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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순간과 영원을 붙드는 포토카피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존 버거 지음

by 김담유

이러저러한 이유로 언어를 ‘사물’로 대해 올 수밖에 없던 순간부터 품어온 소망 같은 게 하나 있는데, 그놈의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엿가락지 같은 소망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뻑적지근한 활자들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좌우지간 그 소망이 뭐냐 하면,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평문도 아닌, 그렇다고 그림이랄 수도 없고 영화랄 수도 없고 음악이랄 수도 없는 혼잡종의 글을 한번 우뚝 써보는 것이다. 장르가 아닌 장르, 장르 속으로 한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장르, 그리하여 장르를 넘어서는 장르, 그런 장르로서의 글. 꿈이 너무 거창한가……? (하고 스스로를 책망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은 생의 팔 할은 헛꿈에 의해 유지되는 것!)


존 버거가 ‘언어’로 찍어낸 포토카피들(Photocopies)은 그런 점에서 내게 유효한 모델이 되어준다(라고만 얘기한다면 버거 씨가 서운해하겠지……?). 인물과 사건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서사구조적 글쓰기에 충실한가 싶으면, 행간마다 그리고 편편마다 함축되어 있는 여백들은 시에 다름 아니며, 무엇보다 그의 글이 응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노련한 사진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고, 자신의 문장과 이미지에 그만의 색채와 형태를 불어넣을 줄 안다는 점에서 그는 화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예술적 행위들을 최종적으로 사유할 줄 안다. 사유와 응시, 그리고 시적 여백과 서사적 긴장이 함께하는 공간, 나는 그것을 종종 버거의 글에서 맞닥뜨리곤 하는 것이다. 그는 《본다는 것의 의미》의 〈자코메티〉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조각 작품들 중 하나에 대하여 상상해 보라. 가늘고 더 이상 뜻하는 형태로 만들 수 없으며, 움직이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부릴 수도 있는 것이고,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면밀히 살피거나 응시하는 것만이 가능한 그러한 것이다. 당신이 응시하면 그 인물상도 되받아 응시한다. 이러한 점은 또한 대부분의 평범한 초상화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차이를 갖게 되는 것은 당신이 응시하는 시선과 그녀가 응시하는 시선이 가지고 있는 궤적을 당신이 어떻게 의식하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즉 당신과 그 인물상 사이의 시선이 오가는 좁다란 회랑이 그것으로서, 어쩌면 이것은 만약 그러한 것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기도의 궤적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 회랑의 양쪽에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에게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존재하는데, 곧 조용히 서서 응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녀가 그처럼 가느다랗게 되어 있는가 하는 이유가 된다. 다른 모든 가능성들과 기능들은 박탈되어 버려진 것이다. 그녀의 실재 전체는 보여진다는 사실로 축소되어 버린다.” (254쪽)


나는 위 인용문 중에서 강조된 부분을 종종 다음과 같이 바꾸어 읽어보곤 한다. ‘나에게 도달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존재하는데, 곧 조용히 서서 응시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조용히 서서(혹은 앉아서 혹은 누워서……) 응시하는 순간, 나는 한없이 가늘고 긴 자코메티의 군상들, 부피감도 없이 존재감도 없이 스적스적 걸어 다니거나 서 있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혹은 격상한다. 그 순간은,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 헛꿈을 꾸는 순간보다 더 충일하고 충만하다. 내가 한없이 가늘어지는 꿈, 선에 가 닿는 꿈, 한 줄 수평선이 되는 꿈…….


(글의) 이미지는 말이 없다. 하지만 정말 말을 하지 않는가? 사진이나 그림의 언어는 단지 ‘말’이 아닐 뿐, 그것들의 의사소통 구조는 말의 그것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열려 있는 무엇이다. 쌍방의 시선 교환은 물론이거니와 자위의 응시조차 가능한, 그리하여 우주적인, 순간과 영원의 질서 속으로 직행하게 하는 이 기묘한 장르를 나는 종종 버거의 주의 깊은 글에서 확인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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