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 '나'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에 새로 눈뜬 그녀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원제: I Am Love (Io sono l'amore), 2009
카를로 미라벨라 데이비스 감독, 원제: Swallow, 2019
CGV의 CAV 기획전으로 <스왈로우 Swallow>를 보았다. 공포, 스릴러 장르 중심의 이번 기획전에서 눈에 띄는 영화였는데, 이런 장르라기에는 다소 슬픈 감상을 주는 영화였다.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여 자신보다는 가정과 남편에 헌신한 여자 '헌터'. 하지만 이러한 삶에 공허함을 느끼는 와중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뜨게 되는 스토리는 비슷한 운명을 가진 영화 속 등장인물을 떠올리게 했는데, 바로 우리에게 <콜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으로 익숙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아이 엠 러브 I Am Love>의 '엠마'이다.
엠마는 본래 러시아인이지만 상류층 재벌가의 남편을 만나 그를 따라 자신의 고향을 떠나 밀라노의 큰 저택에 머물며 아이 셋을 키워낸다. 중반부에는 엠마라는 이름 역시도 본래 이름이 아니며, 이탈리아로 떠나올 때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심지어는 자신의 본래 이름 또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을 자랑스러워 하는 엠마이지만, 자식들이 하나 둘 각자의 길을 위해 떠나고 남편까지 가업을 잇기 위해 회사일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로써 혼자 집에 남겨진 엠마는 자신의 삶에 자신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허함을 느낀다.
하지만 유학을 떠난 엠마의 딸 베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큰오빠 에두에게 자신의 성지향성을 알린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엠마는 자신 안에 새로이 감지되는 무언의 감정을 느낀다. 물론 자신의 고향을 떠나 이름까지 지워져 정체성을 잃은 상태의 엠마는 이때까지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에두의 절친한 친구이자 레스토랑 개업을 함께 계획하고 있는 사업파트너이기도 한 안토니오의 음식을 맛보게 되면서 그녀가 느낀 감정을 서서히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 감정의 이름은 새로운 욕망을 향한 이끌림이자, 이제까지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다. 이어지는 안토니오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엠마는 기꺼이 욕망의 한가운데로 뛰어들며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바로 자신만의 삶을 찾아간다. 그녀가 안토니오와 처음 관계를 맺은 후 화장실로 들어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드디어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실마리를 발견한 데서 오는 생생한 기쁨을 드러낸다.
헌터는 이름까지는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엠마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 역시 가업을 잇는 이로, 시부모가 마련해 준 넓은 집에서 자신의 일상을 오로지 남편에게 맞춘 채 살아간다. 이윽고 헌터는 임신을 하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이 기뻐하자 그제서야 함께 웃는 그녀의 모습은 이러한 삶을 방증한다. 이렇게 아이까지 갖게 된 헌터는 누구보다 갖춰진 생활이 앞에 놓여있지만, 출근을 앞두고 헌터가 다림질한 넥타이가 망가졌다며 눈치를 주는 남편과 가족 모임에서 헌터의 말은 자르고 그녀가 모르는 화제인 사업 얘기를 꺼내는 시아버지, 그리고 헌터를 위하는 듯 하지만 그녀의 그대로를 봐주기보다는 "아들이 머리 긴 여잘 좋아해. 그러니 머리를 길러 봐"라고 말하는 시어머니의 무시로 인해 헌터는 자신의 갖춰진 삶이라는 것에 허기를 느낀다.
이러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헌터는 먹지 않는 물체들(구슬, 압정, 건전지 등)을 입 안에 넣고 그것을 처음에는 다소 의구스러워 하며, 괴로워하며, 나중에는 태연하게 삼켜낸다. 엠마가 사랑을 통해 자신을 깨달았다는 점이 제목 '아이 엠 러브'에 녹아 있는 것처럼, 헌터가 무언가를 삼켜내면서 새로운 욕망을 일깨워간다는 점은 똑같이 제목 '스왈로우'에도 나타난다. 곧 아이의 초음파 검사를 통해 이상물질이 그녀의 위장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남편과 시부모(나아가 남편은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린다)가 알게 되고 그들은 새로운 욕망에 눈을 뜬 헌터에게 정신이상이라는 명칭을 짓고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상담치료의 비용을 대고 급기야는 그녀를 감시하는 일꾼을 집에 상주시킨다. 헌터는 자신의 증상을 정신이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주변인들의 주장을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그녀에게 쏟아지는 남편과 시부모의 관심에 이내 그들의 기대를 따르고자 노력하고 심리상담사에게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얘기함으로써 그녀의 이상증세의 근본적인 원인을 상담사가 추적하게끔 해주기도 한다. 상담사가 그녀에게 왜 그러한 것들을 삼키는지를 물을 때 "자신감이 생겨서요"라고 말하는 헌터의 대답은 다른 이에게는 정신병처럼 보이겠지만 헌터 자신에게는 오직 나로서의 삶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임을 알게 해준다.
