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네버 렛 미 고
마크 로마넥(Mark Romanek) 감독, 원제: Never Let Me Go, 2010
원작자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원제: Never Let Me Go (우리나라에서 '나를 보내지 마'로 번역, 2009)
빈말이 아니라 가을은 정말로 책을 읽기 좋은 계절이다. 흑색의 활자와 백지의 대비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가을날의 공기에 그 활자들이 자연스럽게 담겨 호흡으로 내게 잔잔하게 흡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 중에는 출간된 이후 영화나 다른 매체로 리메이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을 맞이하여 원작 책과 리메이크된 영화를 비교하는 리뷰를 몇개 올리려 한다. 첫 번째는 영화로 리메이크된 줄을 모르고 골라 읽은 후에, 관련 정보를 찾다가 리메이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즈오 이시구라의 <나를 보내지 마>, 그리고 영화 <네버 렛 미 고>이다(원제는 둘 다 같지만 책의 경우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 문장은 영화와 소설의 내용을 모두 아우르는 문장이기도 하다. 이 문장에서 느껴지듯이 소설과 영화가 다루는 소재는 '복제인간'이다. 다만, 여타 SF물과 다른 점은 첫 번째로 시점이 먼 미래나 가상현실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발생해서 이어져오고 있는 현재'에 놓고 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흔히 SF물에서 발생하는 갈등상황과 그로 인한 긴장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첫 번째 특징으로 인해 가상 미래를 그리고 있음에도 어쩐지 예전의 클래식한 느낌이 나게 된다. 영상화된 영화에서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마치 고전 명화 속 주인공이 알고 봤더니 '복제 인간'이라는 데에서 오는 이질감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이 이질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소설과 영화의 포인트는 SF적 소재 자체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전과 첨예한 논쟁 그리고 희생이 모두 지나간 이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두 번째 특징도 당연히 수반됨을 알 수 있다. 소설과 영화는 장기기증의 운명만을 안고 태어난 '복제 인간'이 옳냐 그르냐와 같은 대립의 시기는 이미 지나왔고 그것이 상용화되어 이들이 어떻게 자라며 그로 인해 발생될 문제들에 나직하게 질문함으로써 내용을 끌어간다. 여기에는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대담함이 아닌, 당연시 여기는 의식에 과연 그러한가를 역으로 조용히 되물어볼 뿐인 태도이며, 세상으로부터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의 전반에 깔려있는 잔잔함 - 혹은 체념, 허무감 - 이 SF 소재를 담고 있는 여타 영화만큼 스릴감을 안겨주지는 못해도,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이 매체를 통해 과연 바뀌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소재와 분위기로는 에바 그린이 주연한 영화 <움>도 떠올려 볼 수 있다.)
소설과 영화는 주인공 캐시의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과거 회상은 캐시와 그녀의 주요 관계인 친구 루스, 그리고 토미를 둘러싼 몇몇 에피소드를 중점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 독립되어 보이는 이 에피소드들은 이후에 주요 인물들이 벌이게 되는 (그나마) 극적인 사건으로 나아가게 하도록 요인을 제공한다. 과거는 이 세 친구가 어릴 적 함께 생활하며 교육받은 기숙학교 '헤일셤'과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학교 출신 이들과 모여 장기 기증의 있기 전까지 대기하게 되는 '코티지'라는 공간을 중점으로 전개된다. 그 곳에서 발생하는 작은 사건들과 이로 인해 변화하는 관계, 주인공들의 심리를 서술하는 부분은 여타 성장담과 결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찬찬히 성장의 서사를 쌓아 올리는 것은, 언급했듯이 후반부에 진실을 마주한 주인공들의 대사가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되는 데 공헌한다. 헤일셤과 코티지의 삶 속에 그들은 영락 없는 인간과 같다. 인간과 다름없이 성장하며 그 과정 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한다. 캐시는 "네버 렛 미 고"를 반복하는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아이를 힘겹게 얻은 한 여인을 상상하곤 했으며(클론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운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의미가 있다), 다른 아이들과 남달랐던 토미는 특이한 그림으로 아이들에게 비웃음을 사지만 예술을 정형화된 방식으로만 그려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 같으며, 캐시와 토미 사이의 교류를 질투한 루스는 이 둘의 관계 중간에서 감정의 외줄타기를 한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삶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이들의 운명은 오직 하나로 정해져 있다. 체력이 버틸 때까지 장기기증을 하다가 이후에 생을 마감하는 것(이를 작품 안에서는 '완성'된다고 표현한다). 