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시를 읽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담유 Oct 08. 2022

불타는 기름통, 장정일이라는 예외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시인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은 여러모로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누군가의 첫 시집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문학적 윤리의 한 행위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해본다. 한 종류의 문학적 인간, 그가 꿈꾼 세계의 시원은 바로 첫 시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때 ‘시원’이란 한 시인의 순수한 욕망,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리하여 첫 시집 (다시) 읽기는 한 시인의 욕망의 맨낯, 욕망의 내장을 맞닥뜨릴 절호의(!) 기회다. 순수 욕망의 지점을 좌시하는 것, 그러한 ‘행위’는 문학의 범주 안에서는 윤리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문학적으로 완성되었는가, 완성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첫 시집 (다시) 읽기에선 부차적이다. 첫 시집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한 시인의 문학적 행보를 알리는 증표이므로, 우리는 이 증표를 통해 한 ‘인간’의 지향성과 향방을 가장 핵심적으로 진단할 수 있다. 적어도 첫 시집에선 시인이 꿰어낸 목걸이가 대체 ‘어떤 목걸이’냐 하는 문제는 좀 덜 문제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초점은 그의 목걸이가 ‘어떤 구슬’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에 맞춰져야 한다. 그리하여 시원이란 곧 구슬[재료]이다, 라는 공식이 나로서는 영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장정일 시는 어떤 구슬들을 꿰고 있는가.     


장정일이라는 시인은 언어 조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시인이다. 적어도 그는 전통 서정 시인은 아니다. 대상과의 합일을 노래할 때 파생되는 전통적 서정성은 그의 시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서정성은 사건이나 정황을 이야기하듯 노래할 때 파생되는 낯선 리듬에서 비롯한다. (이윤택은 장정일이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나 정황의 처소인 ‘지하’에 주목하며, 전위세대 청년 문화의 한 양상인 미국 앙그라 문화[Under Ground Art의 합성어]의 어법과 그를 연결짓고 있다.) 이게 그거고 그게 이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서정성은 전통 서정(의 실체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의 입장에서 볼 때 불온하고 외설적이다. 그의 리듬은 파격에 다름 아니며, 그래서 낯설다. 이 낯선 리듬에는 적자가 아닌 사생아적 감성이 실려 있으며, 이것이 그의 서정성의 요체다. 그래서 그의 ‘자지’와 ‘보지’들이 벌이는 교미 행각은 결과적으로 ‘놀이’이고 ‘유희’일 수밖에 없다. 그의 놀이, 그의 유희는 교미의 생물학적 결과인 ‘아이’ 생산에 집착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포르노적이다.  

    

