신이 바다를 가로질러 오자 불길은 사그라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던 아킬레우스는 와낙스와 함께 다가오는 그리스 장수들의 소리에 깨어났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의 뼈를 잘 추려냈다. 뼈를 두겹으로 싼 뒤에 다른 병사들에게 ‘내가 하데스의 곁으로 갈 때까지 잘 보관하라’고 말했다.
아킬레우스는 장례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병사들을 불렀다. 자기 함선에서 세발솥, 맡과 노새, 육중한 머리의 황소를 가져왔다. 아름다운 여인들도 함께 데려왔는데, 이 모든 것이 장례 경기를 위한 상품들이었다.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그리스의 용맹한 전사들아, 이제 경기를 시작하라. 여기 상품들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 기꺼이 경기에 참여하라!"
빠른 전차 경주자들이 모였다. 출발점을 정하고 대열을 갖추자 아킬레우스가 저 멀리 수평선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거기 포이닉스가 점수를 매기게 했다. 전차경기의 주자들이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쳤다. 말들은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각자 승리를 바라며 자기 말들을 몰았다.
반환점을 통과하여 마지막 부분을 달리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에우멜로스였다. 그 뒤를 메데스의 말들이 바짝 따라갔다. 디오메데스는 금방이라도 에우멜로스를 제칠 것 같았다.
그러나, 디오메데스는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그에게 분노한 아폴론이 채찍을 내리쳐 손에서 떨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디오메데스는 에우멜로스가 멀어지는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때 아테나가 다시 채찍을 디오메데스에게 돌려주며 어깨를 토닥였다.
에우멜로스에게 날아간 여신은 말들이 트랙을 벗어나게 했다. 결국 에우멜로스는 땅에 떨어져 상처를 입었고, 디오메데스는 가장 앞에서 달리게 되었다. 그 뒤는 메넬라오스가 바짝 쫓았으며, 다음으로는 안틸로코스였다.
결국 채찍질을 멈추지 않은 디오메데스가 가장 먼저 들어와 아름다운 여인과 세발솥을 상으로 받았다. 뒤를 이어 안틸로코스가 도착했고, 멀리 뒤처졌던 메넬라오스는 세 번째로 도착했다. 마지막에 에우멜로스가 포기하지 않고 들어오자 아킬레우스는 그의 모습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습이 장하구려. 그대에게 2등 상을 주겠소."
"무슨 소리요, 디오메데스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이 안틸로코스란 말이오!"
"좋소, 에우멜로스에게는 다른 상을 주도록 하지."
아킬레우스는 모두에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상을 내놓고 권투와 격투기, 달리기와 창던지기 시합을 열어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함께 애도했다.
경기가 모두 끝나고 병사들은 모두 각자의 함선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단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만큼은 친구에 대한 기억으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용감하고 친절했던 파트로클로스가 생각나 바닷가로 걸어 나와 걷기 시작했다. 결국 또 다시 헥토르를 전차 뒤에 매달로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세 번 돌고 나서야 막사에 들어가 쉬었다.
"신들이여,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헥토르가 우리에게 바친 그 제물들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죽이더니 전차에 매달고 친구의 무덤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저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저 분노를 마구 터뜨릴 뿐입니다."
헥토르의 시신이 끌려다닌 지 열이틀째가 되자 아폴론이 분노하며 말했다. 일전에 프리아모스의 아들을 가련하게 생각한 신들은 헤르메스에게 시신을 훔쳐 오라고 했지만, 헤라와 포세이돈 그리고 아테나가 반대하고 물고 늘어진 탓에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이다.
그러자 제우스는 차라리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의 선물을 받고 헥토르를 돌려보내도록 테티스에게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 제우스의 호출을 받고 눈부신 바다의 요정이 올림포스로 왔다.
"테티스여, 올림포스까지 왔구나. 자, 지금 헥토르가 죽고 아킬레우스는 그를 전차에 매달아 다니고 있다. 이 일 때문에 우리는 9일 동안이나 싸웠지. 자, 그대는 아들에게 달려가 신들이 지금 화가 났으니 헥토르의 시신을 함선 옆에 붙들어 두지 말고 돌려주라고 전해라."