수술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간병사를 직업으로서 가질 수는 있지만, 이 역시도 오로지 인간이 바라보는 복제 인간으로서 삶의 바운더리 안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일반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삶이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여기에 반기를 들지는 않는다. 그저 질문을 할 뿐이다.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왜 그것을 증명해야만 했나요? 라고. 다만 소설에서는 이 질문이 후반부의 갑작스럽게 마주한 인물과의 대화에서 잠시간 비출 뿐이며, 오히려 영화에서 "우리는 이렇게도 인간과 닮아 있는데, 왜 인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까"는 대사를 통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질문에서 느끼게 되는 여운은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영화화를 하며 원작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언급한 경우 이외에 다른 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위에도 언급한 바 있는, 헤일셤에서 주디 브릿지워터의 <Never let me go>라는 곡이 들어가 있는 테이프를 얻게 된 캐시가 혼자 방에 남아 노래 속 화자를 아이를 힘겹게 가진 한 여인을 상상하는 씬이 있다. 클론들이 만든 예술품들을 가지러 가끔씩 헤일셤을 방문하는 마담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고, 후반부에도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이 재차 이루어지며 오히려 '충분히 인간의 자질을 가진' 속성을 더 부각하는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한 차례 언급될 뿐이라서 원작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시퀀스로 보일 수 있다.
두 번째는 오히려 원작에 없고 영화로만 만나볼 수 있는 장면인데, 장기를 적출하는 수술에서 등장 인물이 숨을 거두는 장면이다. 분명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맥박이 없음을 알리는 신호음에 의료진이 급히 조치를 취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겠지만, 클론의 운명은 거기서 '완성'(Complete)되므로 숨이 끊긴 등장 인물을 차가운 수술실에 내버려둔 채 적출한 장기만을 들고 급히 사라지는 의료진들만이 보여진다. 이 장면은 등장 인물들이 처한 불합리한 운명을 직접적이자 단적으로 보여주는 씬으로,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정을 끌어올리고 이들이 던지는 질문에 설득력을 더 갖게 해준 계기가 된다. 또한 의도한 것이겠으나 '완성'된 등장인물의 생기를 잃어가는 눈동자가 정확히 카메라 너머의 관객들을 바라봄으로써 영화의 제목인 "나를 버리지 마"를 간접적으로 외치는 느낌도 받는다.
동시에 헤일셤에서 다른 교사들과는 달리 보다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루시 선생의 움직임은 영화에서 좀더 직접적으로 나타났고, 후반부 진실을 알게 된 대화 씬에서 헤일셤의 교사들이 복제인간으로서 단일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에 반대하여 그들의 유년시절만큼은 인간과 다름없이 교육하며 지켜주려는 이른바 체제 안에서는 그나마 행동적인 이들이지만 그 역시도 그럴듯하게 구색을 갖추기만 한 것이며 당사자인 캐시, 토미 등을 비롯한 클론들에게 결국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음을 알게 된 부분은 소설에서는 "우리에게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인데, 사람들에게는 왔다가 가 버리는 유행과도 같다"며 말하는 캐시의 대답에서 작가의 비판의식을 눈여겨볼 수 있으나, 영화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굳이 원작과 리메이크된 영화를 비교를 한 이유는, 이 다른 점이 각각의 방식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말의 장면 역시도 원작과 영화가 다른데,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둘 다 좋아서 영화가 단순한 리메이크만을 담고 있지 않고 감독 나름의 해석 또한 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들은 복제인간이라는 과학적 발견으로 인해 평균수명이 늘어난 과거를 상정하며 그것이 옳고 그른지의 어떤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이들의 생을 찬찬히 그려나가면서, 구슬프게 울리는 노래를 들으며 베개를 안고 팔을 흔들었던 캐시의 모습을 마담과 캐시가 엇갈리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영혼을 지닌 이가 원래부터 인간인 자인지, 인간으로 만들어진 자인지를 생각해보게끔 할 뿐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가끔은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의 자격이 없는 이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을 지녔다고 해서 그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런 말종 같은 이들에 비해 더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으로 자연히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인간을 보조할 뿐이며 그 기능을 다 하면 버려질 뿐인 존재로 남아야 하는가.
2020/06/01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