가령 〈도망중〉이라는 시를 보자. 도망중인 한 사나이는 새침하고 예쁘고 귀여운 한 여자를 만난다. 그런데 그녀 또한 도망중이다. 도망중인 사나이와 여자가 만났으니 그들의 ‘결혼’, ‘살림’ 또한 도망할 수밖에 없다. 살림 자체가 도망하고 있으니 사나이와 여자가 기다리는 소식[아이]은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소식을 좇아 가다가다[하다하다] 못해 사나이는 메리라는 말 잘 듣는 개를 사온다. 하지만 여자는 따진다. 메리가 누구예요, 메리가 대체 누구냔 말예요?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고, 여자는 구석에 구겨져 운다. 짐을 싼 아내는 통고하듯 말한다. 깨끗이 끝장내기로 해요. 그들은 함께 도망다니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따로 도망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뿔사, 도망중에, 무관심중에, 고대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어떤 시간중에 불어 오른 메리 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나이는 메리가 요구한 만큼 돈을 지불해주고 아이와 산다. 아카시향에 젖은 아이, 무죄에 쌓인 아이. 벌거벗은 아이의 몸뚱이를 꼭 껴안은 사내는 아이의 심장에 자신의 귀를 대어본다. 확, 확, 확, 확, 확, 심장 뛰는 소리. 그런데 이 무슨 일인가. 아이는 저 혼자 도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망중〉이라는 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으로서의 아이가 결국 (그들에게서 벗어나) 저 혼자 도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케 함으로써 ‘기다리던 소식’ 자체가 허구적이고 허영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결국 한 남녀의 결합의 산물로서의 ‘소식’ 그 자체는 ‘도망중’이라는 상황에서 비롯했으므로 결과적으로 ‘도망중’의 운명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도식적 해석을 버릴 때 이 시는 좀더 문제적이 된다. 소식이란, 아이란, 본래가 도망하는 존재다. 도망하는 것들을 좇는 삶은 결과적으로 ‘도망중’이라는 형식을 거듭할 수밖에 없고, 도망하기 위해선 ‘혼자’가 되어야만 한다. 도망의 노상에서 만난 한 사나이와 여자는 소식 같은 거, 아이 같은 거 집어치우고 그저 도망 자체를 즐겨야만 했다. 장정일에겐 남녀 만남의 산물로서의 ‘아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바로 그러한 희망의 ‘껍데기’야말로 외설이고 불온이다. 적어도 장정일에겐 포르노는 포르노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장정일을 오해한 많은 ‘어른’들은 그의 이유 있는 유희를 외설로 몰아붙이다 못해 사장시키고 감옥살이시켰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정말 장정일의 고백을 믿지 못했을까. 그는 일찍이 〈지하인간〉이라는 시에서 천명한 적이 있다. “내 이름은 스물두 살”이라고!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지만, 그런 까닭에 자신에겐 비석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쓸쓸해도 오늘은 죽을 수 없는……. 스물두 살의 그는 동정(童貞)의 경계에 선 존재다. 아이와 어른의 점이지대에 속한 그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라서 혹은 아이이면서 어른이라서 놀고 있지만 놀고 있지 않다. 그의 유희는 그야말로 ‘이유’가 있다. 그는 양키들의 산업사회, 그것이 앙양하는 상품 문화의 한 축약판인 ‘하숙’에서 벗어나 강정에 가야 하고 길안에 가야 한다. 세상의 숱한 유원지 중 하나일지언정 한밤에도 두 눈 뜨고 찾아가는 땅, 송신탑이 높은 산봉우리마다 꽂혀 있어 구석구석 독처럼 차오른 전파의 폭우 속에서도 숲이 커지고 나무들이 푸르게 차오르는 그곳으로.      


장정일이 (돌아)가고자 하는 그곳을 유토피아 혹은 율도국이라는 말로 간단명료하게 환원할 수는 없다. 그가 지향하는 곳은 결코 순수하고 모범적인 곳이 아니다. 그는 그런 전형을 내세우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하지만 암시한다. 그곳, 바빌론 강가 사철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고 있는 이들은 적어도 울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는 기름통을 들고 추운 밤을 걸어 동쪽에서 떠오른 각각 하나씩의 붉은 해일 것이며, 때로는 무서운 대머리, 때로는 불타는 기름통이라 불릴지언정 매일 아침 희망의 시간들을 자신의 가슴에 직접 새길 자들일 터이므로. 이들이야말로 그가 꿈꾼 시원이며, 시원을 향하는 바로 그 자신의 분신들이 아닌지……?     

 

스물두 살, 자신의 ‘점화력’을 온몸으로 선포했던 장정일의 첫 시집을 읽는 동안, 11월이 가고 12월이 왔다. 이 겨울의 초입에 그의 ‘불타는 기름통’을 재발견하게 된 것, 천행은 아닌지…….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서 되게 낮잠 자 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석유를 사러          


싸늘한 지폐 한 장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초단파 수신기를 타고 칼립소 뱃노래가 들린다.

그러나 여기는 추워

타오르지 않을 때는 난로마저 손과 발을 얼린다.

그럴수록 눈을 냉정히 닦고 바라보기로 해

책상 위에 하얀 타자기

키판은 고른 옥수수알 같이 박혀 있고

그것들보다 더 단정한 모습으로 지폐는 누워 있다.

아침에 나는 저것으로 라면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어떡하지 이 밤은 겨울도 참지 못해

큰 바람 소리로 신음하고

눈물만큼의 기름이 저 난로에는 없다.    

 

점점 한기는 예리한 창을 갈아 내 허리께를 찌른다.

예수의 죽음 확인하던 로마의 병정처럼

두 번…세…번……나는 빨리 결정해야 한다

석유를 사기 위해 아침을 굶기로 할 것인가

굶어죽기보다 먼저 동사할 것인가에 대하여.

