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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길 밖에서 만난 길들의 아우라

길 밖의 길 | 유순하 지음

by 김담유

‘길’이란 무엇일까.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자동차 따위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낸 일정한 너비의 공간”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 뜻풀이가 ‘길’에 담긴 수없이 많은 의미들을 온전히 아우르지 못한다는 데는 여러 설명이 필요치 않을 듯하다. ‘길’이라는 기표에 담긴 기의가 원래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길’이라는 기표 자체가 다소 모호한 탓도 있겠다. 가령 길이란 것은 ‘땅 위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날것들의 길은 저 창공, 푸른 공허 안에서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무늬와도 같은 게 아닐까.


‘길’과 관련한 낱말 가운데 가장 거대해서 가장 모호한 것을 꼽자면 바로 도(道)가 아닐까 싶다. 우주 본체, 우주 질서, 삼라만상의 존재 원리 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보편 원리로서의 도(道), 이것에도 여지없이 ‘길’이라는 말이 붙는다. 이쯤 되면 ‘길’이란 한 인생 족히 걸고 풀어볼 만한 화두가 아닐는지……?


오랫동안 픽션의 공간을 뒤로하고 논픽션의 공간을 떠돌던 중진 작가 유순하가 아주 많이 유연해진 소설을 들고 독자들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의 유랑을 무사히 이끌어준 건 바로 ‘길’이라는 화두였다. 사석에서 만난 작가는 ‘한글로 씌어진 글에 대한 질투’ 때문에 ‘영어로 씌어진 텍스트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무렵 작가에게 한글에서 영어로의 언어 이동은 한국에서 타국으로의 공간 이동과 동시에 겹쳐 진행되었던 듯하다. ‘길 밖의 길’이 창조된 데는 이렇듯 평범한 한 사람의 특별한 한 상황이, 혹은 특별한 한 사람의 평범한 한 상황이 ‘필연의 길’처럼 자리한다.


군부 독재하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자살한 남편을 둔 한국인 변혜경, 남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을 아끼지 않았으나 결국 버림받고 만 일본인 후미코, 프랑스 국적을 가졌으나 잡종 혼혈 집시라는 이유로 냉대와 천시 속에 살아온 존, 이렇듯 상처투성이 세 사람이 정해(졌다고 믿어)진 길, 그 길 밖에서 만나 떠돌며 세상 어느 집보다도 안온하고 세상 어느 방보다도 따뜻한 쉼터를 서로의 마음속에 마련한다는 소설 속 이야기는 특별히 낯설지 않다. 일견 상투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상투(常套)가 상투를 딛고 넘어설 때, 충분히 새롭고 이미 낯설어진 세계가 존재를 아우라처럼 둘러싸는 법.


힌두와 잉카 문명지에서 풍겨 나오는 범문화적 향기, 만년에 이른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해 보여주는 통찰, 몸으로 직접 가 닿은 지상의 길들, 그 길들 갈피마다 꽂힌 인간의 기억과 너울대는 신의 미소……등이 이 소설을 둘러싼 다채로운 아우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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