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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Sep 20. 2024

가을 : 비브르 사 비

삶이란 죽음보다 질겨서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감독, 원제: Vivre Sa Vie, 1962





깎아지른 벼랑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있다.
한번도 상승해보지 않은 그의 삶은 늘 그대로다. 벼랑의 높이는 그에게 죽음의 깊이다. 모든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벼랑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신발만 벗는다면 그는 낙하하는 한 점 꽃잎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신발이라는 마지막 끈은 그를 벼랑에 단단히 옭아묶고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삶이란 죽음보다 질겨서.

- 안도현, 중앙일보(17.11.24자)


장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는 흑백영화에 단순한 이야기인 듯 하면서도 난해한 전개로, 끝나고 나서도 마음에 드는지도 몰랐지만 몇몇 대사가 눈에 머무른 영화이기도 했다. 그런 대사들과 영화 제목을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조합해보다가 의미를 찾아본다.


Vivre sa vie란 뜻은 '자기만의 생'이다. 


우리는 곧잘 우리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영화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얘기를 한다.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의 선택에 자유가 없다는 뜻일까. 혹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니 죽은 것과 다름 없는 것일까(실제로 영화는 마지막 주인공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으로 나오는데, 추정상 죽을 것이며 이 죽음 역시도 주인공의 선택지에는 없었으니 삶의 끝도 주인공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만의 생을 살 수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단어의 유사함 때문인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라는 책이 연상된다. 거기엔 울프 자신이 꽤나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여성으로서 사는 삶이 무척이나 불행하고 척박함을 말한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자살로써 마감한다).



울프가 말하던, 여성이 살아가기에 (정확히는 작가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인 '자기만의 방과 일정한 수익이 있는 경제권'이 안타깝게도 영화의 주인공인 '나나'(배우 안나 카리나)에게는 없었다. 그녀는 경제력이 없어 주거권을 박탈당했으며 꿈을 잃고 벌이를 위해 하던 매춘 역시도 자신의 집이 없으니 포주의 관리 하에 있는 조그마한 방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그리고 말했듯 생의 마지막 역시도 자신의 선택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나 없는 내 인생'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가. 


감독은 이러한 주인공의 생을 건조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사상을 촉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은 감독의 불친절한 전개방식에서 마땅히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말했듯 대놓고 이런 감정을 느끼도록 요구하지는 않으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없앰으로써 감상자가 자발적으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젊은 앵글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하는 나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로 인해 안타깝다. 만약 이러한 주인공의 삶과 자신의 삶이 세세하게는 아닐지라도 본질적으로 동질하다 여겨진다면, 연민 뿐만 아니라 씁쓸함 역시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생(生)은 안도현 시인이 말했듯 죽음보다 질겨서, 나 없는 내 인생이 벼랑에 묶인 끈처럼 지독하게 이어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끝낼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축복이라는 것이다. 죽음마저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나의 삶은 그리하여 고달프며 쓰다.


나아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니 나답게 사는 삶이 아니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삶이 아니었을 때, 그것을 지각하고 다시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당신 몸은 다른 이들에게 잠시 내어줄지언정, 당신 자신은 당신에게 바쳐라"는 몽테뉴의 말은 그래서 몽상처럼 다가온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허무함을.



2020/02/0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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