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개구리
"골고루 좀 먹어라."
어린 시절 반찬 투정이 참 심했었다. 특히 김치를 안 먹었다. 집에서는 식사 시간 때마다 ‘누가 보면 한국 사람 아닌 줄 알겠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다.
처음 급식 교육을 받았던 급식실에서는 도저히 먹기 싫은 깍두기 때문에 혼자 남아 영양사 선생님과 기싸움을 했다.
친구들 보기에도 내 반찬 투정이 좋지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음식 남기면 나중에 지옥 갔을 때 악마가 다 비벼준대."
반장은 ‘지옥에 가서 악마가 비벼주는 음식을 먹기 싫으면 골고루 먹으라’며 핀잔을 주더라. ‘지옥 안 가면 그만이지’ 말하며 교실 밖을 나갔다.
"야, 감사한 줄 알아. 아프리카 애들은 이것도 못 먹어서 쫄쫄 굶는다고."
차라리 ‘지옥 협박’에 비하면 훨씬 좋은 말인 줄 알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최악이다.
아무리 바른 식습관 교육이 중요해도 그렇지, 남의 불행을 가지고 ‘너는 그나마 나은 거야’ 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에 낙관하거나, 스스로 자신감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굳이 남의 불행이나 결핍을 나를 긍정하는데 소비해야 하는 걸까?
"아휴, 나는 참 한심해."
토끼 한 마리가 토굴 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다. 몇 번이고 즐거운 상상을 해보려고 하지만, 허사였다.
매번 굴 밖을 나갈 때마다 땅에서는 오소리며, 여우가 쫓아오는 걸 피해 헐레벌떡 뛰어야 했다.
‘저 하늘 어딘가에서 벼락같이 독수리나 솔개가 내려와 자신을 채 가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파란 하늘을 새빨간 눈으로 걱정스럽게 살펴야 했다.
“지겹다, 지겨워.”
지금처럼 걱정만 하며 사는 것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토굴 속에서 걱정만 쌓여갔다.
‘꼬르륵’
눈치 없는 배꼽시계가 오늘따라 더 크게 울린다. 가끔 ‘나 같은 게 무슨 음식이람, 쫄쫄 굶다가 죽어버려야지’ 생각했지만, 이렇게 배가 큰 소리로 투정하는 날에는 컴컴한 굴속에서 나오는 수 밖엔 없었다.
연한 풀이 있는 연못가가 생각났다. 그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가자 놀란 개구리들이 물가에 앉아 있다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어라, 이것 봐라?”
토끼는 묘한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뛰어오는 토끼의 발소리에 깜짝 놀라 물속으로 들어간 개구리들의 표정이 퍽 웃겼던 것이다.
"날 보고 개구리들이 놀라네? 어쩌면 나도 대단한 존재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자 가슴속에 끼어 있던 찌꺼기 같은 걱정과 불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씻겨 없어졌다.
토끼는 상쾌한 마음으로 양껏 풀을 뜯더니 콧노래를 부르며 자기 굴로 돌아갔다.
- 라퐁텐 우화 중 ‘토끼와 개구리’ -
우화 속 토끼처럼 자신보다 열등하거나, 더욱 불안감을 느끼는 누군가를 통해 우월감이나, 긍정을 누리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일본 개화기 시절, 신분제 철폐를 반대하는 것은 귀족 계층이 아니라 평민이었다고 한다.
‘신분제가 없어지면 자기들 밑에 천민들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심하게 반발했다고.
남의 불행이나 좋지 못한 처지를 밟고 올라설 디딤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처 받고 피 흘리는 타인을 통해 희열을 느낀다든지 하는 일은 동물의 세계 속 이야기면 충분하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타인의 불행이나 불안에 손 내밀지 못하더라도 공감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문명의 시작은 무엇입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인류학자 Margaret Mead는 이렇게 답했다지.
"문명의 시작은 ‘부러졌다가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입니다. 만약 당신이 동물의 왕국의 주민인데, 다리가 부러졌다면 당신은 그저 다른 짐승들을 위한 고깃덩이에 불과합니다. 동물은 부러진 다리로 살아남을 수 없죠. 하지만, 부러졌다 붙은 흔적이 있는 다리뼈는 누군가가 그를 기다려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누군가를 돕는 것이 문명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