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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지언 Oct 26. 2015

천경자의 눈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사건을 뒷받침할 증거

  여인, 꽃, 뱀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키워드를 들으면 한국 화단에서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연상되는 화가가 있다. 바로 천경자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천경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앞의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마치 천경자의 그림에 중요한 요소가 위의 세 가지가 전부인양 이야기되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위의 세 가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 자신 역시 많은 인터뷰와 여러 매체에서 위의 세 가지 소재가 본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였으며, 저 세 가지의 소재로 그려진 그림들이 천경자의 작품들 중에서 매우 큰 인기를 끌고 있고 미술시장에 있어서도 상당히 고가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천경자의 회화에 있어서 위의 세 가지 소재 말고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눈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천경자의 인물화에 나타나는 눈의 모양은 일반적인 초상화, 혹은 실제 일상의 사람의 눈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1977년작,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예술작품에서 눈동자의 표현이 주는 효과는 대단하다. 눈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 화룡점정 등의 말들은 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말이다.

  사람은 무언가에 관심이 있을 때 교감신경이 흥분하고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진되면서 동공이 커진다. 기절하면 동공의 운동성은 중지되어 동공이 축소된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동공의 왜곡이 크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홍채와 동공은 신경이 뇌와 척추에 연결되어 있어 몸의 정신적, 신체적 상태를 반영한다. 밝은 곳에서 동공이 축소되고, 어두운 곳에서는 동공이 확대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으며, 놀랐을 때도 동공의 크기가 변화하게 된다. 의식을 잃었을 때는 동공의 반응이 정지되는데 이는 곧 홍채신경의 반응이 정지된다는 말과 같다. 또한 질병에 의해 뇌의 신경신호가 홍채에 전달되면 동공의 왜곡이 훨씬 심해질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천경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눈의 표현은 이채롭다. 천경자의 인물의 눈은 하얀색의 동공과 매우 커다란 홍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확대된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려진 대상이 매우 흥분되어있다거나, 어딘가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홍채가 모두 드러날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감정의 격앙이 매우 극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동공이 확대된 채로 멈춰있는 상태의 모습이 인간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가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사망 시이다. 사람이 죽을 때 근육의 이완으로 인해 동공과 항문의 괄약근이 모두 풀려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은 풀려버린 동공의 모습으로 감정의 격앙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선 대상자의 죽음마저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확대된 홍채와 동공은 대상자의 사망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천경자의 그림에 있어서 이렇게 확대된 동공은 그림 속의 모델을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함은 18세기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주는 느낌과도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인물화의 피부색은 시체의 느낌을 주고 있다. 홍조를 띠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색이 아닌,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과도 닮아있는 회색빛의 피부색은 그림 속의 인물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미 죽은 인물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이다.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이 되는 표현이 이루어진 이 인물화에서 더욱 그로테스크함을 부가시켜주는 것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뜬 눈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죽은 사람은 눈을 감겨주는 것이 예의인데, 천경자의 그림에선 죽은 사람의 알레고리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눈을 매우 크게 부릅뜨고 있다. 이것이 더욱 그로테스크를 부가시킨다. 게다가 시체처럼 표현된 인물화가 크게 뜬 눈이 대상자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로테스크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에 있어서 서로 눈을 직시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 중 하나이다. 면식도 없는 마치 시체같은 사람이 관람자를 강렬하게 직시하고 있으면 관람자는 이를 통해 상당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눈의 표현이 달라지면 천경자의 그림이 주는 느낌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1982년작 <두상>을 원본과 대조하여, 각각 <검은 동공>, <하얗지만 테두리가 없는 동공>, <홍채와 동공 전체가 검게 표현된 눈>으로 보면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동공을 검게 칠하는 것만으로도 천경자의 인물화가 주는 느낌은 달라진다. 앞에서 말한 그로테스크한 느낌, 혹은 기괴하거나 불편한 느낌을 주는 시선이 눈동자의 표현만으로도 크게 달라진다. 완전히 검게 칠해진 눈에 있어서는 천경자의 그림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마저 사라진다. 이렇듯 천경자의 회화에 있어 눈이 주는 느낌에 따라 회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마저 달라지는 것을 보아, 눈의 표현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82년작, 두상(원본)


  천경자의 단독 여성 상반신 클로즈업이라는 구도를 가지고 있는 그림들 중에서 다른 작품들과의 시기적 차이를 보이는 작품은 1973년작 <길례언니>이다. 이 작품의 경우 천경자 여성인물화의 특징처럼 나타나는 홍채와 동공의 표현이 아직 잘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길례언니>의 경우 매우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표현을 하고 있다. 다만 눈의 기본적인 형태와 하얗게 칠해진 동공을 보면, 이것이 이후에 나타날 천경자식(式) 눈의 표현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3년작, 길례언니


  1977년작의 여성인물들을 보면 <길례언니>의 눈 표현과 아직 많이 닮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공을 하얗게 놓아두는 것의 표현이 전체적인 눈의 표현에 있어서 조금 더 커졌고, 또 1977년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서는 노란색 홍채표현을 하면서 그려진 인물이 동양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동공을 하얗게 두면서 검은 동그라미를 치는 형태가 보이기 시작한다.


