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열림원, 2003
내가 당신 때문에 울었다고 쓰면, 당신은 내게 돌을 던질 것이다.
내가 당신 때문에 아팠다고 쓰면, 당신은 내게 칼을 꽂을 것이다.
내가 당신 때문에 시들어간다고 쓰면, 당신은 내 심장을 갈라 보일 것이다.
내가 죽어야만 사는 적(敵)이여, 적의(敵意)여, 오해여, 착각이여!
내가 ‘당신 때문에’라는 이유를 버렸다고 쓰면 당신은 이제 어찌할 것인가.
우리의 이 기나긴 오독의 우로보로스에 마침표를 찍어줄 텐가.
*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힘이 칼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자주 있다. 내가 휘두른 것이 칼날이 아니라면, 가령 미소라거나 덕(德)이라거나 선(善) 같은 것들이라면 세상의 적의가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날들은 없(었)으리라. 사랑이 돌아서고 벗이 뒤통수를 치며 세상이 나를 갈취해가는 그런 일은 겪지 않아도 좋(았)으리라. 내가 휘두른 칼날에 베이고 상처 입은 사람아, 물(物)아, 용서해다오. 나의 의도는 결코 기획된 적이 없고, 그리하여 나의 의도는 의도가 아니며, 그런 나는 너처럼 아프다는 변명에 한 번쯤 귀 기울여다오.
*
세상의 돌부리들을 이해하는 일이 시 밖에서도 할랑할랑 가능하더냐고 자꾸만 딴죽을 걸고 싶어집니다, 세월 씨.
넘어져도
흙 묻은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던 길을 그냥 가는 사람은
너그럽고 슬기로운 인물이다
폐금광 가는 길가에
큰 부채처럼 늘어 서 있던 포플러
그 나무그림자들 틈에 끼여서
내 그림자도 덩달아 길어지던 해질녘에
느닷없이 발을 걸어
나를 넘어뜨렸던 돌부리
땅 위로 부리를 뾰족하게 내놓고
시치미를 떼던
돌!
돌인데 어찌하랴
그걸 땅에서 파내 먼 하늘로 던진다 한들
날개 없는 돌을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