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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아프락사스, 혹은 실재

라깡의 재탄생 | 김상환, 홍준기 지음

by 김담유

헤세의 『데미안』을 읽은 것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프락사스’를 (재)발견하기까지는 그 후 15년이란 세월이 지나야 했다. 이십대 후반, 더는 세상에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 나는 비로소 사춘기를 앓았다. 내 욕망과 타자의 욕망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나는 스스로 골방으로 걸어 들어가 분열되었고, 분열된 나를 보게 되었고, 분열된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을 보았다. ‘실재’라는 이름의 그 시선, 텅 빈 기표이자 의미의 현존인 순수차이, 빈틈을 말이다. ‘찰나’가 존재 방식인 탓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그 ‘빈틈’의 존재를 일러준 이는 바로 라캉이었다. 나는 라캉을 읽으면서 15년 전의 어느 겨울, 야전 침대에 누워 마침내 자기 내면 안으로 육박해 들어가게 된 싱클레어, 그의 아프락사스를 다시 만났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아프락사스는 신의 지위를 갖고 있지만 파괴된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결여’이고 ‘빈틈’이다. 아프락사스는 내게 라캉의 ‘실재’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것의 다른 이름은 바로 無였다. 없는 것[無]을 욕망하는 주체, 낱낱이 분해된 내 존재의 잔해 위에 앉아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는 그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지독한 자기모멸이 따랐다. 수시로 내 자신이 수치스러워 미칠 지경이었으며, 불면증과 잠의 바닥을 병든 수캐처럼 오갔다. 하지만 나는 라캉의 도움으로 내 (정신의) ‘구조’를 들여다보게 되었고, 주체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나의 분열을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 내가 일용해온 빵이 無라는 사실을, 나를 그 일용의 덫으로 덧씌우는 것이 또한 無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라캉이 외친 ‘프로이트로의 복귀’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말실수나 농담 등, 언어적 요소들에 천착해 신경증자들의 무의식을 포착했던 프로이트의 혁명성을 라캉은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포착하고 부활시켰다. 라캉이 주목한 프로이트의 유명한 이 명제는 우선적으로 언어가 차이, 즉 빈 공간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듯이 주체의 의식적·무의식적 심리 과정도 빈 곳을 중심으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신경증이나 도착증, 정신병 같은 병리적 현상이 이러한 ‘심리적 틈새’를 메우려는 주체의 실존적 태도임을 밝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역사적·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구조적 사실’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의 말에 따르면, 모두 신경증자이다! 신경증자는 자신의 욕망에서 ‘소외’되어 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가 바로 신경증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 또한 無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즉 타자의 ‘결여’를 알아차리는 순간,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된다. 그 ‘분리’의 지점에서 정신분석(의 역할)은 종료된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고, 파괴된 세계는 또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언어’를 가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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