테티스는 바로 올림포스에서 뛰어내려 아들을 만나러 갔다. 동료들은 아침을 준비하느라 바쁜데 홀로 슬퍼하는 아들을 보았다. 그녀는 아들을 부르며 말했다.
"아들아. 네가 얼마나 더 눈물과 아픔으로 괴로워할 것이냐? 지금 강력한 운명과 죽음이 너에게 다가오고 있구나. 잘 들으렴, 신들이 지금 헥토르의 시신을 잡아두고 있는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단다. 제우스께서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몸값을 가지고 아킬레우스에게 가라고 명령할 것이니, 넌 헥토르의 시선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단다."
“제우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몸값을 가져오면 시신을 돌려주겠어요.”
제우스는 여신 이리스를 통해 트로이에도 소식을 전했다. 늙은 왕에게 찾아간 여신은 말했다.
"나는 제우스의 사자입니다. 올림포스의 주인께서는 당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아킬레우스가 좋아할 선물을 가지고 가서 고귀한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늙은 전령 한 사람만 데려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헤르메스가 당신을 아킬레우스에게로 인도할 것입니다."
프리아모스는 당장 나가고 싶었다. ‘선물을 준비하라’고 말하려는데 아내 헤카베와 자식들 모두는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고귀한 프리아모스는 말했다.
"나는 갈 것이다. 누구도 내 마음을 바꾸지 못해. 내 운명이 부리처럼 흰 그리스 인의 함선에서 죽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안아 볼 수만 있다면, 그래도 좋다!"
보물 궤짝의 뚜껑을 연 왕은 온통 값비싼 옷과 황금들을 주저 없이 꺼낸다. 세발솥과 가마솥, 그리고 술잔도 준비했다. 노인은 서둘러 마차를 도성 밖으로 몰았다. 따라나선 이들이 어쩔 수 없이 돌아가고 혼자가 되자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불렀다.
"내 아들, 헤르메스야, 가서 프리아모스를 그리스 인들의 함선까지 인도해주거라.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럴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헤르메스는 황금 샌들을 급히 신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감겨 잠들게 했다.
"왕이여, 나는 헤르메스입니다. 나와 함께 가시지요."
“자, 이제 나는 이만 돌아갑니다. 저 아킬레우스가 나를 알아본다면 불 같이 화를 낼 것이 뻔하거든요. 그럼, 왕이여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길.”
헤르메스는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하자 안개처럼 사라졌다. 프리아모스는 무릎에 힘을 주고 아킬레우스의 처소로 향했다. 늙은 왕은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가 그의 무릎을 잡고, 자기 땅의 남자들을 수없이 학살한 그 손에 입을 맞추었다. 아킬레우스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존엄한 아킬레우스여, 그대 손에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데려가기 위해 내가 직접 왔소. 어마어마한 배상금과 함께 말이지. 자,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해보시오.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겠소? 나는 지금 자기 아들을 죽인 남자의 손에 입술을 맞추고 있소이다."
그러자 잔혹한 아킬레우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프리아모스 역시 헥토르를 생각하며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쓰러져 한없이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던 아킬레우스는 노인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아아, 불쌍한 분이여. 당신의 전사들과 아들들을 죽인 자 앞에 혼자서 오시다니, 그대는 정말 강철 심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슬퍼한다 한들 당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오진 않습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는 자기 아들을 보기 전까진 앉을 수 없다며 자기가 가져온 보물들을 어서 받아 달라고 다시 간청했다. 아킬레우스는 험한 눈초리로 노인을 쏘아봤다. 제우스의 명을 이미 받았으니 재촉하지 말하는 것이었다.
이내 아킬레우스는 사자같이 막사를 뛰쳐나가 자기 부하들에게 몸값으로 가져온 보물들을 끌어내리게 했다. 하녀들에게는 시신을 잘 씻고 기름을 발라 싸매어 두라고 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자기 팔로 들어 올려 들것에 눕혔다. 동료들과 함께 짐수레 위에 실었다. 다시 막사로 돌아온 아킬레우스는 노인에게 날이 밝으면 아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두었다고 말했다. 저녁이나 함께 하자며 숫양 한 마리를 잡아 왔다.