  1981년작들은 1977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데 한 가지 특징이 추가된다. 윗 눈의 아이라인 위에 마치 명암과 같이 톤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시기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81년에 갑자기 나타나는 형태이다. 그리고 1981년의 <장미와 여인>은 81년과 82년을 넘어가는 시기의 천경자의 눈 표현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전까지의 그림들의 경우 대개 인물화의 시각이 약간 위를 쳐다보는 느낌을 주다가 <장미와 여인>부터는 정면(관람자)을 강하게 응시하는 느낌을 주게 되는데, 이는 홍채의 표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이전까지는 홍채의 윗부분이 상당히 많이 눈꺼풀에 가려져 있었으나, <장미와 여인>부터는 홍채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82년작들은 천경자의 눈의 표현에 있어 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홍채는 거의 원형에 가깝게 그려져서 그림 속의 인물은 굉장히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동공은 하얗게 그려져 있으며, 홍채와 동공의 맞닿은 부분은 검은색 테두리로 진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눈을 ‘천경자의 눈’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눈의 표현이 독특해지고,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고 모든 시기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형태적인 특징 역시 존재하고 있다. 양 눈의 눈꼬리가 그러하다. 살펴보면, 왼쪽 눈꼬리는 약간 처져있으며 오른쪽 눈꼬리는 약간 세워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특징만큼은 <길례언니>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는 형태적인 특성이며, 이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 아닌 스스로의 버릇 내지는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습관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은 훈련을 하지 않는 이상, 완벽한 원이나 완전히 대칭되는 그림을 손으로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러한 좌우 비대칭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눈의 모양의 양식적 흐름을 통해 본다면 1977년의 미인도 사건은 위작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작가가 위작이라고 말하였지만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연로함을 연유로 진작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려 결국엔 천경자의 절필 선언까지 이끌어 낸 이 사건은 한국 미술계의 위작 사건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

위작 사건의 대상이 된 미인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천경자의 눈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왼쪽 눈꼬리는 처지게, 오른쪽 눈꼬리는 치켜 올라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77년 위작그림에서는 둘 다 치켜 올라갔다. 이는 1977년의 양식뿐만 아니라 천경자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양식에 위배되는 모양이다. 또한 1977년의 위작에는 눈에 아이라인이 있다. 이는 1977년 양식이 아니며, 1981년 이후의 양식이다. 눈의 표현양식과 더불어 광대뼈를 도드라지게 그리는 것 역시 본문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1981년 이후에나 나타나는 표현양식이다. 이러한 양식 외에도 콧방울의 그림자 표현처리, 천경자의 화풍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단순한 두발처리 등도 이것이 진작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들 중 하나이다.


  따라서 위작 제작자는 1981년 이후의 천경자의 작품을 보고 위작을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작품이 존재한다. 작가의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지만 천경자의 작품 중 유일하게 양쪽 눈꼬리가 올라간 그림이 있는데, 바로 본문에서도 보았던 1981년작 <장미와 여인>이다. 이 작품과 77년작을 비교해보면 확연해진다. 구도와 얼굴 형태, 그리고 천경자의 화풍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웃는 모습까지 닮아있다. 당시 감정에 있어서 어떠한 기준점을 가지고 감정하였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작품세계에 있어 횡적인 양식 측면을 조금만  연구해봐도 이 작품은 위작이라는 것이 쉽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경자 화백은 2003년 뇌일혈을 일으켜 미국 뉴욕에서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지난 2015년 8월에 명을 달리하였다. 작가로서의 명예를 노환으로 실추시켜버린 이 위작사건이 작가의 병의 근원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천경자 화백의 명복을 빌며, 또 그녀에 대한 더욱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위작사건의 재조명과 작가로서의 천경자의 재조명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얼마 전 천경자 화백님의 부고 소식을 접하였기에 이번 글은 애도의 의미를 담아 매거진의 다른 글들과 다르게 이모티콘과 존칭어를 생략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의 깊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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