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베르 | 막스 프리슈 지음
실재의 진리는 오로지 아이러니라는 형식에‘만’ 담겨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입자는 파동에 의해서, 파동은 입자에 의해서 그 존재성과 역학이 증명되듯, 선은 악에 의해서, 미는 추에 의해서, 나는 너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에 의해서, 아군은 적군에 의해서 증명되는 이 세계, 이 상대성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아이러니라는 존재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상대성이 먼저인지 아이러니가 먼저인지는 좀더 따져봐야 할 문제겠지만 전자가 개념이라면 후자는 실상이라는 점에서, 내 경우 후자의 작용에 좀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 물론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나는 종종 아이러니가 신(神)의 언어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양차 대전의 현장을 통과해온 스위스 작가 막스 프리슈에게도 아이러니의 문제는 가볍지 않았던 듯하다. 고귀하고 유서 깊은 정신성의 역사를 가진 민족에게서 인간성 말살의 끔찍한 역사적 비극이 탄생했다는 아이러니는 프리슈로 하여금 충격적이고도 불가사의한 의문에 사로잡히게 했을 것이다. 저널, 희곡, 소설 등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그의 많은 글들은 오로지 이 의문[아이러니]에 대한 탐구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통속적으로 ‘운명’이나 ‘숙명’ 등으로 요약되는 ‘신비’를 얘기하기 위해 자주 ‘기계’를 경유하고[‘호모 파베르’], 인격(혹은 인칭)을 얘기하기 위해 인칭을 파괴한다[‘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이런 그의 전략은 무척 효과적이다. 그래서 그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소설은 더하다. 만들어진 이야기에서, 철저히 구조화된 극에서 느껴지는 실재성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이 아이러니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은 한갓 통속담으로 오해될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희극이 아닌 이유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의 통속성, 비근함에 있듯이…….
생애 처음으로 신혼여행을 떠난 50대 중년 사내가 겪게 되는 청천벽력 같은 비극, 에 대해서는 떠들지 않는 게 좋겠다. 혹시라도 이 소설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 그저 한 번쯤 읽어보시라고 권해본다.
* 이 소설에서 눈여겨볼 점은 '스토리'가 아니라 '플롯'이다. (작가에 의해) 이야기가 쓰이는 순서들. 기록 날짜들을 유념해서 보면 가장 핵심적인 사건에 해당하는 소설의 전반부는 파베르가 모든 걸 알아차린 후에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그에겐 사후적이라는 뜻. 사후성이란 곧 구성에 다름 아닐 텐데,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자의 입장에서 내뱉어지는 말들이란 일말의 비극성을 띨 수밖에 없다. 한갓 도구적 인간일 뿐인 파베르가 "생명은 경이롭다"라고 탄식하는 부분에서는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소설은 한갓 이야기일 뿐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플롯' 기능이지 싶다. 실상 어떤 이야기가 들려지든 그건 거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지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떻게'라는 형식은 누대에 걸쳐 되풀이되고 반복되어온 이야기들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준다. 그 차이의 형식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그저 스토리 차원에 머무는 한담일 터.