프리아모스는 그런 아킬레우스를 바라보며 남자다운 아름다움에 마치 신과 마주한듯한 감동을 하였다. 아킬레우스는 노인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침상을 마련하도록 하고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데는 며칠이나 필요할지를 물었다. 프리아모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백성들은 지금 도성 안에 몰려 있소. 나무를 하기 위해 나가야 하는데 모두 두려워하고 있지. 우리는 아흐레 동안 궁 안에서 헥토르를 위해 애도하려고 하오. 열흘째 되는 날 그를 묻고, 그다음 날 시신을 덮을 무덤을 높게 쌓으려고 하오. 그리고..."
노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다음 날부터 전쟁을 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래야만 한다면 말이지."
아킬레우스는 노인의 손을 잡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프리아모스와 그의 시종의 잠자리는 막사 입구 가까운 곳에 준비되었다. 아킬레우스는 막사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잠자리에 누웠다.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브리세이스가 있었다.
인간들, 그리고 신들조차 잠들었는데, 헤르메스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프리아모스를 함선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코까지 골며 자는 노인의 머리맡에서 고요하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노인이여, 아킬레우스가 그대를 살려두었다고 해서 당신을 죽이려는 남자들 속에서 잠을 자는 겁니까? 아가멤논과 다른 그리스 병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몸값을 세배나 더 가져와야 할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죠."
그러자 노인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시종을 깨우고 헥토르를 노새 위에 실었다. 헤르메스는 두 사람을 이끌고 최대한 빨리 막사를 나왔다. 크산토스 강이 보이자 헤르메스는 다시 올림포스로 돌아갔다.
트로이로 들어오는 프리아모스와 시종을 처음엔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지만 조금씩 태양이 떠오르자 자기 왕을 알아본 백성들은 성문으로 몰려갔다.
사람들은 모두 헥토르의 시신을 감싸고 통곡했다. 시신을 궁전 안으로 인도하고 커다란 대리석 침대에 눕혔다. 안드로마케가 헥토르의 머리를 붙잡고 통곡하며 노래를 불렀다.
"아, 삶을 끝내기에 아직 젊은 당신이 나를 과부로 남겨두고 이렇게 가시다니. 아내들과 힘없는 아이들, 트로이를 지키던 당신이 이제 죽었으니 이 도시는 머지않아 주저앉고 우리는 그리스 인들의 함선으로 끌려가겠지요."
그녀가 울자 모든 여인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 이제는 헤카베가 슬픔의 찬가를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아,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들. 살아 있는 동안 신의 사랑을 받더니, 죽어서도 신들이 너를 보호하셨구나. 여기 누워 있는 너는 아직 아침 이슬처럼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헬레네가 소리 내어 울었다.
"헥토르, 내 남편의 형제들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이시여! 내가 파리스를 따라 여기 온 지 20년이군요.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은 내게 어떤 모욕이나 비난을 하지 않으셨지요. 이제 이 넓은 트로이에서 나를 친절히 대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든 백성들이 슬퍼하는 동안 프리아모스는 헥토르를 장사 지낼 나무를 해오라고 말했다. 9일 동안 나무를 베어오고, 그다음 날 새벽이 열리자 트로이의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헥토르의 시신을 밖으로 옮겼다. 제단에 시신을 올리고 불을 붙였다.
이윽고 장밋빛 새벽이 열리자 사람들은 제단 주위로 모였다. 먼저 그들은 와인을 부어 불기를 완전히 없앴다. 그리고 동료들과 형제들 모두 함께 헥토르의 흰 뼈를 주워 모았다. 모두의 뺨에는 빛나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뼈를 잘 모아 보랏빛 천으로 감싸고 또 감쌌다. 항아리에 그것을 넣은 다음 커다란 구덩이에 넣었다. 그 위에 거대한 돌 조각을 높이 쌓아 올리고서는 흙을 덮어 무덤을 만들고 트로이로 돌아갔다. 트로이 인들은 이렇게 말을 잘 길들이는 헥토르를 땅에 묻었다.
