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미셸 슈나이더 지음
빛을 이해하기 위해선 암흑 속에 있어볼 필요가 있다. 누워 있건 앉아 있건 서 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암흑 속에 영혼을 푹 담그고 침윤해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요점이다. 때문에 물질적인 암흑은 중요하지 않다. 눈꺼풀을 감을 때, 하루의 저녁과 밤이 찾아올 때, 우리를 내리덮는 암흑과 앞에서 말한 암흑과는 관념적으로 무관하다. 때문에 우리는 빛을 이해하기 위해 전등을 끈다거나 밤을 기다린다거나 하는 행위 대신 종종 내면 깊은 곳, 잊혀진 시간과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해도 문제될 것 없다. 우리의 내면에 맹인의 암흑보다 더 캄캄한 지대가 겨울잠에 든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의 어둠을 귀 기울여 듣는 자, 그들은 때로 시인이기도 하고 철학자이기도 하고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종의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념에의 몰두, 본질에의 열망, 그런 것들이 그들이 뜯어먹는 일용할 빵이고 간을 졸이며 한 모금 한 모금 들이켜는 포도주다. 그들의 암흑으로의 순례는 때로 고통이나 번뇌로 지칭되기도 한다. 순례를 떠나는 그들의 표정이 죽을 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노인들의 표정처럼 신산해 보여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들의 표정과 암흑과는 또 한편으로 무관하다. 암흑은 겉, 외피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례를 떠나려는 자들의, 그리고 순례 중인 자들의 표정은 무표정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때때로 그들의 얼굴을 지나가는 홍조나 웃음, 긴장 같은 것들은 그들의 표정이 아니라 그들 안에 담긴 암흑이 짓는 표정이다. 암흑이 홍조를 띠고 암흑이 웃고 암흑이 긴장하는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아 들린 사람처럼 건반을 두들겨대는 연주자의 몰입은 그 자신의 몰입이라기보다는 그[내면]의 암흑의 몰입이랄 수 있다. 이를테면 그의 무표정이 암흑에게 제자리를 내주고 온전히 텅 비워지는 순간이랄까. 그 순간 연주자는 일종의 매체, 채널이 된다. 영매가 되고 무당이 된다. 가열하듯 건반을 오고가는 손가락과 열려 있는 모든 구멍으로 땀방울을 밀어내는 얼굴, 그리고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것처럼 페달을 통해 音의 세기를 조율하는 조심스러운 발, 이 모든 신체 기관이 내면에 잠들어 있는 암흑을 일깨우는 데 희생된다. 아니, 복무한다. 신체는 잠든 영혼을 깨워 그를 온전히 살아 있게 할 때 이른바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 살아 있게 된다. 따라서 손가락 움직임, 그 기계적인 테크닉에만 집중하는 피아니스트는 온전한 암흑이 되지 못한다. 그의 음악은 울림이나 감동과는 무관한 단순 반복 체조에 불과해진다. 암흑의 심연을 흔들어 깨우는 자, 그에게서 비로소 빛이 탄생한다. 그의 몰입, 그의 땀방울, 그의 탄성 들은 빛의 파편들이다. 그것들이 한 땀 한 땀 엉킨 시간의 타래 속에서 황금 잉어처럼 건져 올려질 때, 우리는, 암흑은, 빛으로 화한다. 우리 자체가 빛이었음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캐나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로 그 빛을 몸소 살아낸 피아니스트였다. 고 나는 생각한다. 화려한 무대를 버리고 잿빛의 골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굴드는 시시각각 그리고 사방팔방에서 자신을 조여 오는 세균에 대한 강박으로 몸서리치던 심기증 환자이자 자폐자였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투신은 일종의 신에 대한 수도자의 그것처럼 순결하다 못해 금욕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음악을 불가지적 존재로 받아들였다. 순간순간 소멸하는 소리의 궤적을 좇아 들어간 그는 그것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잡음과 사막까지도 방편으로 삼을 줄 아는 이였다. 그에겐 연주 순서가 잡혀 있고 청중이 군집해 있는 음악홀이 더없이 갑갑했다. 그곳은 무한을 지향하는 곳이 아니었다. 무대를 버리고 그가 택한 것은 음반 녹음이었다. 그에게 음반 녹음은 다시, 다시 반복할 수 있는, 수정과 첨삭이 가능한, 거슬러 올라가고 재탐색이 가능한, 시간이 고도로 응축된, 본질에 가장 가까운 音을 구현할 수 있는 매체였다. 그는 음반 녹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미미하게나마 알렸다. 세상과의 단절을 몸소 실행한 그가 음반 작업을 통해 부활시키고자 한 이는 바로 J. S. 바흐였다. 그가 연주한 바흐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귀에 스며든다. 억지스럽지 않고 과장돼 있지 않다. 스타카토처럼 간결하고 경쾌하다. 이것은 그가 바흐에게서 뼈를 깎는 듯한 고통, 간격과 거리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함몰되지 않으려 '이성'의 한복판에서 연구하고 또 연구했음을 알려준다. 바로 그 '손가락'이라는 방편으로 말이다. 바흐를 온전히 읽어 들인 몇 안 되는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인 굴드는 바흐의 음악에서 악기를 넘어서고 또 넘나드는 그 무엇을 발견해냈으며, 그의 음악이 내장하고 있는 일종의 후퇴감까지도 포착했다. 바로 音, 그 자체에 대한 순정한 몰두. 굴드와 바흐라는 X와 Y축의 함수선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굴드와 바흐라는 각각의 암흑은 音을 통해 빛이라는 함수 곡선을 그려낸 것이다. 매순간의 소멸, 매순간의 부활. 時間의 線을 순간순간 무화시키며 또한 초월시키는 音, 그것의 현존을 시시각각 살아낸 그들은 어쩌면 형이상학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음악은 형이상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들의 음악이 빠져나간 나의 신체는 과학이랄 수도 없고 형이상학이랄 수도 없는 제3의 공간, 제8요일, 13월의 처소가 되어 있는 것이다.
