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지음
『싯다르타 』를 읽고 난 밤이면 꿈속에서조차 가슴이 서늘하다. “그윽하고 부드러운, 어쩌면 매우 자비로운 듯하기도 하고, 어쩌면 조소하는 듯하기도 한 미소”만으로 자신의 ‘완성’을 드러내 보이는 저 소설 속 존재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순간에 불과하다. 1초라도 더 들여다보고자 고개를 숙이면 그는 어느덧 범람하는 강물로 둔갑해 있다. 발을 디디면 그대로 끝, 한 치 앞이 절벽이고 낭떠러지다. 절벽이 미소 짓고 있고 낭떠러지가 그윽한 깊이를 내보이고 있다. 매혹, 바로 그것이다, 온통 그것이다. 그러나 꿈속의 나는 저 벌려진 심연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소멸하기엔 저 소용돌이의 소리가 너무 요란하다, 뭐 그런 식의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으며, 꿈속의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고 두려워한다. 꿈속에서라도 속 시원히 죽지 못하는 나, 이런 ‘나’를 어째야 좋을까.
헤르만 헤세는 ‘나’와 같은 인종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싯다르타이며, 싯다르타의 삿된 아들이며, 싯다르타가 채 꽃피우지 못한 상처다. ‘나’는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뱃사공이 될 수 있으며 백치, 바보가 될 수 있다. 강이 될 수 있고 숲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종국엔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다. 다시 읽은 『싯다르타』는 오늘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것 같다. [그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마라, 그 무엇도 행하지 마라, 비우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라, 행하던 모든 것을 멈추고 그저 귀를 기울여라, 빨아들여라. 형상 없이 흘러가는 저 강과 함께 그저 덧없이 흘러라!] 진리, 혹은 존재의 비약과 변용을 기록한 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실’만을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놀랍게도 오늘 처음 깨닫는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는 말하였다. 「잠자리에 듭시다. 친구여, 당신에게 그 〈다른 것〉이 뭐라고 이야기해줄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것을 배우게 될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죠. 이보세요, 나는 학자도 아니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사색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요. 나는 단지 남의 말을 경청하는 법과 경건해지는 법만을 배웠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어요. 만약 내가 그것을 말하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러면 아마 나는 현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소. 그러나 나는 그런 능력이 없으므로 한낱 뱃사공에 불과한 것이오. 그리고 강을 건네주는 일, 바로 그것이 나의 임무예요. 나는 수많은 사람들, 수천의 사람들을 건네다주었지요. 그들에게는 나의 강이 단지 여행하는 데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들이 여행하는 목적은 가지가지였지요. 돈과 사업을 위해 여행하는 사람도 있었고, 혼인식에 가거나 순례를 떠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이 강이 방해가 되었지요. 뱃사공은 그들이 장애물을 신속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 수천 명 가운데 몇은, 이 강이 장애물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었던 셈인데, 그 까닭은 그들이 이 강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이 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에요. 이 강은 나에게 성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것이 되었지요. 싯다르타, 이제는 쉬러 갑시다」(155~156)
그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바주데바는 내내 잔잔한 표정을 지은 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이처럼 귀 기울여 듣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느꼈다. 그는 자신의 온갖 고통과 온간 불안한 마음이 바주데바를 향하여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은밀한 희망이 그한테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자기를 향하여 되돌아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마치 그 상처를 강물에 넣어 씻어서 결국은 상처가 아물어 강물과 하나가 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싯다르타는 아직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여전히 고백을 하고 참회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싯다르타는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사람이 이제 더 이상 바주데바가 아니요, 이제 더 이상 인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이 사람이 스스로의 내면으로 마치 한 그루 나무가 빗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자기의 고백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이 바로 신 자체라는 것을, 이 사람이 바로 영원한 존재 자체라는 것을, 점점 더 강렬하게 느꼈다. 싯다르타가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멈추고 있는 동안, 바주데바의 변해버린 본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그것을 더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런 인식 속으로 파고들어가면 파고들어갈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이상스럽지 않은 것이 되어갔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싯다르타는,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질서가 잡혀 있으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바주데바는 벌써 오래전부터 벌써 언제나 그런 존재였는데, 다만 자신만이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였을 따름이라는 것을, 사실상 자신도 그런 바주데바와 거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점점 더 많이 통찰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이 늙은 바주데바를 마치 백성들이 신들을 우러러보듯이 그렇게 우러러보고 있음을, 이러한 상태가 끊임없이 지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속에서 바주데바에게 작별을 고하기 시작하였다. (194~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