이상의 이야기가 일리아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당신에게 익숙한 ‘파리스의 선택’처럼 ‘트로이의 목마‘에 대한 장면은 여기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에서 영웅들 모두는 결국 죽었다는 사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접적으로 그 묘사가 등장하는 헥토르의 죽음은 물론, 아킬레우스 역시 결국 파리스의 화살에 발목을 맞아 죽고 만다. 일리아스의 이야기는 영웅들이 불사의 영약을 구했다거나, 혹은 신들의 반열에 누군가 올랐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이 늘 고전문학의 선봉을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일리아스는 하늘의 신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오히려 땅의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들은 때론 장기 말처럼 묘사된다. 신들의 계획 아래 그들의 손가락을 통해 좌지우지되는 그들의 운명은 어딘가 슬프다. 하지만, 조금만 더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필멸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들은 오히려 올림포스의 신들보다 위대하다. 쉽게 분노하고, 눈물을 자주 터뜨리며,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것이 인간이지만, 여기 나오는 수많은 영웅들은, 아니 심지어 이름이 묘사되지 않은 일개 병졸까지도 그들의 운명을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들은 하나 같이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느끼며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오래된 서사시는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왕중왕 아가멤논에게 수치를 당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빼앗긴, 그래서 누구보다 분노의 감정을 잘 표출한 아킬레우스는 어쩌면 그때 소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그랬던 그가 또 한 번 분노한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었다.
이 비탄의 사건을 통해 소년은 조금 성장한다. ‘나’만 알고, ‘나’를 위해서만 살아가던 아킬레우스는 이제 ‘너’를 위해 분노한다. 가장 사랑했던 ‘너’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앞에 ‘나’만을 생각하고 표출했던 분노는 사그라든다. 나를 넘어 너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을 때, 끝까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불화는 해결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응어리는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며칠 동안 전차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녔음에도 그의 분노는 계속해서 타올랐다. 그때 그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미 죽은 아들 헥토르를 되찾기 위해 직접 찾아와 자기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을 맞추면서까지 애걸하는 늙은 왕을 만난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병, 또는 아픔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김’이라는 말을 가진 사자성어다. 어쩌면 아킬레우스가 분노를 그렇게 삭히지 못했던 이유는 같은 아픔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그것으로 늙은 왕과 젊은 영웅은 서로 손을 맞잡고 눈물을 터뜨렸으니 말이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를 맞아 접대하고 위로한다. 어쩌면 너무나 쉽게 아들을 돌려준다. ‘조금 전까지 전차 끌고 다니면서 분노하던 그 아킬레우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고분고분하다. 그도 다 알고 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조금 전까지 살을 하나하나 저며 씹고 싶었던 원수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장례를 위해 며칠간의 말미를 주는 관용까지 보인다. 여긴 전쟁터였는데 말이다. 그렇다. 바로 이때, 늙은 왕과 부둥켜 안고 통곡했을 때 어쩌면 아킬레우스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는지도, 아니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진짜 사람이 된 아킬레우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곤히 자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이 일리아스에서 나오는 그의 마지막이다. 전쟁터에서, 아니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죽음의 운명은 아킬레우스를 언제든 덮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죽을 운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요하다면 다시 싸울 것을 준비했을 터다.
그가 사랑했던 파트로클로스는 이제 그의 곁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식음을 전폐하거나 과거의 분노를 긁어모아 분출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향해 묵묵히 걸어간다.
신탁이 전한 것처럼,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얻었다. 현대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한 일리아스를 아직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많은 적을 쓰러뜨려서가 아닐 것이다. 아킬레우스, 그는 불멸의 신이 아니었다.
필멸의 인간, 분노하는 인간, 그러나 마침내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인, 그래서 결국 적을 관용했기에 우리는 그를 명예로운 인간, 인간적인 인간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에 이 긴 서사시를 여전히 읽으며 ‘니 얘기 내 얘기’를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