원래 선택이란 좋은 잔을 마련하고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것

네 앞에 놓여진 잔 가운데 최선의 것을 택하면 되리라

그렇다면, 그래. 석유를 사서 갈등이 끝난다면

약간의 석유가 겨울을 유예하고

따뜻함이 이 저녁의 동사를 몰아낸다면

만나 그것으로 즐겁지 않겠는가     


석유를 사기로 한다. 그러자 신의 둥근 후광인 듯

얼었던 방은 생각만으로 더워지고

될 수록이면 상상이 식기 전에 양말 하나를 더 신고

때묻은 목도리를 한다.

기름통은 신발장 근처에 버려져 있었고

거미줄이 쳤다. 손잡이에 묻은 먼지를 닦고 들어올릴 때

가득 채워지기 위해 한층 가볍게 들리는 기름통의 무게

여간 즐겁지가 않다.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별들과 가로등 사이로 난 희미한 길을 더듬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주유소가 바라보이는 신작로 앞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천천히 보내 주었다.     


좀더 기다리며

가슴속에서부터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싶기에

느릿느릿 걸어 유리로 만들어진 집

붉다란 입간판이 주인집 문패보다 큰 주유소 마당에 서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른다

그러면 유리에 묻은 성에보다 두터운 외투를 입은

소년이 나오지. 졸면서 기름 호스를 잡지

나는 기름이 통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리고 얼마나 빨리 소년의 작업은 끝나는 것일까

계기는 오백원이 가리키는 숫자쯤 해서 멈추고

돈을 치른다. 하지만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스승을 팔기 위해 고심한 만큼

또한 내게 결정하기 어려웠던 몫

등을 돌리고 성에를 풀어 놓은 거대한 누에 속으로

재빨리 소년이 사라지면

나는 올 때보다 천천히 걷는다     


난관을 모면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시도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내일 굶주린다 해도, 겨울에 따뜻해지는 일은

꿈꾸는 일보다 중요하다.

처음보다 질긴 채찍으로 바람은 내 등을 후려치지만

난로가 있어 기름통을 가지고

밤 늦게 걸을 수 있는 자는 또 얼마나 행복한가?

어느 틈에서인지 한 방울씩의 석유가 새고

몇 개 전주 너머의 너의 방이 별보다 밟게 반짝일 때

그때인가. 나는 끝없이 걷고 싶어졌다.

끝없이 걸어,     


동쪽에서 떠오르고 싶었다.

대지를 무르게 녹이는 붉은 해로 솟아나고 싶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복숭아씨 같은 입을 딱딱 벌리며

무서운 대머리다. 불타는 기름통이다.

아아 매일 아침 내 가슴에 새겨지는 희망의 시간들을

무어라고 부를까.      


*

    

물속의 집  

        

냇물 속에 집이 있다.

냇물 속의 집은 물풀에 쌓여 아늑하고

잘 씻은 자갈 위에 기초 놓아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어질고 순한 꽃게와 송사리떼가

물속의 집을 들날락거렸다.

언제나 나는……물……

속의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집에 들어가 밀린 때가 굳은

등짝을 밀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는 날

바짓단을 무릎까지 걷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어

문을 연다. 물의 고리를 잡고

문을 연다. 열리지 않는다

문도. 물도.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어리석은

심사에는 내가 열려는 문고리가

물에 실려 자꾸 떠내려가는 듯이

보였다. 아니면

출렁이며 물무늬가 생기는 만큼

열어야 할 문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못다 연다는 것일까. 또는

물속의 집 속에도

왼쪽 목에 무서운 칼집을 가진

나와 같은 한 불행한 청년이 있어

내가 당기는 문을 맞잡고

물속의 문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인가.     


언제나 나는. 갈 수 없는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집은 점점 붉게 흐린 황혼 속으로 깊어졌다.

그리고 연꽃송이가 불타오르듯

하나. 둘,

물 밑에서부터

별들이 돋아났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물속에 잠겨 있던 집이

수천 허공을 가로질러

앞산 중턱에 날아가 박혔다.

험한 산.

아궁이 지피는 불쏘시개같이

끝이 까만 나무들이 우뚝우뚝 솟은 산중턱에

물속의 집이 있었다.

아, 모든 건 환영이었구나!

나는 무안해서

물에 젖은 발목을 마른 흙에

비벼 닦았다.     


갑자기 그 집에서 울리는 듯한

개짖는 소리가 이오처럼 들렸고

밥타는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끌어당겼다.

그렇습니다.

나르시스가 살러 간 것같이

우리가 물속에 집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거기 ‘너’가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