엠마의 남편 탄크레디와 그녀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안토니오가 엠마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하게 영화에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유적으로는 보여진다. 초반부 가족만찬이 시작될 때 남편은 엠마에게 장신구를 채움으로써 자신 가문의 며느리이자 자신의 아내로서의 직책을 부여하는 반면, 안토니오는 엠마를 옥죄고 있는 이와 같은 장신구와 옷가지를 하나씩 벗김으로써 그녀가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향을 떠나 온 그녀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 남편과, 그녀의 본래의 이름을 듣고는 그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는 안토니오의 행동 역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 장면들이 직접적으로 의미를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에, 엠마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편과 가족을 배신하고 심지어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전개가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후반부 그녀가 안토니오를 사랑한다는 고백에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는 남편의 대답은 그동안 남편이 어떻게 엠마를 대했는지, 그리고 그 남편의 가문에서 엠마가 고독하게 살아왔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머니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아들 에두 역시도 엠마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그녀를 몰아붙임으로써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도 엠마 '자신'은 인정받지 않았다는 점을 암시한다.
헌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부모는 헌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자꾸만 자신의 며느리로서 그리고 아들의 아내로서의 자격에 그녀를 끼워맞추려고 한다. 그녀의 이상증세를 알게 된 남편 리치는 아내를 이해하거나 원인을 알아보려 하기 보다는, "이런 문제가 있었으면 결혼 전에 이야기를 했어야지"라고 윽박을 지르며 그녀를 하자 있는 상품인 듯 취급한다. 심리상담사에게 본인이 상담비를 지불하니 같이 앉아있겠다고 말하는 시아버지부터, 결국 증세가 나아지지 않자 헌터를 위한다고 말하며 정신병원으로 보내려 하지만 그녀가 도망치자 "내 아들 돌려내! 넌 나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라며 본심을 드러내는 남편까지 실은 그녀를 그녀 자체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나타난다.
그녀들을 사랑한다 말했지만 실은 그녀를 하나의 사람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던 이중적이었던 그녀의 남편들 앞에서, 그녀들은 맞서지는 않는다. 다만 도망칠 뿐이다, 물론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 보기에 말이다. 그녀들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에게로, 또는 스스로 자신이 걸어갈 길을 개척하여 그 길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절묘하게도 이러한 도약을 도와주는 이들이 두 영화에 공통적으로 있는데 <아이 엠 러브>에서는 엠마를 줄곧 옆에서 지켜보았던 가정부가, <스왈로우>에서는 시부모가 고용하여 헌터의 집에 상주하는 동안 그녀를 감시한 감시자이자 일꾼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그녀들에 가까이 머무르며 풍족한 집안의 아내라는 타이틀 뒤에 가려진 그녀들의 고충과 외로움을 이해하지만 고용인으로서의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들이 나아가려는 도약을 기꺼이, 그리고 몰래 도와준다.
그녀들은 달린다. 달리고 달린다. 비록 남편과 자신이 아꼈던 큰아들 에두가 자신을 대하는 본심을 알게 되었고 가문에서 버려지게 되겠지만, 엠마 자신이 딸 베타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듯 딸 베타 역시도 곧 나비처럼 날아오를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비상의 종착지에는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안토니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헌터 역시도 자신이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녀가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온갖 것을 삼키던 증세의 (어쩌면) 원인일 아버지를 찾아가 사과를 받음으로써 그녀는 앞으로의 삶을 자신 있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알약을 삼키며 한껏 개운해진 마음으로 화장실 밖을 나선다.
그녀들 앞에 놓여진 삶은 이전만큼 풍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비난을 받고, 어떤 이에게는 이상한 여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녀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무엇으로서 항상 자신을 지워왔던 그녀들에게, 적어도 그녀들만은 '나'로서 '나'만의 삶을 욕망하기로 결심한 선택은 그 어떤 선택보다 용감하고 값지며 누구도 뭐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와 같다. 나는, 누군가의 무엇으로 행복할 그녀들보다는 그녀 자신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그녀들의 삶을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