굴드와 바흐, 그리고 음악에 대해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한 이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Glenn Gould, piano solo)》를 쓴 미셸 슈나이더(Michel Schneider)이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 프랑스 문화성의 음악·무용 부서를 지휘하고 감독했다는 짤막한 이력 한쪽에 갈리마르에서 출간한 이 책이 놓여 있다. 영감과 통찰력으로 풍만한…….
“예술가는 위험에 처한 존재이다.”(90쪽)
“피아노를 연주하는 비결은 어느 정도 자신을 악기로부터 떼어 놓는 방식에 있다.”(99쪽)
“나는 연주를 하는 것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느낄 필요가 있다. 이 손가락들은 일정한 순간에 나와 접촉하고 있는, 그저 독립된 연장물들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전념해 있으면서도 나 자신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101쪽)
“피아노의 터치와 관련된 정신적 형상은 개별적으로 취해진 음들을 건드리는 방식보다는, 이 음에서 저 음으로 가기 위해 채택된 관례와 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엇과 관계가 있다.”(108쪽)
“현재 여러분이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될 지식의 모든 양상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부정(否定)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놀라운 점, 그의 광증과 야만성을 용서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개념을 발명했다는 점입니다.”(115쪽)
“새 악보를 받아 재빨리 터치를 익혀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나는 청소기의 효과를 조성해 놓는다. 상반되는 소리를 내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가능한 한 피아노 곁에 가까이 두고서.”(116~117쪽)
“음악의 동강들이 내 정신 속으로 뚫고 들어오면 나는 신기하게도 나 자신과의 접촉점을 잃고 대화로부터, 또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초연해진다.”(120쪽)
“나는 거의 연주를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한두 시간 정도 연주한다.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래도 이따금 피아노를 건드려야 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으니까.”(120쪽)
“음악에 대한 초월적 촉감의 경험과 전진의 개념이 있어야 한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것이 음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내 자신의 경우엔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대부분의 시간을 피아노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다. 어쩌면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때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울리는지 듣고 싶어지니까……완벽한 분석은 피아노와 거리를 둠으로써만 가능하다.”(123쪽)
“나는 미완 작품의 전문가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첫 페이지 끝까지 써내려가서는 거기서 멈춰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서 그만둔다. 어쨌거나 나는 이 마지막 페이지가 내게서 달아나도록 내버려둔다.”(147~148쪽)
“감금 상태는 우리의 참된 내적 원동력과 참된 정신력을 측정해볼 수 있는 이상적인 시험일 것이다.”(151쪽)
“나는 예술에 자신만의 소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158쪽)
“가장 소리가 잘 들렸던 장소들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던 곳들이었다.”(158쪽)
“푸가는 가장 중요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긍정과 대답, 도전과 응수, 부름과 반향의 관계들 속에서 이 부동의 황량한 장소들(인간 운명의 열쇠를 쥐고 있지만, 그의 창조적 상상력의 모든 기억 이전에 있는)의 비밀을 발견해내려 하는 호기심.”(163쪽)
“나의 사생활은 간소하고 단조롭다. 그러므로 이 삶에 대한 책은 짧고 지루할 것이다.”(183쪽)
“나의 황홀경은 나의 음악입니다.”(184쪽)
“시간의 방향과 시간의 등급에 따라, 이들이 개별적인 성부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연주하기. 오직 하나의 성부를 들을 것, 그 성부가 말하는 것에서 출발해,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전해져오는 메시지를 인지하면서.”(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