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델마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by 르몬트

요아킴 트리에(Joachim Trier) 감독, 원제: Thelma, 2017




독일은 가을인지도 모르게 겨울같이 추운 날이 이어지고 있다. 이 서늘하고 어두운 하루들을 더 서늘하게 만들어줄(?) 영화가 그리하여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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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다소 섞이기 힘들어 보이는 소재들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다소 음침해 보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부모를 둔 델마는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홀로 다니다 아냐라는 동급생과 절친한 사이가 되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하지만 델마에게 잠깐씩 찾아오는 발작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평범해 보이는 스토리는 전혀 다른 주제로 전환된다. 어릴 적 끔찍한 사고로 자신에게 있던 어떤 힘(내지는 초능력)을 발현하지 못하도록 억눌렀던 부모. 강력한 신경안정제로써, 델마 자신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도문을 끊임없이 외우게 함으로써 델마는 자신의 본능과도 같은 힘을 억제하라는 아버지의 강요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녀는 질문을 던진다. 왜? 기독교의 교리 아래 엄격하게 자라왔던 델마에게 동성 친구인 아냐는 하와에게 선악과를 베어 물 것을 종용하는 뱀의 움직임처럼 두렵지만 그만큼 유혹적이다. 델마는 이미 선악과를 물었고, 에덴을 떠나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세계로 떠나려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냐에게 이끌리는 델마에게 '네가 외로웠던 것'이라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또 다시 억누르려 한다. 하지만, 이미 의문을 가져버린 델마에게 그런 아버지의 행동은 자기 모습대로 살 수 없는 세계 속으로 가둬두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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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이 있고 여성을 좋아하는 델마 자신의 본성과 엄격한 아버지의 속박 사이에서 그녀는 자주 발작한다. 이것은 여러 시각적인 모습으로 영화 속에서 나타난다. 발작이 오며 빠르게 점멸하는 조명이나 등, 비상해 오르려는 새의 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델마 앞에 놓인 투쟁의 과정과 그를 시각화하는 이미지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성장서사의 공식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과 아마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할머니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길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나쁜 것인지 고민하는 델마의 모습이 이어진다. 또한, 델마 자신이 겪고 있는 심인성 비뇌전증에 대해 알아보면서 나오는 마녀사냥에 관한 언급은 이 영화가 단순히 성장 영화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뒤집혀진 성장에 관한 우화"라 말했다. 아버지나 기독교로 대변되는 기득층의 서사에서 델마는 결국 자신의 힘을 발현하며 아냐와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 '마녀', 즉 옳지 않은 길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중후반에 자신이 진정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델마는 무언가를 토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작은 새이다. 소진한 듯 누워 있는 델마의 옆에 똑같이 죽은 듯 잠자코 있던 새는, 잠시 후 퍼드득 날개를 펼치며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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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미지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할 수 있다. 바로 델마가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것은 옳거나 그르다는 단어로 명칭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영화 속 델마는 여러 모습들로 해석할 수 있다. 델마는 마녀라 치부받으며 속박되어 살아왔던 여성이다. 동시에 현재까지도 배척되고 있는 소수자이다.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고 분출하지 않았다면 그녀 안에 있는 새는 끝까지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날아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막 하나의 세계를 깨뜨렸고, 그녀 안에 있던 새는 알을 깨고 나와 자유의지대로 다닐 수 있는 세상으로 날아간다. 어린 델마의 손을 촛불 위에 갖다대며 이 화염이 곧 지옥이라며 경고했던 아버지는 이전의 수많은 여성들이 화형에 희생되었던 그 모습으로 불에 타오른다. 다시 태어난 델마는 수면 밖으로 상승하여 날아가지만, 델마의 본성을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고 억눌렀던 아버지는 반대로 수면 아래로 하강할 수밖에 없다.

초능력, 동성애, 가족과의 충돌이라는 상황에 있는 델마라는 한 소녀의 이야기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독특한 성장 영화임과 동시에 잘 만들어진 페미니즘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비범하게 영화 속 세계관을 그리는 것이 마치 요르고스 산티모스 감독의 <송곳니>도 떠오르게 한다. 낯선 소재도 이렇게 탁월하게 그려내는 걸 보며, 유럽권 영화를 늘 기다리게 된다.


2019/03/2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