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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Aug 31. 2024

여름 :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모두 언젠가 시즈쿠였다

곤도 요시후미 감독, 원제: 耳をすませば, 1995




최근 이 영화를 다시 봤다. 처음에 보았을 땐 크게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이상하게도 여름만 되면 생각이 나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실제 배경지가 되었던 일본의 타마라는 곳도 가본 적이 없고 시간적 배경인 90년대 초 역시 나에겐 기억이 없어 어찌 보면 전부 경험하지 못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묘하게 익숙함을 느꼈는데, 이 영화를 처음 보는 친구와 최근 함께 보는 와중 (이 친구는 공교롭게도 곧 일본, 그것도 정확히 이 영화의 배경이 된 타마 쪽으로 교환학생을 간다) 작중 꿈을 좇는 세이지가 꼭 본인 같다는 친구의 말에 그제서야 기시감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 영화에 나오는 시즈쿠, 세이지, 시즈쿠의 친구 유코, 스기무라와 같은 인물들과 닮았거나 그 언젠가 이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하루를 보내며 자라왔다. 평범한 가족이 있는 집에서 가끔을 밤을 새가며 좋아하는 책을 읽고, 방학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 위해 선생님에게 당당하게 열쇠를 요구하며, 심심하면 도서 대출 카드에 적힌 이름을 소리내어 읽어보고, 여름의 찌는 더위를 뚫고 시원한 도서관에 앉아 보고 싶었던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친구의 전화에 달려나가 답을 알 수 없었던 그 당시는 심란했던 고민을 나누고,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간 가게가 운명처럼 마음에 들어온, 시즈쿠가 겪었던 경험을 나 역시 언젠가 지나왔던,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느끼고 있는 경험들이다. 그제서야 나의 기시감이 이해가 되었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참여한 지브리 영화 중 드물게 허구의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독서를 좋아하는 중학교 3학년 시즈쿠는 자신이 읽는 책의 대출 카드에 세이지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발견한다. 알고 보니 동급생이었던 세이지와 우연히 다소 기분 나쁜 첫 만남을 가지고, 절친한 유코는 시즈쿠의 또 다른 친구인 스기무라를 짝사랑하여 이 둘을 이어주려 하지만 스기무라가 오히려 시즈쿠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왔음을 알게 되며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린다. 아버지가 일하는 도서관에 평소처럼 책을 읽으러 가는 중 기묘한 고양이를 마주하게 되고 호기심에 그를 따라가다 우연히 마음을 사로잡는 골동품 가게 "지구옥" 안에 들어서게 되고 그 곳의 주인인 니시 시로를 알게 된다. 처음엔 악연으로 만났지만 책을 좋아하는 공통된 취향에 점차 세이지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바이올린을 제작하려는 그의 꿈을 듣게 된다. 이윽고 견습생으로 이탈리아에 두달간 가게 되었다는 세이지의 소식을 듣고 시즈쿠 역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신의 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세이지의 말에 골동품 가게에 있던 고양이 남작 인형 '바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와중에 시험 성적이 크게 떨어져 가족과 갈등이 있었으나 총력을 기울여 소설을 완성하고 첫 번째 독자로 소설에 영감을 주었던 골동품 가게의 주인인 니시 시로에게 먼저 보여준다. 이후 견습을 마치고 돌아온 세이지는 새벽중 시즈쿠를 몰래 찾아와 동네의 전경이 보이는 곳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배경으로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유학을 결정했다는 동시에 좋아해왔던 감정을 표현하며 시즈쿠에게 고백한다. 이처럼 이야기는, 학창 시절 그 누구든 겪었거나 주변에서 보았을 흔한 데다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다루면서도 이 영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등장인물들의 꿈과 사랑같은, 그 시절에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작중 시즈쿠와 세이지를 비롯한 동급생들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나 가족, 관계에 대한 고민들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은 그때의 고민은 크게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며 웃어 넘기겠지만, 그 시절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시즈쿠와 같은 이들에게는 품고 있는 모든 고민이 치열하며 이때 경험하는 모든 체험이 새롭고 신선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세이지가 유학을 떠나며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함에도 시즈쿠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우리 결혼하자!"고 박력 있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Country Road, Take Me Home을 들으며 이들의 순수함을 응원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저 시절이 축복처럼 주어졌으나 어느 하나라도 순수하고 진득하게 해본 적이 있는가, 하고 말이다. 


중학생 시절 시즈쿠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만의 창작 노트가 있었다. 여전히 미완성인 글들을 떠오르는 대로 썼다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책들을 다시 탐독하던 것은 꼭 세상에 나 혼자만이 있는 것 같던 모두가 잠든 새벽의 나의 조그마한 방 안 책상 앞 램프에 의존한 불빛에서 비롯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동안은 피곤할 틈이 없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애틋해지는 것과 같이, 이 영화를 앞으로도 계속 보면서 시즈쿠와 세이지의 순수함을 계속해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떤 것을 하도록 견인력을 가질 만큼 큰 횃불은 아니겠지만 무언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했던 그 시기를 잊지 않고 있다는 작은 불씨가 여전히 내 마음에 있다는 뜻일 테니까.





사진출처 @ 스튜디오 지브리 공식 홈페이지(https://www.ghibli.jp/works/mimi/#frame


A Hilly Town · Yuji No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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